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10.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길

in #kr-pen6 years ago (edited)

"어쩜 그렇게 남편이랑 잘 지내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듣는 말이다.

그게 문제였다. 우리가 실제로 잘 지내도, 잘 지내지 않아도, 남들 눈엔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래서일까? 당사자인 나조차도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친정에 우환이 생겼다. 날마다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 게다가 그 일은 힘들었던 옛 기억을 줄줄이 꺼내버렸다. 나는 그 일을 잊기 위해 틈만 나면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이라 묵묵히 듣기를 반복하던 중, 한 친구가 얘기를 꺼냈다.
"형은 알아?"
"…"
그 형은 남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게. 그는 알까?'

나라고 처음부터 친구들에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는 항상 지친 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선 함께 TV나 볼 뿐, 대화 다운 대화는 없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너무 힘들었던 터라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는 역시 피곤하다며 잠들었다. '과연 내가 사라지면 날 찾긴 할까?' 하는 생각에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혼자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도 가고자 하는 방향도 없이 녹색 불이 켜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즈음이었다. 차가웠던 밤 공기에, 이어폰을 통해 들려온 바람 소리와 섞인 음악에 내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혹여나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슬슬 걱정 됐던 남편은 여전히 침대에서 잘 자고 있었다. 내가 우스워졌다.

"심리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때?"
상담이라는 단어에 정신과 상담이 떠올라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도 눈치챘는지 단순한 심리 상담일 뿐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단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보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던 나는 이제 이들도 내 이야기에 지친 걸까 하는 생각에 상담 센터를 찾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보세요."
친구들에게 반복해서 얘기한 덕분일까? 내 이야기가 마치 남의 이야기인 양, 아무런 감정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다만 상담 선생님이 눈물을 보일 뿐이었다. MBTI를 포함한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힘들었던 당시의 감정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화가 나진 않았나요? 슬펐나요?"
하지만 나는 내 기억을 그렇게 가벼운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예전 기억은 어차피 지난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던 그 우환 속에서 나는 왜 우울해졌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도넛 같은 내 인간 관계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기대지 못한 채 친구들에게 의존하는, 중간이 텅 비어버린 그 도넛. 상담사는 나에게 남편과의 대화를 요구했다. 잠을 자서 깨울 수가 없다고 얘기했더니 엉덩이를 발로 차서라도 깨우라고 얘기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문제는 엉뚱하게 해결 되었다. 회사 일로 힘들어하던 남편에게 상담을 권유했더니 남편도 상담 센터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아니면 센터에서 의도한 것인지 같은 상담사가 배정되었다. 상담사는 남편에게 나와 얘기를 해보라고 권했다. 남편이 꺼내야 할 말은 정말 간단한 단 한 문장이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처음에는 집에서 시도해 봤지만, 어느새 남편의 눈은 TV를 향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남편을 끌고 동네 술집으로 향했다. 물론 TV가 보이는 쪽은 내 자리였다. 그렇게 한 달간 매일같이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사귄 지 10년 만에 다시 친해졌다.

예전엔 사랑하는 마음은 도파민이 끝나면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정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인 곡선과 같다. 음의 값을 지녔더라도 계기가 있다면 다시 양의 값으로 올라올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양의 값이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오늘 하루 어땠어?" 참 마법 같은 문장이다.

물론 이 글을 상담 선생님이 읽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행복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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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님이 김작가님 글 댓글에, 한번 글쓰기버튼을 누르면 지울 수 없는거라 망설였다는 말씀을 보면서 어떤 내용을 올리셨는지 궁금했어요.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더니 완전 기절을 하는 바람에 이제야 와서 보게되었어요.
그리고는 알게되었죠, 써니님이 술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

그렇게 부부가 적당히 술을 즐기며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인것 같아요. 상담으로도 술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분들을 정말 많이 보았고, 기본적으로 두 분이 깊이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오늘 하루 어땟어?"라는 마법같은 대화를 평생 잘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D

아니 팅키🧚‍♀️님 마저 이 포스팅을 기승전'술'로 보실 줄이야. 그래도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상담사 선생님이 둘 테스트 결과를 비교하며(상담은 언제나 따로 받았습니다.) 신경도 많이 써주셨는데 저희 상담이 끝날 즈음 쉬고 싶다며 그만 두셔서 이후엔 연락도 못 드렸거든요. 그리고 집 주위에 새벽까지 영업하던 맛집이 많았던 것도 한 몫 했구요. 😆

생각해 보면 처음엔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가 우울했는데 오히려 저에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어요.

ㅋㅋㅋ여행마다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으시길래, 부부가 같이 술을 좋아하시는것 같다고 생각했고, 적당히 즐기시는것 같아서 보기가 좋았거든요 ^^
전화위복으로 우울함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고 오래오래 행복하실것 같아요!

ㅎㅎ 사실은 제가 10배 좋아하고 적당히 즐기는 건 남편 이야기입니다. 고마워요 팅키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써니님 공대 여신답게 화끈하시네요 ㅎㅎ 멋져요!!

감사하긴요~ 행복해지셨으면 됐지요.(상담사)

이 글을 읽고나니 술을 버리라곤 못하겠네요.
그래도 건강 생각한다면 술을 조금 좀 멀리 하시죠???
그러다가 정말 사진 못찍을수도 있는데...

