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운동을 3.1운동으로 바뀌게 한, 어쩌면 3.1운동을 못하게 만들 뻔한 한 장의 인쇄물 & 이를 두고 엇갈린 두 남자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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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본래 3.3운동을 계획.>



<한없이 힘든, 역설적으로 희망을 그린, 1920~40년대 유행가 "희망가">

<일반인의 개인적 정리글일 뿐이므로, 맥락 위주로 보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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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 직전 국내외 정세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준비 과정


① 1919년, 3.1운동 직전 국내외 정세

이 당시는 애국가도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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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일반 서민층들은 고종에 대한 불만이 여전했고, 크게 독립운동을 할 의지는 없었습니다. 딱히 누리던 기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었고, 어떤 이유였든 간에 고종은 스스로 일본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 이태왕(李太王)이 된데다, 변변한 대응도 못해보고 당했으니까요. 비록 고종이 나름 똑똑한 사람이고 즉위 초기에 여러 외교적 대응 노력을 안한건 아니라고 해도, 드러난 결과상 서민들이 보기에는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일제도 주로 구 대한제국의 기득권층과 지식인들 중 말 안듣는 사람들을 탄압했지, 일반 서민들은 크게 탄압할 이유는 적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구 기득권층 및 서양의 평등사상을 접했던 종교인들 위주로 일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1918년 1차대전이 끝나자 미 대통령 윌슨은 원칙적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며, 식민지들의 독립을 찬성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 지도층 인사들은 이를 근거로 독립의 논리를 만들던 중, 고종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독살설"까지 퍼지면서, 일본제국에 대한 분노가 높아지게 되고,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를 맞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명분이 만들어진 데다가, 전반적인 국민들의 분노도 형성되어 독립운동을 펼칠 절호의 찬스를 얻게 된 것이 바로 3.1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국내외 정세속에 고무된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낭독하고, 전국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계획을 짜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하에서 전국민이 독립선언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세계가 우리를 독립국으로 인정할 것이라는 약간은 순수한(?) 면도 있는 준비였습니다.

1차대전 당시 일본은 별거 안했지만 막판 참여해서 승전국이 되었고, 패전국들의 식민지들은 승전국들이 나눠서 위임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제는 독일제국이 통치하던 중국 일부 영토를 오히려 받을 정도로 승전국 지위에 있었습니다. 미국이 일제에게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시켜줄 수 있는 명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란 원칙적 선언이었고, 패전국이 보유한 영토들 중에서, 원래 강대국 영토이면서 전쟁 중 일시 점령된 곳들만 복원되었고, 원래 약소국인 아시아/아프리카/남미의 식민지들은 위임통치 후 여건을 봐서 독립이었지, 바로 독립을 시켜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② 민족대표 33인, 1919년 3월 3일 독립선언 계획을 준비

민족대표로 모인 33인의 구성은 개신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습니다. 이 구성을 보면, 3.1운동은 사실상 평등사상을 공부한 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을, 이를 지지하는 일반인들이 함께 참여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해 간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 두달간 펼쳐진 이 만세운동이 주로 장날에 열렸던 점을 볼 때, 장날에 사람들이 의심받지 않고 많이 모일 수 있는 점과 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럴 때 만세를 선창하면 장에 온 많은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는 전략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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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 명단>

  • 개신교(16명): 이승훈,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주, 박희도(변절), 정춘수(변절)

  • 천도교(15명):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변절)

  • 불교(2명): 한용운, 백용성


일제에 대한제국을 넘겨 준 주 계층인 유학자 계층(=사대부) 및 천주교는 1명도 대표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유학자 계층들이 모두 3.1운동을 반대한 건 아니겠지만, 3.1운동은 준비과정에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데다, 지지의사가 분명치 않은 지식인층에 설득하다가 오히려 일제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 등도 이들의 참여를 저조하게 한 이유였습니다. 또한 당시 천주교는 해외 선교사들이 직접 국내 주교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종교적 원리와 정치개입 어려움 등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당시 국내에서는 규모도 적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유학자 계층 및 천주교가 대표로 참여하지 않은 것이지,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천도교는 과거 "서학, 천주교"에서 탄압을 피해 "동학"이라 지칭하다가, 그후에도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양의 유교/불교/도교 등도 일부 수용하여 발전한 국내 종교였기 때문에, 오히려 1907년 경에는 대한제국 공식 종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자, 이때는 그 수가 최대 1~2백만명에 이르렀다고도 하네요. 물론, 오리지널 천주교가 현재는 주가 되고, 천도교는 미미한 수준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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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손병희", 기독교 "이승훈", 불교 "한용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3.1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 16/17/18번으로 추서됨>

