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17) - 5편 현재는 과거다

in #kr-pen6 years ago (edited)

번데기 사진은 그것이 나중에 나비로 변신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버크민스터 풀러



현재는 과거다




 차가 시애틀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졌다. 우비와 장화를 챙겨와서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나중에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진창에 빠져 흙탕물 범벅이 될 줄 미리 알았다면 아마 훈련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행 중 대만 여자분과 캐나다 남자분이 있었는데 그들의 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나중에 그들에게 들은 바로는, 우리를 옘까지 태워다 준 미국할머니는 사람의 에너지장-오라장이라고도 한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유체이탈을 밥 먹듯 하고 다른 차원을 여행하며 트럼프 카드의 뒷면만을 보면서 54개의 앞면을 다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한 시간 반을 달리던 차는 대형마트 앞에 섰다. 우리가 신선식품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나는 유기농 사과 한 바구니와 바나나 한 송이, 크로와상과 호밀빵을 버터와 함께 카트에 담았다. 이렇게 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옘을 떠날 때 햇반을 너무나 신기해하는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남은 햇반을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의 와인 세레모니를 위해 와인도 한 병 샀다.



IMG_0794.JPG




 이 사진은 옘을 떠날 때, 사진촬영이 허용되었던 주차장에서 찍은 컷이다. 나는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곱게 차려 입고 도착했지만 그곳을 떠날 때는 정수리에 까치집을 지은 거지꼴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몰골에 축복을 내려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훈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적어두었던 단상을 올리는 것으로 내 여행기의 끝을 마무리 하겠다.



ㅣ단상들ㅣ

 매일 숲을 걸었다. 꽃들은 도착하고 구름은 비를 뿌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푸른 이끼가 벨벳처럼 깔려있는 숲에서 문장 하나만 보고 걸었다. 그 문장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고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관찰하면 현실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현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면 다시 과거의 쳇바퀴에 갖히게 된다.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절하게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결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판단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시각화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시각화는 반복하면 할수록 강력해지면서 쉬워졌다.



 빗속에서 안대를 하고 활을 쏘았다. 바람이 시시각각 다른 방향에서 불어왔다. 화살이 과녁에 맞는 것을 상상한 후 활시위를 당기면 과녁을 맞출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여기에선 기적이 일상이다. 성냥개비처럼 작고 마른 할머니는 정확히 과녁 한 가운데를 맞췄다. 할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이 놀이를 하셨다고 했다.



 빛 한 줌 없는 미로를 헤맸다. 안대를 하고도 청테이프로 눈주위를 단단하게 봉합한 천 명의 사람들은 여섯 시간 동안 배고픔을 참으며 void근원을 포커스했다. 비가 끊임없이 내렸고 손이 시려웠다. 오리털 점퍼 위에 우비를 입었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추위가 엄습했고 오감에 의지해 방향을 가늠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그 욕구를 따르면 '출구가 어디에 있을까', 추측을 하게 되고 거리를 계산하고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러면 헤매게 되고 수없이 발을 밟히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입냄새를 맡아야 했다.

 "You are in the past."
 "넌 과거에 있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void 근원에 포커스하면 된다. 오감으로 판단하면 진창에 빠졌고 포커스하면 미로의 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이 훈련을 이틀에 걸쳐 두 번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처음 하는 말로 그 하루를 경험했다. 그곳에는 나이가 없었다.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갓 피어난 꽃처럼 사랑받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사랑 그 자체였으므로.







 열흘은 훌쩍 흘렀다. 마지막 날은 나를 옘으로 불렀던 스승님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내가 쳇바퀴를 돌리거나 진창에 빠질 때마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당신은 죽음을 배웠지만 삶은 잊었다." 라고. 그의 눈빛은 첫 자각몽때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존재의 눈빛과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빛을 볼 수는 있으나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람타이다.






여행기(2017)


1편 용기가 나를 본다
2편 스며드는 모든 것들
3편 페르시안 실링밑에서
4편 도착하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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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아주 재밌네요. ㅎ

양목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보얀님의 프로필 사진의 두뿔달린 요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현재는 과거다
You are in the past

그 문장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위 두 표현인가요?

두 표현이 간화선의 '話頭' 같네요. 판단도 중지하고 덧붙이지지도 않고 오직 말머리 언어가 끝난자리(Void/근원)를 숲속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놀이처럼 체험한다는 것이 흥미롭고 아주 즐겁습니다.

정수리에 까치집을 지은 거지꼴

이거 상상하니 빵 터집니다.

"넌 과거에 있어" 이건 내 근원의 잔소리입니다. 오감으로 인식하는 현재가 사실 과거라는 걸 지식으로 알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현존하지 못하는 날 꾸짖는 거죠.
마음 속에서 나온 문장은 매일 달라집니다. 미래의 내가 경험할 새로운 걸로 요청하면 됩니다:)

보얀님 글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간접체험하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고, 얼마나 강렬한 영감을 주는 지! 진짜 짜릿해요. 보얀님의 이 여행기가 끝날 때까지 일단 기다리기로 합니다. :-)

라운디라운드님 이번이 마지막편이예요:)
저도 글을 쓰면서 다시 옘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어요. 숲에는 요정이 산다고 몇 십년씩 수행한 할머니들이 그랬는데 한 번 보고싶거든요.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보얀님이 글에 이미 마지막 이야기라고 쓰셨는데, 글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는 아쉽고, 궁금한 마음이 커서 저도 모르게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나 봐요. 보얀님의 루시드드림, 화이트북, 람타. 연결고리를 찾았어요.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으셨군요! 전 앞으로도 이 여정을 계속하려고 해요.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전 라운디라운드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보얀님의 글은 늘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제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랄까 ㅎㅎ 다음 포스팅도 기대할께요^^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요:)

유체이탈이 정말 가능한건지도 궁금하네요
모든것이 신비로워요^^

유체이탈은 가능해요.
일반 사람들은 유체이탈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체이탈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해요:)

진짜 가능하다는 말조차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을 못해요
모든것이 경지에 올라가야 가능할것 같아요
혹시 보신적은 있으신가요?

전 딱 한 번 유체이탈을 경험했습니다^^ 같이 입문한 친구들 중 몇몇은 유체이탈을 몇 번 했고 그 상태에서 자기 몸을 보는 건 물론이고 다른 장소까지 이동도 하더군요:)

아 ~ !! 그러실줄 알았어요
정말 많은 공부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제가 운이 너무 좋아요 훌룡하신 분을 만나고요
고맙습니다 ^^

어떤 훈련이었는지 단상을 통해 읽는 것만으로도 궁금하네요...
근원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흠

근원을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양자물리학에선 관찰자, 불교에선 부처, 힌두교에선 브라만이라고 부른답니다. 혹시 훈련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화이트북, 람타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뭔가 소설속의 장면같은 느낌이 들어요. 일반적으로는 흔하게 할 수 없는 경험일 것 같은데, 뭔가 비워내고 마주하는 경험일 것 같아보여요 :)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비워내는 것은 사회의식과 내 과거의 감정이고, 마주하는 것은 시간이 없는 곳에 존재하는 참나예요^^

오늘도 호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치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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