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1] Dog King(2)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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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 Blackened
Chapter 1 - Dog King(1)

이랏샤이마세!
문이 열리기 무섭게 우렁찬 인사말이 들린다. 숙련된 솜씨로 횟감을 손질하는 주방장의 칼끝에서 묘한 긴장감이 빛난다.

어느새 다가온 여종업원은 간드러진 눈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았다. 옅은 화장을 했지만 이목구미가 뚜렷해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수강은 느긋하게 예약된 방을 물었다. 그는 이 근사한 식당의 단골처럼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두 사람을 안내하는 종업원의 굽은 등이 백열등 아래 안쓰럽게 비쳤다.

종업원은 복도 끝 다다미방 문을 천천히 밀어젖혔다. 행여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레 움직였지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을 만큼 노련했다. 신일이 벗은 재킷을 곱게 접어 정리하면서도 그녀는 숙련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과도한 호의가 부담스러웠지만, 신일은 딱히 불편함을 내색하진 않았다.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한다한들 그녀의 저 가지런한 손놀림을 멈출 수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수강의 옷까지 다소곳이 개는 그녀를 바라보며 신일은 머쓱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수강은 팔을 걷어 부치며 그녀를 불러 앉혔다. 오늘 제일 신선한 생선이 뭐요, 반말 섞인 말투였지만 그게 특별히 거슬리진 않았다. 종업원이 추천한 메뉴를 아무렇지 않게 주문하면서 수강은 미리 준비한 만 원짜리 몇 장을 말아 건넸다. 내가 좋아하는 형님 모시는 자리니까 오늘은 특별히 더 잘 해줘야 돼, 잔뜩 힘 실린 목소리로 팁을 전하는 태도에 익숙한 여유가 넘친다.

“자, 형님! 한 잔 받으시죠.”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잔을 건네는 수강의 얼굴이 새삼 반갑다. 두 손으로 병을 받든 그의 자세는 경박스럽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을 만큼 절도가 넘쳤다. 짙푸른 병에 담긴 술이 잔에 닿아 투명한 황금색으로 변했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술의 빛깔은 조금 전 올려다보던 달의 색감을 꼭 닮은 듯했다.

“자, 너도 한 잔 받아라. 우리, 이게 얼마만이냐?”

“글쎄요. 직장 다니면서 두 번째 보는 거 아닌가? 그럼, 뭐 한 1년이나 됐을라나.”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다.”

전역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무수히 많은 날을 보냈던, 이젠 조금씩 빛이 바래져가는 국방색의 추억들.

두 사람의 인연은 희뿌연 흙먼지 가득한 전술학 훈련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신일은 전술학 담당 교관, 수강은 신병 교육 부대에서 조교로 근무하다 전술학 교관실로 차출된 병사였다.

군대는 굴러들어온 돌을 반기지 않는 곳이다. 굳건히 박힌 돌이 수강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연히 삐딱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순순히 자기 새끼를 넘기는 이유가 뭐겠어? 어떤 식으로든 그쪽에서 찍힌 거야. 멀쩡한 애를 보낼 리 없잖아? 아, 이 새끼 왠지 졸라 꼴통 새끼일 것 같다. 수강이 배속되기 전까지 그를 둘러싼 무성한 뒷말이 나돌았다. 그는 등장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고, 신일의 동료들은 수강의 일거수일투족에 시비를 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그때뿐이었다. 씩씩하게 전입신고를 마친 수강은 주위의 아니꼬운 시선이 무색하리만큼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갔다.

수강의 무기는 역시 주변 사람을 매료시키는 넉살과 친화력이었다. 불과 몇 개월이 지난 후, 수강이 다른 부대에서 전입해왔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박힌 돌은 없었다.

“그런데 형은 제대하고 박사 과정 들어간 거면, 진짜 평생 공부만 하는 거네요. 그 공부가 그렇게 좋아요?”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보다….”

“아니 뭔 형이 무슨 유럽 사람도 아니고, 남의 나라 옛날 얘기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그리스 신화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아. 인간의 적나라한 면을 이야기로 엮어낸 선조들의 예리함에 뜨끔할 때도 많고.”

“씨바, 그 선조가 뭐 우리 선존가.”

