(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1] Dog King(3)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Previously on PANic Song(지난 챕터 보기)
Prelude - Blackened
Chapter 1 - Dog King(1)
Chapter 2 - Dog King(2)

“전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어요. 형, 혹시 김영신이 기억나요?”

“김영신?”

“예, 김영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 왜 형 제대하기 직전에 왔던 어리바리 있잖아요?”

“몰라, 인마. 기억 안 나. 제대 직전에 배속된 애를 내가 제대로 기억이나 하겠냐.”

“그런가? 하긴 뭐 형은 워낙 제대 준비로 바쁠 때였으니.”

“그치. 나가서 뭐 먹고 살지 고민하느라 하루하루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지.”

“하여간 뭐, 그런 쪼다 같은 새끼들은 도 중사가 훨씬 심하게 괴롭혔었거든요.”

“안 봐도 뻔하다. 그 작자가 원래 약한 사람은 더 심하게 볶아대고 그랬지.”

“덕분에 말년에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 했는데요. 여하튼 도살자, 아니 도사견 그 개새끼한테 한 번 물리면 엄청 피곤했다니까. 아오, 진짜 그 새끼한테 당한 거 얘기하다 보면 오늘 밤 세도 모자를 거야. 진짜 귀신은 뭐하나 몰라. 그런 씹새끼 안 잡아가고.”

“자자, 진정하시고. 한 잔 하자.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연거푸 들이킨 잔에 노릇한 누룩 냄새가 뱄다. 잔을 든 수강은 어느 새 한쪽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크큭, 형, 그때 말이에요. 우리가 도살자 그 새끼를 얼마나 싫어했냐면 말이에요.”

다시, 뜻 모를 웃음. 콧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옛 상처를 들추는 수강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한층 어두워 보였다.

“병사들끼리 무전기 호출부호로 장난치던 게 있었거든요?”

“무전기 호출?”

“예, 아마 간부님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그게 뭐냐면 음, 형, 조교들끼리 훈련 갈 때 무전기 들고 나갔잖아요.”

“그랬나? 나는 뭐 군대에서의 일은 영 가물가물해서…”

“아, 형은 뭐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어요?”

“이 새끼가. 너도 나이 먹어봐라, 인마. 원래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빨리 잊게 되는 법이야. 하물며 군에서 있었던 일인데…”

“뭐 여하튼, 훈련 나갈 때 무전기 들고 나가게 되면 말이에요. 우리들끼리 통신병 역할 하는 애를 따로 정해야 했거든. 그 빌어먹을 통신보안 때문에.”

“그런데?”

“통신병끼리 호출할 때, 각자 자기 호출 부호를 정해서 부르는 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단 말이에요.”

“뭔 소리야? 각자의 호출부호를 정한다니?”

“그러니까 우리끼리 각자의 콜사인을 정해서 그걸 호출부호로 사용하는 거예요.”

“무슨 그런 머저리 같은 짓거리가 다 유행이냐?”

“군에 있어 봐요. 다 그런 게 멋있어 보이고 그런다고.”

“그래서 네 콜사인은 뭐였는데?”

“에, 그게…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데, 으흠, 전 나중에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캐시」(cash)라는 콜사인을….”

“어우, 씨발.”

“아, 왜요? 저보다 더 이상한 애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인마, 콜사인이 캐시가 뭐냐, 캐시가.”

“아, 어쨌든! 당시에 우리들끼리 무전기로 호출하다보면 간부님들 호칭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근데?”

“그렇게 간부님들 호출부호 정할 때, 우리 나름의 규칙이 있었단 말이죠.”

수강의 한쪽 입술이 슬쩍 치켜오른다. 그건 평소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히죽거림이었다.

“규칙?”

“예, 그게 그러니까 기본적으론 간부들의 영문 이니셜을 활용한 거였는데…”

“그게 뭔 소리야.”

“그러니까 간부들 영문 이니셜을 포네틱 코드로 전환해서 부르는 거예요. 우리들만 알아듣는 일종의 암호 같은 거지. 나중에 혹시 걸려도 문제 안 생기게…. 예컨대 형 같은 경우는 이름이 나(Nah) 신일(Shin-il)이니까…”

“…노벰버(November) 시에라(Sierra)였겠네.”

