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는 밤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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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사 하 는 밤





 우르슬라는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감춘다. 장님이라고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사람들의 소리로 거리감을 측정하고, 냄새로 사물을 인지하는 방법을 터득한 후에야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르슬라는 완전히 장님이 된 후에도 네 가지의 감각으로 가족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날마다 같은 길만 돌아다니고, 같은 행동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가족들이 날마다 반복하는 패턴에서 벗어날 때만 물건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도 발견한다.

 하루는 며느리인 페르난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소란을 피운다. 페르난다는 날마다 자기가 지나다니는 곳만 열심히 찾아본다. 그러나 그날 페르난다에게 다른 날과 달랐던 사건이 있었는데 침대에서 빈대가 나와서 매트리스를 햇볕에 말린 일이었다. 우르슬라는 그 빈대 소동 때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반지를 빼서 두었으리라는 결론을 얻고 침대 옆 높은 선반을 지목한다. 선반 위에는 정확히 페르난다의 반지가 있었다.





 오늘 저녁에 [백년 동안의 고독] 중, 이 대목을 필사했다. 우르슬라의 관찰을 통해 내가 얼마나 반복된 패턴으로 장소와 시간과 사건과 사람을 대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늙으면 나이를 핑계삼아 관찰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배려를 하기보다는 배려 받기를 원한다. 반복되는 패턴이 만든 고정된 분석틀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하면 분석틀도 변주되어야 한다. 우르슬라는 자신이 퇴물이 될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눈이 멀 조짐이 보일 때, 네 가지 감각을 새롭게 개발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녀는 시력이라는 분석틀을 과감하게 버리는 동시에 노화까지도 극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타인을 배려하는 입장에 선다. 우르슬라야말로 '전사'의 호칭에 걸맞는 사람이 아닐까.

 새벽에는 하우스메이트 미쉘양의 어머니와 식사를 같이 했다. 미쉘양의 어머니는 울산에 사는데, 두 달에 한 번 계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주무신다. 나와 미쉘양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거실에서 창밖을 구경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나를 안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존댓말을 한다.

어머나 **씨, 여기가 서향인데 빛이 이렇게 거실까지 밝게 들어오네요. 모르는 사람은 동향인 줄 알겠어요. 저기 저쪽 건물 유리에 반사된 빛이 이까지 오는 거예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순이 넘은 그녀가 우리 거실이 어떻게 서향인 줄 알았을까.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거실이 환한 이유가 맞은편 주상복합 건물의 유리창때문이란 걸 알아낸 것도 신기했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고 내 의견을 물어본 것도 놀라웠다.



 처음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을 때, 미쉘양이 우르슬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걱정을 조금 덜한다는 것뿐, 미쉘양은 우르슬라처럼 항상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미쉘양과 같이 가게를 할 때, 9개의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의 말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각각의 요구에 재빨리 대처를 하는 그녀가 신기하기만 했다. 미쉘양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늘 왜 그런지 호기심을 가진다. 아인슈타인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간단한 몇 가지 가설을 말한 후,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곤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릴 때부터 미쉘양의 어머니가 미쉘양에게 모든 집안일에 대해 -심지어 돈 문제까지- 마치 어른을 대하듯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질문에 대답하려면 관찰에서 비롯된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해야 한다. 아마 미쉘양이 가지고 있는 관찰의 미덕과 화술은 어머니에게서 왔으리라.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미쉘양과 어머니를 보면서 우르슬라1, 그리고 우르슬라2라고 마음속으로 번호를 매겼다. 물론 미쉘양은 레메디오스처럼 아름답지만, 레메디오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의 레메디오스들은 아기를 낳다가 죽거나 하늘로 승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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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엄마가 그런 걸 물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엄마처럼 무심한 사람도 드물 거에요 ㅠ.ㅠ

그렇다면 르캉님의 섬세한 관찰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가계도 숙지하는 거 포기하고 그냥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한 번 읽어서는 머릿속에 새겨지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정도. 저는 그랬습니다. ㅎㅎ 필사하는 밤. 글 잘 읽었습니다. :-)

페르스펙토르님 저도 처음에 이 책 읽을 때 그랬어요.
이름이 헷갈리고 늘 반복되니까요^^ 필사하니까 이름을 다 외우게 되네요.

애정이 담뿍 느껴져요. 저도 우르슬라를 제일 좋아했어요:) 책이 읽고 싶어지는 글이에요 정말요.

부리코님도 우르슬라를 좋아했군요^^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책읽는 것이 참 힘들어요.

