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쇠퇴기

in #blog3 years ago (edited)


BEHIND THE SUNFLOWER SERIES

헤세가 반 고흐를 이해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예술가 정신에 공유되는 비슷한 기질 때문이었는지도,

아직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무더운 초가을까지 활짝 핀 백일홍 가지를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 놓고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쓴 글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활짝 핀 백일홍을 본다면 나도 똑같이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일시에 폈다가 져버리는 여느 꽃들과 달리 백 일 동안 피고 지는 이 꽃을 근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집착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동백꽃도 특이한 건 마찬가지이다. 선명하게 아름다운 채로 꽃 대가리가 후두둑 떨어져 버리니 죽을 때도 폼나게 죽어야 한다는 신조 때문인지 모르겠다. 활짝 핀 꽃을 인생의 전성기라고 비유한다면 백일홍이 전성기가 오래가라고 안간힘을 쓰는 꽃이라고 부를 만도 하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아름답게 피고 지는 꽃일지라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거다. 그러니 가장 아름다울 때부터 쇠해져가는 과정까지도 사랑하리라는 다짐때문이었을까? 헤세에게 죽어가는 과정이 뭐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

정신이 아름답게 죽어가야 하겠지. 아마도 그건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시작될 것이고 사소한 변화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는 정신의 꾸준함이랄까?

한여름과 초가을 빛깔의 정수는 백일홍이다! 나는 요즈음 언제나 이 꽃을 방안에 꽂아 놓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백일홍은 상당히 오래간다. 백일홍 다발이 처음 싱싱할 때부터 시들어 버릴 때까지 변화하는 과정을 나는 비할 데 없는 행복감과 호기심으로 지켜본다. 꽃의 세계에서 색색깔의 싱싱한 백일홍 한다발 보다 더 빛나고 더 건강한 것은 없다. 그것은 빛의 폭음을 터트리고, 색깔의 환호성을 울린다. 요염한 노랑과 오렌지색, 가장 밝게 웃는 빨강과 경이로운 적자색 등이다. 이것들은 가끔 순진한 시골 처녀들의 리본과 일주일의 제복 색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격렬한 색깔들을 나란히 꽂아놓고 언제나 격렬하게 광채를 발할 뿐이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여서 어울리고 고무하며 승화시킨다.
 
약간 사그러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연모의 정은 특히 이 꽃이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불타고 있다! 화병에서 천천히 색이 바래며 죽어가는 백일홍을 보면서 나는 죽음의 무도회를, 반쯤은 슬프고 반쯤은 짜릿한 무상함을 체험한다. 왜냐하면 가장 무상한 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죽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여, 여드레나 열흘쯤 된 백일홍 다발을 한번 관찰해보라!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 날 동안 계속 퇴색해가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들여다보고 하루에 몇 번씩 아주 자세히 그 꽃을 관찰해보라! 그러면 싱싱했을 때엔 야하고 도취적인 빛깔의 이 꽃들이 아주 섬세하고 지친 듯 정겨운 색깔로 퇴조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저께의 오렌지색은 오늘엔 노란색이 되고 모레쯤에는 엷은 청동색이 덮인 회색이 될 것이다. 시골풍의 즐거운 청적색은 그림자의 대립인 것처럼 서서히 담청색으로 뒤덮이며 시들어가는 가장자리 꽃잎들은 여기저기에서 보드라운 주름을 지으며 꾸부러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고는 완전히 색이 바랜 증조할머니 명주옷이나 흐릿해진 옛날 수채화에서나 볼 수 있는 퇴색한 흰색, 즉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이며 슬픔에 빠진 붉은 회색을 보여줄 것이다.
 
친구여, 이 꽃잎의 아랫부분을 자세히 주의해서 보라! 줄기를 꺾을 때 가끔 분명히 보이기도 하는 그림자 쪽에서 색깔 변화의 유희가 완성된다. 꽃봉오리 자체보다도 줄기의 변화 과정에서 정신적인 것으로의 승화, 즉 죽음의 과정이 더욱 향내를 풍기며 더욱 놀랍게 완성된다. 여기에는 보통 꽃의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잃어버린 빛깔들이 꿈을 꾸고 있다. 높은 산의 바위나 이끼, 해초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금속성이고 광물적인 색조이다. 희귀한 회색과 녹회색과 청동색의 변조가 꿈꾸는 모습을 보게될 것이다.
 
꽃이 죽어가는 것, 장미색이 밝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가장 생생하고 자극적으로 모든 생명과 모든 아름다움의 비밀로 함께 체험하도록 강의해보라! 그러면 그대는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1928년

지난 여름에 행자로 뺑이치던 친구가 보내주었던 선암사 백일홍의 처량하지만 아름다운 슬픔도 다시 찾아보게 된다.


헤세의 마음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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