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 일기숙제

in #kr-pen6 years ago (edited)

@kimthewriter 님의 이벤트, 제 1회 PEN클럽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작성하는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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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벼락치기 일기숙제

스티밋을 일기장으로 쓰고 있다. 나 혼자 쓰고 덮어놓는 일기장이 아니기에 가끔 MSG를 좀 쳐서 과장하기도 하고, 영구박제가 된다기에 주변인이나 지역 등 특정정보는 조금 수정하기도 한다. 천하제일 일기쓰기 대회가 열렸기에 언제부턴가 계속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었으나 내가 하는 일이 늘상 그렇듯, 해야할 일을 앞두고는 그 일 외에 모든일이 재미있다. 그래서 우선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유튜브 채널에서 음악도 듣고 UFO, 관상, 대마도 여행에 대한 검색도 했다. 아이와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는다. 시계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이게 뭐라고. 마감시간이 코 앞이라 아이를 재우려고 긴급조치에 들어간다.


아이가 잠들질 않는다. 그림자놀이가 끝나도 덥다는 핑계로 자꾸 짜증을 부릴 뿐, 잠에 들질 않는다. 네가 잠들어야 내가 글짓기 숙제를 한단 말이다. 눈을 감고 무슨 내용을 쓸지 생각만 해 본다. 수많은 주제들이 머릿속을 떠다니지만 1,500자를 쓸 깜은 아니다. 그래서 어릴 때 방학숙제를 쉽게 하게 하던 필살기인 존댓말로 쓰기나 이중부정으로 서술하기, 대명사 안 쓰기, 심형래 말투 활용하기 등의 기술을 미리 연습한다. 종합하여 시전하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daegu는 그러나, 잠이 들 수도 없고 잠이 들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급한 상황에서 잘까, 말까, 아니 차라리 잠을 자지도 말고 안 자지도 말고 그냥 깨있을까 등의 잡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는 않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나저나 아이가 잠들질 않는다. 갑자기 로비 윌리암스의 뮤직비디오, supreme에 등장하였던 똥 누다가 화장실에 갖혀 경기에 참가하지 못한 F1레이싱 우승후보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아이가 잠이 들었다. 컴퓨터 방에 가니 컴퓨터가 켜져있다. 마우스를 휘적휘적 하며 모니터를 깨워보니 집사람이 아까 작업하던 내용이 그대로 펼쳐져있다. 아까전에 회사일로 뭔가를 작성한다더니 창을 20여개나 열어놨다. 평소에 저장하지 않고 작업하는 성격을 알기에 나중에 잔소리하려고 일부러 그대로 놔두고 다시 거실로 나온다. 안그래도 오늘 낮에 작성하던 내용을 모두 날렸다기에 ‘보나마나 저장도 안하고 그대로 메일 첨부파일 열어서 작업하고 있었겠지뭐’라고 답하니 고개를 끄덕였던 게 생각난다. 예전에도 시지프스처럼 같은 작업을 두어번씩 했던 걸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시지프스나 다이달로스는 뭐 쓸만한거라도 훔쳐왔지, 그녀는 뭘 챙겨왔길래 저런 끊임없는 벌을 받을까. 아, 내 마음? 되도 안한 생각을 한 대가로 내 스스로 뺨을 치며 주방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웹툰을 보며 키득거리다가 시계를 본다. 아차, 숙제.


윗 문단을 살짝 손 본 뒤에 분량을 확인했더니 공백 포함 1415자다. 흐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면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찾는다. 노트북에는 한번도 연결해본적이 없기에 설정에 들어가서 2분가량을 헤매다가 성공한 뒤 유튜브로 노래를 튼다. 등려군-월량대표아적심, 임현정-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동물원-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가 목록의 앞부분에 보인다. 모델명이 LG-PH3인 이 스피커는 결혼하고 혼수로 가전을 장만하고 생긴 자투리 포인트를 이용하여, 아이가 태어난 뒤에 산 것이다. 아마 결혼식을 준비와 관련지을 수 있는 물건 중엔 마지막에 구매한 물건이 아닐까 싶다.