기독교만큼 많은 대표가 참여한 이유는 이러한 천도교의 성황 및 천도교가 가진 자유와 평등 사상 등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천주교를 받아들인 중국도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며 평등을 추구했었지요. 물론 교주의 신격화와 공산사상이 주가 되면서 우리의 천도교와 달리 빨리 무너졌지만, 태평천국의 난이 1850년 시작되었고, 국내 동학이 1860년 경부터 유래한 것을 보면 둘의 뿌리는 비슷하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고, 발전양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책 한권의 엄청난 나비효과: 태평천국의 난 (19세기 최대 군사분쟁)

민족대표 33인이 완전히 구 기득권층 설득을 안한건 아니었습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등은 위험천만하게도(?) 이완용, 한규설, 김윤식, 박영효, 윤치호 등에게 찾아가 설득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때 이완용은 "이미 매국노라 불리는 내가 거기 어떻게 참여하겠소. 정말 그렇게 해서 독립이 되면 나는 맞아 죽을 것이요.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요."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그 외 유명 인사들은 만세운동이 과연 독립으로 이끌 수 있는건지 의문이고, 오히려 더 강한 탄압을 낳을 수 있다는 이유 등을 대부분 거절했다고 합니다.

3.1운동의 정신과 희생은 매우 존중하고 기념해야할 일이고, 그 해 4월에 상해 임시 정부까지 세웠을 정도였지만, 1919년 3월 1일부터 약 두 달간 펼쳐진 전국적인 운동의 결과는 더 강력한 국내 탄압 등으로 이어지면서, 독립운동 근거지가 해외로 쫓겨나게 되어 소규모로 펼쳐지게 되면서, 독립운동 자체가 약화되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다고 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손병희"는 이들 일부가 밀고할까 걱정은 했지만, 3.1운동이 정상적으로 치뤄진 바 아무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추후 말했습니다.

이렇게 민족대표 33인은, 본래 3월 1일이 아닌, 1919년 3월 3일에 낭독할 "기미독립선언서"를 만들었고, 고종의 "독살설" 등 일반 국민들의 분노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전단을 살포하면서 만반의 실행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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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시면서, 찬송가인 "희망가"의 원곡 들어보시죠. 원래는 참 평화롭고 아름다운 선율이라는게 팍팍 느껴집니다.


<한없이 평화로운 "희망가"의 원곡, 찬송가, "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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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미독립선언서를 두고 엇갈린 기구한 두 남자의 운명


① 인쇄중이던 기미독립선언서, 발각되다!

일제시대에 조선인 출신 형사가 많았던 것 잘 아실 겁니다. 그 중 "신승희"란 인물은 나름 유명한대요. 그는 독립운동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체포하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던 종교인들과 평소 두루 알고 지내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렇게 일제에 충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종교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체포나 수색 정보를 먼저 전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평소 좀 사소한 건은 뇌물 챙기면서 풀어주거나 봐주고, 중요한 건은 체포하면서 양쪽에서 다 명성(?)을 얻은 것이죠. 양쪽을 이용하며 출세한 그는 나름 부유한 편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3월 3일 독립선언 준비를 앞두고 당시 보성인쇄소에서 관련 자료를 한창 인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선언을 알릴 다량의 인쇄물이 필요했겠죠. 보성인쇄소는 보성학교와 함께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신승희"의 눈에 걸리고 맙니다. 마침 독립선언서를 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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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놀란 인쇄소장은 이를 보성학교 지도층에 알렸고,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은 그에게 뇌물으르 주며 "당신도 조선인이니 제발 몇일만 모른척 해주시오" 읍소합니다.

이때 받은 뇌물액수는 150원설부터 5,000원설까지 다양한데, 추후 일제 측 매일신보에 의하면 5000원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쌀 한가마 혹은 웬만한 월급이 40원 전후였던 점을 고려하면, 워낙 큰 액수라 이것이 누적 뇌물액수인지 당시 받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워낙 큰 사건이니 5,000원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시 천도교 종세가 상당하여 수시로 모이는 헌금규모가 몇만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뇌물을 받았다는 일제 측 신문기사가 있는 반면, 거절했다고 구술로 내려오는 분위기도 있다고 하네요. 판단은 각자의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돈을 받던, 안 받던 간에 그는 오랫동안 꾸준히 국내 종교인/독립운동가들에게 뇌물을 받아 온 일제 고등계 형사였으며, 따라서 그가 그런 중요한 문서를 본 것은 매우 위험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서 보안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

"신승희"는 모른척하겠다는 의미로, 곧 만주로 출장을 떠나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출장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② 3.3운동 계획, 3.1운동으로 급 수정되어 실행되다

비록 큰 돈을 주고(확실한 건 아닙니다) 악질 조선인 형사 "신승희"를 입막음 했지만, 믿기 힘들었겠지요. 민족대표들은 급하게 3월 3일 대신, 3월 1일로 계획을 변경합니다.