우르슬라는 인어공주에 나오는 문어밖에 몰랐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읽었어요..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우르슬라와 그 실현인 미쉘양과 그 어머니는 참 현명한 사람이네요. 관찰과 배려의 힘을 아는 사람, 참 매력적입니다 :)

인어공주에도 우르슬라가 나오는군요! 저도 몰랐는데 전혀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니예요:)

귀중한 물건을 평상시 보다 다른곳에 잘 보관했을때나중에 못찾아 헤메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원리를
알것 같아요^^

앞으로 물건 잃어버리면 금방 찾을 수 있겠죠?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보다 뛰어난 통찰력과 삶의 경험으로 더 많은 것을 보는 우르슬라씨네요. 연륜이 가능하게 해준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아직 못본 책이라 단편적인 감상만 가능하네요ㅠ)

낭만님 나이와 연륜이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도 철이 없는 절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답니다. 저도 우르슬라처럼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호호 고고참. 요정이 한분 더계시군요. 위빳사나요정

또 소개해주실 요정은 없나요?:)

미쉘은 확실히 요정이죠^^
전 가끔 그녀를 부엌의 수호자, 아스팔트의 여신, 백화점의 요정이라고 부른답니다!

어제까지 저도 공모전 글들 다 읽었거든요. 그리고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글빨 날리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저는 제글만 쓰려고 했지 주위를 보지도 못했던거 같습니다. 쓸데없는 명성도 보상 목매임. ㅋㅋ. 사람은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인거 같습니다.

말하기전에 먼저 들어라. 그리고 요기에 더하여 쓰기전에 먼저 봐라.

ps. 뿔달린 요정님 이렇게 되다가 진짜 요정계 치고 나와서 작가요정으로 등단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국구 요정화 시켜주세요. 추카드립니다.

피터님 감사합니다:) 저도 스티밋에서 새로운 분들 많이 알게되어서 신나네요. 기분 좋게 지내다보면 명성도와 보상도 저절로 따라올거예요^^

저는 이제 똑같은 제 하루의 동선이 편안해서 탐험이나 모험에 대한 젊은 취향을 잃고 말았어요 어쩌면 깊은 우울의 집에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지만 다른 가동력에 대해서 섣부른 준비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관찰은 사라지지 않는 오감에 대해 상기시켜줘요 오늘 저는 또 여기서 말없이 다른 방들을 들락거릴 것 같아요

관찰을 한다는 것이, 미지의 세계로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요. 전 세상에서 제일 젊은 사람은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이 글이 공모전에 나와 있는 걸 보았어요
단박에 틀림없어 1등감이야 했어요
진심이예요
물론 다른 글들은 겨우 2개쯤밖에 못 읽어 봤지만요

주제가 일기였으니까
일기에 가장 가깝고 글도 자연스럽게 쓰여졌고 게다가 사랑스럽고 다정하기까지 해요

아직 심사에 들어가기 전일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인데 응모조건의 글자수에서 좀 걸리는 것 같지만요
1,000~2000자로 되어 있더라구요
저두 확인 못 해 글이 너무 길어요

그리고 있잖아요
남의 글 심사만 하다가 심사 당하는 입장이 되고보니 떨어져서 공연히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예요ㅎㅎ

승화님 칭찬이 공모전 1등보다 더 기분 좋게 느껴져요^^
저는 글을 통 안쓰고 있다가 3년 전에 난생 처음으로 장편소설에 응모했다가 떨어졌답니다. 앞으로 60살 될 때까지 용기를 내어 매년 도전해 보려고 해요!
스티밋이란 공간도 그렇고, 일기공모전은 재미있는 놀이같아서 부담이 없어요. 승화님도 마음 놓고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ㅎㅎ

글자수 신경을 안썼는데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가지 고백을 하자면요
스팀잇 하면서 유일한 제 팬이셔요
진짜루

아직도 일상의 변화가 힘듭니다.
만약 지금 하는 일을 그만 두고 매일 같은 패턴이 아닌 다른 패턴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한 번 하게 만드네요.

일기 투어 중에 들렸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일기 투어 저도 다니고 있는데 반갑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생활패턴을 바꿔보는 것도 텔로미어 길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항상 현명한 어머님들 뒤에는 현명한 자녀들이 있더군요 ^^ 저는 그런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되고 있을까? 이런 생각 자주 해 보게 됩니다.

9개의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의 말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각각의 요구에 재빨리 대처를 하는 그녀

미쉘님은 저 역시 신기하기만 하네요 ^^

띵키님은 이미 훌륭한 부모예요^^
저도 아이가 있다면 매일 질문할 것 같아요.
넌 어떻게 생각해?, 라구요.

사실 저는 좀 중요한 결정을 할때 많이 망설이는 편이에요. 우유부단하다고 느낄 만큼요. ㅠㅠ

그래서 딸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면 하고 아기때부터 늘 생각을 묻고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했었는데, 어느정도까지는 스스로 야무지게 결정도 잘하더니, 자랄수록 저의 우유부단함을 닮아가는거 같아 걱정이 되면서 과연 내가 좋은 부모노릇을 하고 있는건지 혼란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ㅎㅎ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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