쓸데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수시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한다. 노트북은 집사람과 연애하면서 첫 해외직구로, 노트북 옆의 미니 선풍기는 아이가 ‘비행기’를 발음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아이를 데리고 나간 첫 해외여행에서, 그 옆의 식탁매트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후 첫번째로 ‘새 집’분위기를 내고 싶다며 산 것이다. 이미 헌 것들이 되어버린 새 것들 사이에서, 오늘은 낡은 하루가 새로운 한 주를 기다리며 시계의 분침을 바라보고 있다. 분침이 12에 도착했을 때, 낡은 옷을 던지고선 새 옷을 걸친 채 날더러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지’물을 것이다.


공백 포함 약 1950자의 (다 읽어보면 아무 내용없음에 황당할) 일기를 마칩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김작가님과 kr-pen 태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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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못 쓰는 제가 봤을 땐 내용도 일기 형식에 잘 맞고 분량도 좋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10여년전부터 인터넷에 올리는 공개일기장 같은 거 없나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실현되니 좋네요.

저도 같이 일기 숙제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탐구생활 같은 책 푸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사실 일상이란 이렇게 구성되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순간이 의미로만 가득차 있다면 아마 숨막혀서 살기 힘들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느슨해보이지만 느슨하지 않은 - 혹은 그 반대의 일상을 지지합니다 :)

공감합니다. 본인이게 가장 적절한 지점(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을 찾아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만 일상 곳곳에서 의미를 많이 찾지 못한다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살아온 삶이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겁이나서 여러군데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24분 전에 쓰셨군요ㅋㅋㅋㅋ쓰기 싫지만 써야 하는 그 마음이 아예 내용을 그걸로 채워버린 제 일기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예, 당당히 하위권을 차지할만한 게으른자의 일기입니다ㅎㅎㅎㅎ꼭 써야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하고싶어서 시작했다가 하기싫은것처럼 끝나버린 일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몇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스티밋에 사실적으로 박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합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오랜만에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듯한(?) 느낌이네요~

ㅎㅎ다들 읽으시라고 펼쳐서 벽에 게시해놓은 일기입니다. 저기 링크에 재미있는 일기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거 읽으며 시간을 보낼까 싶네요.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낡은 것을 잘버리지 못하는 1인입니다.. 의미 부여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 멋지네요..

흘러간 시간들에 대한 이정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없으면 내가 어떤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떠올리기 힘들더라고요. 즐거운 기억의 이정표가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제게도 @lovewriter님께도요.

오오 글쓰기 만렙 스킬을 익히셨군요. 초딩 시절 길게 늘여 써서 어떻게든 공백을 채우려고 했었죠. 이렇게 잘 정리해주시니 재밌습니다. 이렇게 '쓸 것이 없다' 도 하나의 장르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고요ㅎㅎ

감사합니다. 저처럼 게으른 사람은 없을 줄 알았더니 '쓸 내용이 없다'는 주제로 글 쓰신 분들이 제법 되네요. 그냥 '피곤하다'가 아닌 '이래서 피곤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정도면 일기의 조건은 충족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일기를 이렇게 성실히 썼다면 선생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을텐데.

" 내가 하는 일이 늘상 그렇듯, 해야할 일을 앞두고는 그 일 외에 모든일이 재미있다."

피식했습니다 ㅋㅋ 제 일기장 보는 줄 알았네요. 중간에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유트브 음악 찾는 부분까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

의외로 소소한 부분에서 남녀노소 빈부와 국경에 관계없이 통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예를들면 떠먹는 요거트의 포장지를 뜯으며 뚜껑에 묻은 것부터 핥아먹는 그런 행위 같은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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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근데 빈병모으듯이 이 뱃지 모아서 찾아가면 뭐 안 주나요?

조금은 다르지만 짱구만화에 나오는 사진찍는 사진가를 찍은 사진이 떠오르네요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기거리가 되네요 : )

ㅎㅎㅎ재채기와 분식점 글처럼 말이죠. 유체이탈하듯 자기를 내려다보며 그 행동을 기록하는 것도 재미있는 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해야할 일을 앞두고는 그 일 외에 모든일이 재미있다

공감합니다. ㅎㅎ
저는 몇 번 응모할려고 쓰다가 포기했어여~
왠지 잘 안 써져서 ㅎㅎㅎ

kimlee님이나 kyslmate님 같은 심사위원에겐 좀 죄송하지만.. 별거 없는 내용이지만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원래 컨텐츠가 잡다한 일기글이라 '응모만 하기'는 쉬웠습니다. 휴양림, 목공이야기 보러 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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