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1] Dog King(1)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Prelude - Blackened

저잣거리 한복판, 사내들의 언성이 높아진다. 취객과 호객꾼 간 실랑이가 제법 격렬하다. 욕정에 굶주린 객과 그의 지갑을 탐하는 꾼이 서로에게 원하는 건 분명했다.

객의 음성에 굵은 쇳소리가 섞여난다. 치졸한 가격흥정이 치열한 감정싸움으로 치달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꾼은 이런 언쟁에 이골이 난 자였다. 그는 슬쩍 한 걸음 물러서 노골적으로 딴청을 피워댔다. 그는 대로변 꽉 막힌 퇴근 차량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어 제쳤다. 그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상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꾼은 마른 휘파람을 휘휘거리며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로의 욕망을 욕망하는 진흙탕 싸움에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면 의례히 일어나는 일이려니, 일상적인 싸움의 현장을 접한 이들은 무심히 그들을 스쳐 지났다.

팽팽한 줄다리기 끝, 마침내 은밀한 거래가 성사되었다. 객의 만족스런 웃음에 꾼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정녕 저들이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던 이들인가? 그들은 어느새 서로를 형님, 아우로 추켜세우며 그렇게 뒷골목 어딘가로 사라졌다.

뒤엉킨 욕망의 진화과정을 지켜보는 건 심란한 일이다. 신일은 문득 종로 밤거리를 메운 이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길바닥에 날리는 건 온통 누군가의 명함과 어딘가의 전단지 뿐, 번잡한 길거리 광경에 눈이 지친다.

노곤한 눈을 비벼 고개를 든다. 빛으로 쌓아올린 도시를 달무리 속 눈썹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건물 사이 내리쬐는 볕이 오늘따라 선명하다. 이 정도면 서울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색감이다. 그래도 이 정도론 어림없지. 신일은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 속 달빛을 떠올리며 조용히 콧방귀를 뀌었다.

군에서의 마지막 당직근무 날이었던가. 은하수 위로 탐스러운 황금빛을 발하던 보름달, 셀레네(Selene) 여신의 축복이 깃든 듯 단아한 육감미를 풍기던 그 아름다운 달빛. 그건 분명 신일이 기억하는 가장 수려한 달의 모습이었다.

“필승! 제가 좀 늦었습니다.”

과하게 박력에 겨운 소리. 신일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금요일 밤 종로 한복판에서 이런 만행이라니,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정녕 이놈은 모르는 걸까.

“야, 인마, 쪽 팔리게 뭐하는 거야?”

“하하, 형! 오랜만이에요.”

“만날 때마다 자꾸 이럴 거야? 우리가 제대한 게 언젠데…”

“아, 뭐 어때요?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요. 하하하.”

아무렇지 않게 능청을 떠는 수강 앞에서 신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회사 생활하면서 한결 세련되어졌다지만, 이놈의 넉살은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고,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너 이 자식, 이거 또 이런 식으로 대충 엉기고 넘기려고…”

“뭐, 제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수강은 여전히 가벼운 농담조다. 무례를 범한 놈이 도리어 큰소리치는 상황이라니, 새삼스럽다 할 그의 뻔뻔함에 신일은 쓴웃음을 삼켰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새 학기 시작되고 하면 늘 똑같지, 뭐.”

“이번엔 무슨 강의도 맡으셨다면서요? 강의는 할 만 하세요?”

“뭐, 그냥저냥. 신입생 교양 강의라 별 부담 없이 시작했는데, 생각보다는 준비해야 할 게 많더라고.”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에 들면서 신일은 모교에서 세 시간짜리 강의를 하나 맡게 되었다. 졸업논문 준비로 바쁜 시기지만, 그는 흔쾌히 강의를 수락했다. 모교 강단에 서는 건 그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같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으리라, 신일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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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아테네학당(Scuola di Atene), 1509~1510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간헐적으로 맡는 번역 일 외에 돈벌이가 마뜩찮았던 그에게 매년 치솟는 대학가 방값은 치명적이었다. 시간강사의 얇은 월급봉투일지언정,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건 마른 땅의 단비와도 같았다.