“그게 더 놀랍다는 거야.”

“에?”

“우리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상관없는 우리네 삶에도 통용된다는 게 놀랍지 않아?”

신일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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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앙드레 몽시오(Nicolas-André Monsiau), 올림피아의 신들(The Olympian gods), 17세기

“하하하, 아이고 이거 참.”

뜬금없는 웃음이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 중 재밌다 할 만한 내용이 있던가? 신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말을 추렸지만 역시 그중에 웃음의 소재랄 건 없었다.

“뭐, 뭐야? 그 반응은?”

“형도 차~암 안 변하네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형님, 그때랑 하나도 안 변하셨다고요. 아직까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원.”

“그런 얘기?”

“방금 형이 한 얘기 말이에요. 내가 형한테 피 한 방울 안 섞인 고대 그리스인 얘기를 몇 번이나 들은 줄 알아요?”

“아, 그 얘기냐. 아무래도 내 전공이 그쪽이다 보니 그때도 그런 얘기를 자주 하긴 했지. 미안, 좀 지루했을라나?”

“아니에요. 그런 얘기들, 애들도 되게 재미있어 했어요. 단군이 호랑이 새끼인지, 곰 새끼인지도 모르는 새끼들도 형 얘기 들으면서 한참 킥킥거리고 그랬으니까….”

“그래? 난 뭐, 기억이 잘 안 나서….”

“겸손 떠시기는. 난 형 보면서 그런 확신이 들었다니까. 아, 이 양반은 공부를 계속해도 고리타분한 꼰대는 안 되겠구나. 형이 워낙 스스럼없이 병사들한테도 잘 대해 줬잖아요. 애들한테 먹을 거며, 책이며 선물도 자주 사 주고…”

“이거 왜 이래? 오늘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헤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냥 오늘 형 만난다고 하니까 옛날 일들이 자꾸 생각나네.”

“군대 생각이 난다고? 너한테는 별로 좋은 추억이 남아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사실 저야 그렇죠. 어쨌든 형 공부하시는 거 잘 됐으면 좋겠어요. 나신일 교수, 씨바 간지 나잖아?”

“비행기 태우지 마, 인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요새 대학에서 이쪽 강좌도 워낙 많이 줄었고, 나이를 먹다보니 밥벌이 문제가 역시 발목을 잡더라고.”

“역시, 돈이 문제구나.”

“그러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군대 있을 때가 오히려 편했던 것 같아. 그 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뭔지도 분명했고. 한 달에 돈 100만원 벌기가 이렇게 힘든 지 그 땐 몰랐다. 뭐, 내가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다만.”

“크크, 그건 그래요. 우리야 뭐, 하루 종일 토할 것처럼 뛰고 악 쓰고 윽박지르고 해봐야 한 달에 10만원도 못 받았으니까. 어휴 진짜 그 땐 그거 어떻게 했나 몰라.”

한껏 엄살을 피우고 있지만, 당시 수강은 훈련병들 사이에서 꽤나 악명 높은 조교였더랬다. 그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얼마나 많은 훈련병들이 흙먼지 위에 나뒹굴었던가. 정작 본인은 아주 오래 전, 기억의 밑바닥에 묻었을 이야기. 이제 와 생각해보면 표독한 훈련조교와 상냥한 영업사원의 얼굴이 한 사람에게 녹아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뭐, 그나마 전술학 교관실 정도 되니까 제대하기 전에 책이라도 좀 볼 수 있었던 거죠. 처음에 눈칫밥만 좀 먹으면 나중에 공부하기는 거기가 훨씬 편했으니까. 형도 알다시피 전술학 교관실은 서로 사정도 좀 봐주고, 가족 같이 끈끈한 게 있었잖아요. 물론 뭐, 병신 같은 새끼도 좀 섞여있고, 진짜 개새끼도 있었지만.”

“큭, 야 나 그 개새끼 누군지 알 것 같다.”

“아 형, 진짜 도경욱이, 그 개새끼는 내가 길거리에서 만나면 턱주가리를 날려버릴 거라니까.”

말없이 입가에 잔을 대는 신일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재미있군.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런 곳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다니.

“도경욱 중사라….”