상담사님 대신 대답할 줄이야..
술을 조금 줄이긴 하려고 마음은 먹고 있는데 밤이 되면 맛난 음식에 와인 먹을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요. 도수가 낮은 맥주로 바꿔야 하나..

밤되면 그냥자요..
잠을 자면 스멀스멀도 없어져요 ㅋㅋ

가장 친한 친구가 이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입니다:-)

며칠 후에 소개해드릴께요 😆

멀요? 가장친한 술을 소개 시켜준다는거죠?

들켰나요 😐 술을 매개로 남편과 친구가 된건지 남편을 매개로 술과 친구가 된건지

멀 또 새삼스럽게 들킨것처럼..

술 과 리순이님은 친구
남편 은 리순이님 머슴.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두 친구 모두 소개받겠습니다

부럽습니다....

일단 제가 킵해 놓은 삼시세끼 다 드시고 푹 쉬시고 리얼순이님에게 사진도 배우시고 ^^*

두 분이 친해진 과정에 술의 활약이 있었네요. 뜬금없지만 두 분이서 무슨 술을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생각지도 못한 질문입니다. 정말 매일 마셨기 때문에 이자까야랑 횟집, 고기집, 족발집, 튀김집을 번갈아 다녔습니다. 그래도 역시 첫 발을 내딛고 가장 자주 갔던 곳은, 집 근처 이자까야였어요. 술은 차가운 월계관 준마이 750이요 😆

그렇군요 ㅎㅎ 저도 혹 애인과 문제가 생기면 그 술을 가운데 놓고 시도해보겠습니다 ㅎ

네!
댓글들을 보니 왠지 이번 글도 기승전'술'인듯..

저에게 정말 좋은 글 같아요 ... 저는 연애에서도 중요한게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ㅠㅠ 예전에도 ... 오늘 하루 어땠어? 라는 말에 똑같지뭐 라는 말을 듣고선 아 ...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행복하시다니 저도 맘이 좋아요 : ) 저도 행복해지겠습니다 !

대화의 필요성을 한 사람만 인식해서는 안되더라구요.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상대방이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니 "똑같지 뭐."라는 답변이 오는 것 같아요. 그럼 어제는 어땠냐고 묻고 싶지만 그러면 싸울 것 같은 ㅎ

제가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데는 상담 선생님의 역할이 컸어요. 객관적 입장의 제 3자가 하는 말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나봐요.

우선 메모부터 해놓고 있습니다. "월계관 준마이 750"

진짜순이님이 아무리 부군에게 대화하자고 했어도 부군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그대로 갔을 것 같다는 것이 높이 예상됩니다. 제 3자, 그것도 상담사, 게다가 같은 상담사... 이렇게 3박자로 인해 부군이 객관적으로 경청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물론 두 분이 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대화를 많이 하려는 서로의 노력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라고 봐요.

정말 심각한 것이... 나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데 상대방이 인지를 못하거나 몇 번이나 진지하게 얘기했는데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것이 반복된다면 관계에 있어서 심각함을 초래함을 저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어서 이 글을 내 일 같이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의 대화를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 요새는 저의 하루에 뭐 별 다른 일이 있겠냐 싶지만서도 "오늘 하루는 어땠어?" 라는 질문이 고맙더라구요. 게다가 예전과 달리 남편도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꺼내게 되어 서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ㅎㅎㅎ 시차 때문에 질문이 어울리지 않겠네요. ㅎㅎㅎ

ㅎㅎ 심지어 어제네요. 어제 친구 데리고 루브르 갔다가 남북회담 결과 보면서 옥류관에 냉면 먹으러 다녀왔어요. ㅋㅋ 근데 이 질문을 하실 줄이야!!!!!! 아주 복습 능력이 뛰어나시군요.

뭐든 노력이 필요한가 봅니다.
불지른 애정전선이 영원하시기를...활활...^^

감사합니다. 🔥🔥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짐이 될까 얘기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순간, 당장은 괜찮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 지더라구요. 저도 비슷한 일을 겪어서 글이 더 와닿아요.
그래도, 힘들어 하는거 뻔히 아는데 제 고민을 얘기 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맞아요. 게다가 한번 얘기 하지 않으면 그간의 일을 다 설명해야해서 시작하기 쉽지도 않구요.
그래도 저를 이해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인 편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로멘틱한 기승전 술의 포스팅 잘읽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선 역시 함께하는 술한잔이로군요 ㅎㅎ

카페로망님은 이미 잘 실천하고 계신 것 잘 압니다.

암요 그렇다 마다요 ㅎㅎ

가만 있는 것 보다 머라도 실천을 하니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랑도 깊어지고 삶의 행복도 느끼는 것 같네요. 이제는 전부 오픈하고 살아가세요.

담담하게 잘 읽고 갑니다. 일기를 하나 같이 다들 잘 쓰시네요.

감사합니다. 요즘은 타국에 둘만 나와서 사니까 서로 의존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어요. 그런 점은 참 좋네요. :)

쉬워보이는 것이 때로는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다시 실감이 나네요. '결혼은, 미친짓이다' 다시 안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ㅎㅎㅎ

네 지금으로썬 잘 한 일 같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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