첫 학기, 첫 수업. 수강생은 서른 명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 효율성과 실용성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통하는 시대, 인문학 교양과목의 인기는 시들해진지 오래다. 애초에 요새 누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현대적 이해』 같은, 퀴퀴한 강의에 관심을 갖겠는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란 원래 그런 것이다. 제자이기 전에 후배이기도 한 서른 남짓의 수강생들은 첫 날부터 신일의 낭만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는 이미 아무런 호응 없는 학생들의 심드렁한 눈빛에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린 터였다. 교정 어디에도 『아테네 학당』은 없었다. 처절한 경쟁과 치열한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곳, 학교는 이미 『메두사호의 뗏목』에나 나올 법한 지옥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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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메두사 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1819

“그래도 멋지네요. 좋아하는 공부도 계속 하고, 후배들 앞에서 강의도 하고…. 형은 군대에서도 만날 그쪽 공부하고 싶다 하시더니 결국 그 길을 가시네요. 좋겠어요.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요. 정말.”

신일은 머쓱한 표정을 감추려 눈을 내리 깔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학문이라지만, 그가 꿈꿔온 멋진 신세계는 아직 한 번도 그 앞에 펼쳐진 적이 없었다.

다만 신일은 전역할 즈음을 추억하며 잠시 몸서리를 쳤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무수히도 많은 밤을 고민으로 잠 못 이루던, 끔찍하도록 무료하고 신경질적으로 예민했던 고통의 나날들.

“그나저나 형, 못 본 사이에 몸이 너무 많이 불은 거 아녜요?”

“응, 안 그래도 신경 쓰여 죽겠다. 제대하고 계속 운동을 못했더니만 살만 뒤룩뒤룩 쪄가지고…. 그러고 보니 넌 저번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다? 영업 뛰기 안 힘드냐?”

“말도 마세요. 죽겠어요. 여기저기 접대할 때마다 매일같이 술만 퍼 대니, 원.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운동 시작했어요. 이렇게 가다간 몸이 완전 축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어떻게 운동할 시간은 있나 보네?”

“뭐, 요새 한창 바빠서 어디 다니기는 쉽지 않고. 그냥 러닝머신 하나 사다 놨어요. 오피스텔에서 짬짬이 뛰어 볼까 하고.”

찬장의 은수저라도 마련했다는 듯한 말투로군. 특별히 젠 척 하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건 수강의 또 다른 재능이었다.

“그래도 오피스텔에서 러닝머신이라니, 좀 그렇지 않나?”

“뭐가요?”

“아랫집에서 항의 안 해?”

“에이, 형, 제가 그 정도는 미리 다 알아봤죠.”

“뭘 알아봐?”

“우리 오피스텔 말이에요. 워낙 직업여성들이 많이 살아서 밤에 러닝머신 뛰는 걸로 뭐라 그럴 사람이 없더라고요.”

“직업여성? 직업여성이라니?”

“아, 형이 이쪽 용어에 약하시던가?”

“뭔 소리야, 인마.”

“형, 그 직업여성이라는 게 형이 생각하는 직장 다니시는 분들이 아니고요.”

“그런 분들이 아니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이요.”

“유흥업소?”

“예, 안 그래도 제가 저번에 경비 아저씨한테 담뱃값 좀 쥐어주면서 슬쩍 물어봤지. 역시, 우리 아랫집도 직업여성 분인 것 같더라고. 나중에 항의하러 오면 미안하다고 하면서 슬쩍 꼬셔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오히려 은근히 그걸 기대하고 있다고나 할까.”

역시 러닝머신까지 구입한 데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게로군. 더없이 진지한 수강의 태도에 신일은 쓴 웃음을 지었다. 기세등등한 마초 기질에 시시껄렁한 유머감각까지, 정말이지 이놈은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어쨌든 형님, 오늘은 제가 사기로 한 거니까 그리 아세요. 가시죠. 예약한 식당이 바로 근처에요.”

화사한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휘황한 네온사인에 별자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구름 사이 몸을 숨긴 달이 흐릿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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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읽고는 1970년대 쯤 배경으로 했을 줄 알았네요 ㅎㅎㅎ
뭔가 그 오래된 르와르 감성이 느껴져서 그랬나봐요 :)

ㅎㅎ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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