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essay] 머나먼 유기

in #kr-pet6 years ago (edited)


좌반구가 제거된 실험용 쥐와 전극이 꽂힌 채 머리뼈가 개방된 원숭이의 실험 결과를 찍어놓은 동영상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반려 동물의 단어 중에서 '반려'의 의미는 더욱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실험용 쥐는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조작되지 않으면, 보통 외과적 처치를 받아야할 운명이다. (제아무리 빛으로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하는 Optogenetics 라고 하더라도, 광섬유를 뇌에 박아야하거나 on-off 스위치 정도 유전자에 마련해주어야 하는 것은 똑같다.) 물론 그 두 개가 모두 일어나기도 한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어야 결과를 비교하기가 쉽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한데 붙어 있으면 분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는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혹사당하곤 한다. 작업 수행을 하거나 뇌파 같은 것을 측정할 때, 지능이 필요한 실험에서 쓰인다. 실험용 동물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화장품에서, 약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기초 실험에서 훌륭한 도구가 되어준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인간에 대해서 '반려'일까.

나는 우리가 바라보는 동물의 위치에 층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키우는 동물은 아무래도 높은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다. 길거리에 나다니는 동물들은 어떨까. 그들이 우리 눈에 뜨인다면 (그 것이 귀엽게 생겼다는 가정하에) 상당히 높은 순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나면 대체로 귀엽게 느끼겠지만 뱀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어느날 또아리를 틀며 쉭쉭 다가오는 뱀의 꿀렁 거리는 모습이 나는 참 무서웠다. 어떤 사람에게는 뱀도 귀엽겠지만, 아마 고양이나 강아지에 비하면 선호도는 많이 떨어질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세계에서 존재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동물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 실험실에서 태어나 실험실에서 죽는다. 어떤 실험쥐는 종종 A라는 유전자의 knockout mouse로 불릴 뿐이다. 이 표지가 그들의 정체성이 된다. 인간에게 주는 효용을 알기에, 이들은 희생된다. 이들의 의지 같은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인간은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이 희생되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을 데리고 실험한 연구자들 뿐이다. (그리고 불쌍한 대학원생들.)

어떤 한 녀석은 쥐를 여러마리 잡고 나면, 그날 악몽을 꾼다고 했다. 쥐들이 와서 자신을 잡아먹는 꿈이라고 했다. 동물에 영혼이 존재한다면, 꿈에라도 나타나야 마땅하다. 제작된 생명이라기에 거두어가는 것도 제작자 마음대로라면 참 서글프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숙명일 것이다.

유기가 넒은 의미의 '버려짐'이라면, 사실 모든 실험동물들은 제 쓸모를 다한 후 유기된다. 동물실험윤리위원회(IACUC) 가 존재하니 쓸데없는 고통을 동물에게 가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험 과정에서 어떠한 형태든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오로지 인간만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나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 많은 동물들을 떠올린다. 어떤 동물들은 나에게 구체적인 형상과 함께 나타나며, 또 어떤 동물들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산개한다. 인간 중심적인 시선은 우리를 합리화하는 도구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정말로 (다른 종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지구상의 괴물로 만들어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유기는 사실 우리에게 참 멀다.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못한 생명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에, 지식에, 사회에 녹아있다. 어느 존재까지를 반려동물로 받아들여야 할지, 생을 부여해야할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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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런 주제를 이야기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관심이 확대된다면, 아마도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누구나 한번쯤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아직은 동물실험이 과학적 가설의 증명을 위한 gold standard 느낌이 있습니다. 이론과 기술이 더 발전해서 애초에 동물을 배제하고 실험할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외면하고싶은 ..누군가를 위해 촛불이 되어 살다가는 아이들
생각하면 말로 표현 할수없는 마음인것 같아요..

상당히 많은 수가 태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생각하면 언제나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미안함으로 과연 다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저도 역시 자신이 없습니다.

그 불쌍한 대학원생과 대화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 손으로 쥐들에게 밥을 주고 직접 죽여야 하는 게 항상 꺼림칙하다고 하더라고요.
'반려'라는 단어는 인간의 편의, 선호, 이해 등이 충족되는 동물에게만 붙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불구로 태어나거나 실험을 겪으면서 불구가 되기도 하지요. 종착지는 결국 죽음이고요. '반려'의 단어에 대한 결을 명징하게 드러내주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선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그냥 눈 감고 있기에는 뭔가 무척 미안해진다고 할까요. 위령제에도 가끔 가곤 합니다만 그래도 헛헛한 기분은 지우기가 조금 어렵더군요.