“정답!”

Outside-Open-NATO-Alphabet-v11.jpg

“근데 그게 왜? 군에서 포네틱 코드면 별로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잖아?”

“흐흐, 근데 그렇게만 부르면 재미없잖아요. 그 와중에도 몇몇 간부들은 우리가 요령껏 별명을 바꿔 불렀단 말이지.”

“호오, 여기부터가 재밌어지는 거구만.”

“예, 흐음, 누가 있나. 아, 그래. 형, 주임원사였던 길성우 원사 있잖아요. 설마 그 분은 기억하시죠?”

“야야, 내가 그 까칠한 양반을 어떻게 잊겠냐.”

오늘 참, 생각지도 못한 이름들이 계속 오르내리는군. 신일은 방금 전 수강의 표정을 따라하듯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크크, 길 원사 그 양반 진짜 빡셌죠? 융통성이라고는 진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는데.”

길 원사를 처음 봤을 때, 신일은 시퍼렇게 날 선 언월도를 떠올렸다. 창병기가 살아 숨 쉰다면 분명 그런 모습일 것 같았다.

“맞아. 그런 게 있었어. 그 양반한테 걸리는 애들은 정말 죽을 맛이었을 거야. 워낙 빈틈이 없었으니까.”

“형하고도 별로 안 좋았죠?”

“뭐, 딱히 안 좋았다기보다는…”

신일과 길 원사, 둘은 정반대 좌표에 찍힌 대칭점이었다. 신일은 길 원사의 매뉴얼화 된 깐깐함에 숨이 막혔고, 길 원사는 나 중위의 나사 빠진 헐렁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둘의 갈등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소문과는 달랐다. 매일같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신일은 늘 길 원사에게 묘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한 번 세운 원칙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야 마는 강건함,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강철 같은 고지식함이야말로 길 원사의 약점이자 매력이었던 것이다.

“뭐, 여하튼 그 양반은 성이 길(Kil) 씨니까 케이(K), 원래대로라면 「킬로」(Kilo)라고 불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정한 그 사람 콜사인은 「킬러」(killer)였다는 거지.”

“킬러?”

“예, 그 아저씨, 우리가 저지른 실수 같은 걸 워낙 귀신 같이 잡아내고, 사소한 거 하나도 전부 다 꿰고 있는 빠꼼이라 별명이 「찐빠 킬러」였거든. 그러다보니까 호출부호도 조심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니까? 혹시 걸려도 이건 발음이 잘못된 거다, 이런 식으로 발뺌할 수 있게.”

“하지만 사실은 무전기에다 그 양반 별명을 대놓고 불렀다?”

“그렇죠. 그거 우리 나름대로 엄청 짱구 굴린 거였다고요.”

“뭐, 그 정도면 요령 피운 것치곤 귀엽네. 그래도 그 킬러 아저씨, 도 중사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나았던 거 아닌가? 난 뭐 그 양반, 그렇게 싫지 않았는데?”

“에이, 형 비교할 걸 비교해야죠. 길 원사 그 아저씨 말이에요. 앞뒤가 꽉 막혀서 그렇지, 나름 우리 얘기도 많이 들어주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 그럴 거 같더라니까.”

“자자, 그럼 이제부터 퀴즈입니다. 길 원사를 그렇게 응용해 부른 것처럼, 도 중사 그 개새끼도 우리가 콜사인을 좀 특이하게 바꿔 불렀다, 이건데요.”

“원래대로라면 「델타」(D, Delta) 「킬로」(K, Kilo)라고 불러야겠지만,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면?”

“그렇죠. 형 한 번, 맞춰 보실래요?”

“음, 글쎄. 이렇게까지 밑밥을 깐다는 건, 어쨌거나 포네틱 코드를 사용하기는 했다는 걸 테고.”

“아직까진 괜찮은 전개입니다.”