역시, 이 녀석이 도 중사를 일개 전술학 교관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리 없지, 새삼스레 분노를 곱씹는 수강을 달래려 신일은 다시 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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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좀 너희들을 심하게 다루긴 했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걸요? 진짜 손가락 하나 까닥 않고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괴롭힐 수 있는지, 원.”

분명 도 중사의 악랄함은 몽둥이나 주먹질로 다져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십 여 년에 가까운 군 생활동안 한 번도 병사들을 구타한 적 없다는 걸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던 치였다.

하지만 그에게 한 번이라도 굴러 본 이라면, 절대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애들을 때리긴 왜 때립니까, 멍청한 새끼들은 그저 살포시 굴려주기만 해도 다진 고기처럼 야들야들해진다니까요. 그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엔 늘 오싹함이 그득했다.

“형, 제가 봤을 땐 말이에요. 그 새끼, 인간이라는 존재에 상당히 깊은 조예를 가졌던 게 틀림없어요.”

“그건 또 무슨 거창한 개소리냐?”

“아, 그냥 그 새끼한테 굴러보면 딱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그 새끼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지, 어느 시점에 정신이 무너지는지 완전히 꿰고 있었어요. 형도 알죠? 그 새끼, 그 악명 높은 별명 말이에요.”

과연 도 중사는 탁월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망가트릴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고깃덩이에 비유하던 그 고약한 입버릇 때문일까. 병사들은 흔히 그를 「도살자」라 불렀다.

“하하, 그래도 난 도살자 말고 그 사람 다른 별명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아.”

신일은 도 중사의 진짜 무서운 면모를 알고 있었다.

상관 앞에서 눈웃음치며 살랑거리는 도 중사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의도된 연기라면 불세출의 예술이고, 타고난 인격이라면 중증의 정신병일 게요. 도 중사를 멀리하던 몇몇 동료들은 그의 비굴한 품성을 비꼬아 다른 별명으로 불렀다.

「도사견」 자기보다 약한 상대는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주인에게는 한없이 꼬랑지를 흔드는 개새끼.

“진짜 그 양반, 윗사람 구워삶는 능력은 아무도 못 따라갔다. 실제 윗사람들이 도 중사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아냐?”

믿음직한 베테랑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그는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아, 글쎄 제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지 않습니까. 하여간 일복 하나는 타고난 놈이라니까요. 민망한 자기자랑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을 때, 그는 언제나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맞아요. 그 새끼 만날 자기 입으로 지가 실세니, 뭐니 떠들고 다녔으니까. 아오, 그 개새, 까놓고 보면 좆도 아닌 새끼가…”

함께 일한 동료 모두가 그의 야만스런 방식을 반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뜩한 증거도 없이 조직의 실세를 흔들 순 없었다. 현장을 덮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으나, 그렇게까지 사건이 확대되길 바랄 사람은 없었다.

도 중사의 훈련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악역을 맡아 수행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반박에 어김없이 묻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모든 건 흐지부지, 문제를 제기한 측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도 중사는 무의식적으로 당당했고, 간부들은 의식적으로 침묵했다.

당시 전술학 교관실은 자타공인 최정예 부대였다. 모든 평가에서 만점을 받는 명실상부한 탑 팀(Top Team). 이상하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공을 도 중사에게 돌렸다. 그의 학대로 성장한 조교들, 그들의 바짝 오른 독기가 강한 훈련병을 양성하게 하는 원동력이라 믿었던 걸까.

결국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도 중사에게 맡기면 무슨 일이든 된다는 지휘관의 믿음, 견고한 비호를 방패삼아 무자비하게 조교들을 괴롭힌 도 중사의 잔혹성, 해묵은 증오를 쏟아내듯 훈련병에게 다그친 조교들의 광기가 뒤섞이며 그들은 끊을 수 없는 사슬로 서로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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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시는군요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꾸준히 지켜봐 주세요!

대단하세요. 멋진소설을쓰시고 ^^ 응원합니다

멋진 소설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서...쿨럭;; 응원 감사드립니다!

소설을 쓰실 때는 kr-pen 태그를 써보세요. 문학적인 글들을 위한 태그랍니다. :)

오! 꿀팁 감사합니다!

소설을 쓰시는군요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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