반려동물의 범위도 우리가 규정해야겠군요. 좋은 부분을 언급해주셔서 감사해요 :)

좁은 의미의 '반려'와 넓은 의미의 '반려'를 같이 살펴보면 좀 더 유의미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

어떤 연구자나 어떤 대학원생은 실험동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주기적으로 사료도 주며 친밀감을 형성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실험동물에게 해로운 물질 등을 투여하여 실험동물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면, 분명 괴롭고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네요.

올리버색스가 온 더 무브라는 자서전에서 이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실험과학자로 일하다가 자신이 해독제를 투여해야 하는데 못 해서 키우던 닭이 애처롭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그 끔찍한 참사가 일종의 기폭제가 돼 실험과학자 되기를 포기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고통을 알아들고 그것에 감정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회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 같은데.. 실험동물에까지 존재의 층위가 확장돼 동물실험윤리가 더 엄격해지고, 궁극적으로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동감합니다. 키워냈기 때문에 스스로 거두어야하는 건 정말로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특히나 자연스레 거두는 것도 아니고 여러 실험의 끝에서의 마무리로 죽음을 부여하는 것은 참 안타깝습니다. 철저하게 도구로만 바라보아야 그나마 마음이 덜 다칠텐데, 아마 그러지는 못하리라 싶습니다.

사실 저는 굳이 우리가 인간임을 부정하고 싶지도, 인간이 결국 다른 생명체보다 더 높은 층위에 놓여있음을 거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번 그 가여운 존재들이 신경이 쓰이는 까닭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모순을 애초에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덜 모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쓰는 반려와 유기라는 개념을, 나아가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 지 저도 고민합니다.

어제 교실에 아주 작은 날파리 크기만한 벌레가 나왔는데 소리지르는 아이들을 대신해 저는 그 벌레를 잡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라고 해놓고 나는 정작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은 이 벌레를 고민 없이 죽였구나 싶더군요. 크기가 작고, 삶이 짧고, 개체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생명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텐데. 저와 같은 사고방식이라면 초월적인 존재에게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아무 일이 아닐 겁니다.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신'이라는 소설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저도 벌레들이 나올 때 종종 고민하곤 합니다. 다만 예전에는 그냥 서슴없이 잡았다면 요즘에는 종이 한장을 놓고 그 위에 벌레를 놓은 뒤 밖에 버리곤 합니다. (버린다는 표현이 참 애매한데, 제가 가까이 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이 방법 요긴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게 사라지는 생명들이 있을 겁니다. 동물들의 층위는 상당히 넓게 퍼져있는것 같아요.

저는 신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를 어여삐 여기길 바랄 뿐입니다.

생을 앗아가는 파괴력으로 치면 인간만한 종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참 정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동물을 인간 내집단의 윤리 안으로 끌어들이자고 하면, 논리적으로는 고기도 먹으면 안됩니다. 분명 어디 한쪽 극단의 논리로 따지면 '이건 아닌데' 싶지만, 그렇다고 그 타협점을 찾기도 정말 어렵습니다. 좋은 고민거리인듯 합니다.

논리적 모순을 벗어나 정합적이려면 아무래도 상당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생명의 근간과 기반을 흔들어놓는 데에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종인 것 같습니다. 먼 과거나 먼 미래에 다른 종이 등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시겠지만 당연히 이 이야기는 지구 한정입니다. )

모순을 가지고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눈감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고수하다가
인간이 진정한(?) 지구상의 괴물이 된다면
인간이 지구에서 영원히 유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SF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인간만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기술이 구현된다고하면 다른 생물들은 관상용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너무나 급진적인 생각이긴 합니다.

반려:
짝이 되는 동무

유기:
1.내다 버림.
2.어떤 사람이 종래의 보호를 거부하여, 그를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 두는 일

문득 앞의 두 단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반려라는 말이 사람이 아닌 동물에 사용될 때 그 의미의 확장을 어디까지 둬야할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못찾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유기를 2번의 뜻으로 생각하면 실험실의 동물 뿐만 아니라 먹기위해 기르는 모든 동물에게도 유기라는 말을 써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도된 유기를 살기위해 자행하게 되는 인간 존재 자체의 모순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반려'와 '유기'의 적확한 의미는 어쩌면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다만 나 스스로 그 단어들의 의미(혹은 범위, 영역)는 어느정도 정해봄이 필요하리라 생각듭니다. 그에 의해 삶의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단어들의 한정적 의미를 고려하면 우리는 우리 중심의 가장 편한 의미를 취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물들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계층과 서열이 존재하고 낮은 서열보다 높은 서열이 우선한다는 정도의 원칙만 세워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확장하다보면 결국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저는 가급적이면 그러한모순을 끌어안기를 권하는 편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균형점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각자가 가지는 균형점을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일 수는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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