"신승희"가 독립선언서라는 한 장의 중요문서를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3.3운동"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당일에는 정작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지 않고, 요정이었던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두 시간 안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비폭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리로 가면 큰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이 부분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③ 기구한 두 남자의 엇갈린 운명 : 최린, 신승희

"신승희"가 일제에 밀고했더라면, 비록 이틀을 당겼더라도 그 전에 민족대표들을 체포할 수도 있었겠지요?

결과적으로 "신승희"는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종교인/독립운동가들 탄압에 앞장섰던 악질 형사였지만, 그의 형사 생활 마지막 순간에 입을 다뭄으로써 마지막 일말의 자존심은 지키게 되었습니다.

왜 마지막 순간이 되었냐면, 그가 만주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제에 체포되어 밀고하지 않은 이유 등을 심문 받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혁대에 숨긴 독약으로 자살설이 유력하나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반면, 독립선언서가 미리 발각된 때 "신승희"에게 뇌물을 주고 입막음을 했고, 민족대표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던 "최린"은 추후 천도교에서 승승장구하며 "손병희"가 죽고나서는 거의 최고급 인사가 됩니다.

하지만, 3.1운동으로 두 달간 수천명이 사망하는 큰 사태를 겪고 난 일제는 이제 "유화정책" 대신 "민족말살정책"을 더욱 강하게 추구하게 되는데요. 이 때문에 1920~30년대는 구 대한제국의 기득권층과 사대부들 뿐 아니라 일반 서민층까지 매우 힘든 시기를 겪게 됩니다. 이무렵 미국에서 만들어진 평화로운 찬송가는 일본을 거쳐 국내에 전래되면서 당시 슬픔을 노래하는 "희망가"로 완전히 모습이 변해 인기있는 대중가요가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그 후 일제가 2차대전에 참여하게되는 일제말기에는 강제징용 및 생체실험 등으로 당시 조선인들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요.

3.1운동 자체는 "민족자결주의"가 퍼지고 고종 사망으로 국민들의 분노도 커지던 차에, 유학자/사대부 계층이 아닌 개신교/천도교/불교 종교 지도자들 위주로 준비해서, 장날 위주로 운동을 전개하여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퍼져 간, 그 와중에 가능한 무저항/비폭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어쩌면 일제 시대 한국 국민들의 기개를 높여, 그 정신적인 면에서 존중할만한 최고의 독립운동이었을 수 있지만,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력해지면서 서민들의 생활 및 독립운동 전개도 더 힘들어진 측면이 있던 것이죠. 상해임시정부가 생기게 된 것도 3.1운동 이후의 일입니다. 그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그 근거지까지 사실상 잃게되어, 부족한 자금과 소규모 게릴라 전 위주의 다소 미약한 독립운동이 전개되게 되지요.

이러한 시대흐름을 타, "최린"도 과거처럼 독립을 강조하기 보다는, 일제의 논리를 수용하게 됩니다. 소위 "민족개량주의"라는 것인데, 결국 독립을 하려면 조선이 먼저 강해져야 하고, 실력을 키울 시간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자치가 필요하다는 관점인 것이죠. 일부 종교인들과 민족주의 계열 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최린"은 결국 일제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사장까지 취임하여, "내선일체론", "민족개량주의" 등을 앞장서서 알리고, 선전하는 사람이 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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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최린(우)", 좌는 고대 창립자 "김성수"분의 동생,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그런 그는 광복 후 반민특위에게 "친일행위자"로 체포되어 재판 받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월북하여 북한에서 거주하다가 1958년 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민족대표로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던 "최린"은 그 후 "변절자", "친일파"의 삶을 살고 월북까지 하여 말년을 어렵게 보내게 됩니다. 북한에서마저 별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같네요.

이렇게 악질 조선인 형사 "신승희"와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완전히 엇갈린,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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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희망가"와 그 원곡인 찬송가 "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

같은 선율이지만, 시대상 등에 따라 극명히 다른 느낌인 점 인상적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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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몰랐던 내용들이 많네요:o

네 저도 공부 겸해서 하는 수준이에요.
이 내용 일부는 과거에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도 있다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내용 입니다.
역사라는게 만들어 지기 까지 참 어렵고 고난이 많군요...
잘 보고 갑니다^^

네. 한 사람 인생도 다사다난한데 그 합인 역사는 이무래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매우 잘 보았습니다^^ 잘 몰랐던 내용이라 두 남자의 운명이 흥미롭네요. 새삼 독립운동가들에게 다시한번 고마움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요새 한국 더위가 미쳤습니다. 서울이 38도라니. 도쿄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 같아요.

그렇군요~친구들이나 부모님에게서 날씨가 많이 덥다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38도이면 정말 많이 덥네요 저도 왔다갔다 하니까 진짜 많이 덥네요 더위 유의 하시길 바랍니다^^

반민특위는 연유가 어찌되었건 중간에 해체된 위원회라는 점 빠뜨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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