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17) - 4편 도착하는 질문들

in #kr-pe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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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mptown coffee, Apr. 2017

계속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냐, 춤을 출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나는 네가 춤을 추었으면 좋겠어.
-Lee Ann Womack






도착하는 질문들





 스텀타운으로 가는 길은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커피가게를 할 때 단골손님이 스텀타운에서 공수해준 [헤어벤더]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 마셨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크림같은 목넘김에 달콤한 꽃잎 맛이 나던 커피.


 구글 지도를 보면서 잠시 검색하는 사이에 길 가던 동네 주민들이 한 블록마다 나타나 "도와줄까?"라고 물어왔다. 목소리는 명랑하고 눈빛은 사려깊었다. 집집마다 화단에 꽃과 풀들을 심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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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ttle, Apr. 2017


 게이 프렌들리한 시애틀은 무지개가 땅에도 있고 쇼윈도에도 있다.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스텀타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매장이 북적거렸다. 날씨가 추워서 따뜻한 라떼를 시키고 '노숙'을 위해 잘생긴 보온병을 구입했다. 매장의 좌석은 자리가 없어서 한쪽 바 구석에 서서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에 죽지 않고, 풀바디에 설탕 한 톨도 넣지 않았는데 달았다.
 빗방울이 다시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촉촉한 날씨는 누군가로 하여금 맛있는 커피를 욕망하도록 만들고, 그가 만든 커피를 마신 사람은 커피잔 속에서 신의 얼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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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mptown coffee, Ap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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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mptown coffee, Apr. 2017




 순간 나는 나를 보았다. 설겆이 거리가 씽크대에 산처럼 쌓여 있고, 건너뛰었던 점심과 저녁을 허겁지겁 몰아서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나는 그 때 나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이 쳇바퀴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넌 반드시 빠져나올 거야.
네가 날 보고, 내가 널 보고 있어.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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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rose market, Ap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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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rose market, Apr. 2017


 늦은 아침을 먹기로 한 곳은 멜로즈 마켓이었다. 레스토랑 몇 개와 문구점, 꽃집과 정육점이 모여있는 곳인데 평일이기도 하고, 아직 점심시간이 아니어서 한산했다. 여기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사진 찍을 생각을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시애틀에서 일 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 정도로.




 멜로즈 마켓을 나와 몇 블록 떨어진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로 이동하는 사이에 하늘이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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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ucks Reserve, Apr. 2017



 매장 안에서 잠시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대형 프로밧에서 볶여진 커피가 구리빛 트랜스퍼 튜브를 통해 날아가는 소리와 커피향기에 압도되었기때문이다. 여기는 커피의 천국인가. 챠르르르. 챠르르르. 커피콩들이 춤추는 소리를 들으며 예쁨이 발사되던 커피잔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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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ucks Reserve, Ap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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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ucks Reserve, Apr. 2017





 이렇게 해서 시애틀에서의 일정은 끝냈다. 여기에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시애틀에서 2박을 하기로 계획했는데, 사실은 1박을 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비행기 체크인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미국여행이 처음이었고 무비자인줄 알고 있었다- 이스타비자 발급 승인이 안떨어지는 바람에 공항에서 3시간 발을 동동 구르다가 비행기표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겨우 비자 승인이 떨어졌고 그 다음날 비행기표를 새로 끊었다.
 솔직하게 공중에 날려버린 비행기표값과 숙박비가 아까웠다.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길은 험난하다" 라는 주문을 나 자신에게 건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 것은 이틀에 걸쳐 방문해야 할 곳을 하루만에 다 해치우는 신공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통해 시간을 대하는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여행기(2017)


1편 용기가 나를 본다
2편 스며드는 모든 것들
3편 페르시안 실링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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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미소짓고요

예쁜 미소 잘 도착했습니다:)

글도 사진도 너무 맘에 드네요. 즐거운 여행이 되셨나요?

네 ^^ 벌써 일년이나 지났네요.

보얀님 스텀타운커피로 시작하다니 완전 통했잖아요ㅋㅋ 저 요새 시에틀이 무척 가보고 싶던데 어쩜..!!

저도 경아님 포스팅 보고 깜짝 놀랬어요^^
요즘 케미가 정말 잘 맞는 거 같죠!

저는 커피 맛이 향을 도저히 못따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얀님의 글을 읽으면 음...

커피로 茶道하는 기분이랄까?

여백의 정제된 글맛
커피향의 베어듬
이국적인 풍경

모두버무려져서 순간이동됩니다.

ps. 스타벅스보다 커피빈을 더 조아라하는데 오늘은 부러 나가서 스타벅스 커피시켜놓고 님의 글을 다시 음미해보면서 저도 뽀얀 과거 명상 동참합니다.^^

순간이동 연습해야되는데 요즘 스티밋에 푹 빠져서 자각몽이 뜸해지네요^^

땅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도시.. 저 장면 하나가 시애틀을 압축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시애틀 참 멋진 도시예요:)

-_-; 아~ 비행기표랑 안타깝네요. 많이 놀래셨겠어요~

그 때는 정말 당황했었어요 ^^
시애틀에 도착하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렸지만요.

(╹◡╹)네~ 여행에 좌충우돌이 있어야 기억에 남죠... 전 프랑스 니스에 갔다가 철도직원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리옹까지 가는 기차가 끊겨서 맘졸이다가 차를 랜트해서 운전하고 갔던 기억이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차를 랜트해서 운전하리라곤 생각도 안했지만 추억이 되더라고요. ㅎ

우와 렌트해서 운전하실 생각을 했다니 대처를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전 당황하면 그냥 멍해지는 스타일이라 행동이 빠른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요:)

^_^ 역앞에 렌트카라는 글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ㅎ 리옹호텔 예약취소와 다시 여기에서 호텔 예약하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정이 막막하더라고요. 정말 운좋게 미국면허증으로 운전이 가능했고 차도 리옹에서 리턴할 수 있었습니다. 보얀님도 대처 잘하신거에요. 원래 넘어지면서 배워야 자전거도 빨리 탈수 있는것 같아요.

넌 반드시 빠져나갈꺼야
네가 날보고 내가 널보고있어
지금 이순간 이글을 좋아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변신하고 싶습니다 ^^

옐로캣님의 변신 환영합니다! :)

기대했던 포스팅이군요!! 차르르르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저도 커피잔 속에서 신을 만나고 싶어요!!!

낭만님이 그러길 원하신다면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글솜씨가 엄청난 내공을 느껴지게 하네요.
커피의 향과 맛이 느껴지는 듯해요.

감사합니다:) 시애틀에 맛있는 커피집이 많아서 정말 행복했답니다.

이스타 때문에 고생을 하셨군요. 그만큼 더 찬찬히 밀도있게 돌아보신 것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커피와 날씨의 조합이 기가 막히게 좋아 보입니다. 역시 공간을 마시는 느낌일까요.

그 때의 헤프닝 때문에 시애틀에 대해 더 애틋한 감정이 들어요. 하루라는 시간을 처음으로 온전히 느껴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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