“재미없게 원래 방식대로 부른 것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흐음, 글쎄. 올드 스타일로 갔을라나? 2차 대전 때 미군이 사용한 코드였으면 재미있긴 하겠네.”

포네틱 코드(Phonetic Code). 메시지 전달의 오해를 막기 위해 무선통신 상 알파벳이나 숫자를 특정단어로 통일하여 부르는 협약. A는 알파(Alpha), B는 브라보(Bravo), C는 찰리(Charlie), D는 델타(Delta). 지금은 국제민간항공기구에서 제정한 코드가 널리 사용되지만,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코드는 지금의 것과 조금 달랐다.

“우와! 장난 아니다. 형,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그랬군.”

“이야, 진짜 장난 아닌데? 형, 이 얘기 혹시 이전에 누구한테 들은 적 있어요? 와, 이걸 어떻게 맞췄지?”

자식, 호들갑 떨기는. 신일은 의기양양한 웃음으로 수강의 부산에 응했다. 예전에도 저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하거나 예기치 못한 지적을 받을 때, 놈은 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선을 떨었다.

“아니, 나도 처음 듣는 얘기야. 그래도 니들이 도경욱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나도 아니까.”

Wvy9Ly8.jpg

「도그 킹(Dog King)」 신일은 오래된 암호명을 조용히 읊조렸다. 도 중사의 별명 중 하나가 개마왕이었다는 건 부대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고 보면 도 중사 그 양반은 별명도 많았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니들이 그 사람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야.”

“아, 형, 진짜 그 새끼는 인간이 아니라니까.”

“솔직히 난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애들을 심하게 대하는데 끝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게 더 신기하더라고.”

“끝까지, 는 아니었죠.”

“어? 그래?”

“아, 형은 몰랐겠구나. 형 제대하고 나서 도 중사, 한 번 사고 제대로 친 적 있었거든요.”

“결국, 정의가 승리한 건가.”

“예, 형 제대하고 바로 얼마 안 돼서요. 근데 그것도 제대로 된 징계는 아니었고, 나중에 좀 시끄러운 일이 생겨서 구두문책 정도로 끝났었어요. 그 정도면 완전 솜방망이 처벌이지, 뭐.”

“그래도 그런 사고 한번 치고 나면 사람이 좀 조용해지고 그러지 않나?”

“아무래도 그렇죠. 군대라는 곳이 워낙 소문도 빠르고, 보는 눈도 많고. 좁은 세계잖아요.”

“그래. 내 그 사람, 언젠가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다.”

“에이, 솔직히 너무 늦은 감이 있었죠. 근데 그 새끼가 윗사람들한테 아부하는 건 워낙 잘했었는데? 형하고는 별다른 트러블 없지 않았어요?”

“딱히 트러블이라고 할 만 한 건 없었는데 난 그 사람, 느낌이 영 별로라….”

“하여간 한창 그 새끼한테 쥐어 짜이면서 구를 때가 군 생활 통틀어 제일 힘들고,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 시기인 것 같아요. 아, 그때 진짜 진하 형마저 없었으면 그거 다 어떻게 견뎠을까 몰라.”

“진하? 진하라면, 그 총검술 마징가를 말하는 거야?”

“예, 맞아요. 총검술 마징가, 마진하 병장이요. 그 형은 지금도 진짜 많이 보고 싶은데. 정말 괜찮은 고참이었거든요. 아, 사실 말이에요. 콜사인으로 별명 부르는 거, 그것도 진하 형이 제일 먼저 시작한 거예요. 진하 형이 무전기로 콜사인을 마징가로 정한 걸 보고, 밑에 있던 그 양반 빠돌이들이 자연스레 따라 하기 시작한 거죠.”

흙먼지 섞인 바람이 콧등을 간질이는 기분이다. 익숙한 먼지 냄새에 신일은 잔뜩 콧등을 찡그렸다.
생각났다. 마진하, 아니 그보다 마징가라는 별명으로 훨씬 더 자주 불리던 녀석.
술잔에 고인 청주(淸酒) 위로 한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신일은 말없이 잔을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5
JST 0.027
BTC 60678.52
ETH 2339.38
USDT 1.00
SBD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