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5 서서히 밀려오는 엄습감

in #tripsteem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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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State side town에서 부터 D&department까지 속속들이 구경을 마치고, 적당히 카페 한 군데 정도만 들렸다가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조금씩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면서 하늘이 심상치 않아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가 몸을 숨겨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여유



언덕배기 중턱에 있는 한 카페.

오키나와에서 괜찮다고 하는 카페들은 다 이런 위치에 있었다. 찾아가기 쉽지 않은 언덕 중간쯤 외딴 곳에 홀로 존재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오픈 시간이 늦은 것에 비해, 마감 시간은 이른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시내나 관광지 부근이 아니면, 거의 3-4시면 문을 닫았다. 역시나, 미리 찍어 놓았던 카페에서 퇴짜를 맞고 두 번째로 선택한 곳이었다.







이런 날씨에 오션뷰는 그닥 원하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카페다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이 오션뷰에 감탄했겠지. 잔뜩 흐린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내 마음도 잔뜩 흐려졌다. 공항에서까지 그렇게 갈등했는데, 결국 오긴 왔구나 싶은 마음에 문득 오키나와에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날씨는 흐려도 카페 안은 아늑함이 흘러 넘치는 곳이었다.

여기도 State side town만큼이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앞에는 정원이 있고, 큰 나무에 그네를 메달아 놓았다. LP로 틀어주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오래된 무늬의 소파와 장식들이 이곳의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묘하게 스며든 미국식 빈티지의 느낌. 뭐랄까 아주 감탄스러운 빈티지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점심엔 커리를 내어주고 적당히 커피도 파는 이 공간에겐 이 정도의 빈티지가 적절하다고 느껴졌다.







한 쪽엔 LP판들이 쌓여있었고, 메뉴판 뒤에도 LP판이 끼워져있었다.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LP판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는데, 플레이어 주변에 쌓아둔 건 전부 이 크기였다. 찾아보니, LP판이 나오기 전에 크기가 작고 재생시간도 짧은 EP와 SP가 더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SP가 재생시간이 짧고 약해서 손상이 잘 되었다고 하는데, 왠지 이곳에 있는 것들은 전부 SP이지 않았을까 싶다. 헤드폰을 쓰고 들어본 재즈의 음질은 매우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부셔질 듯한 외형만큼이나 소리도 금방 부셔질 듯한 오래됨이었다.








휘감는 바람



숙소로 들어가기 직전, 원래 카약킹을 계획했던 만좌모 앞 바닷가를 보기로 했다. 이미 꽤 바람이 세지고 있어서 마음은 심난했지만, 시간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싶었나 보다.

아직 낮인데도 제법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한 번씩 강풍이 불어올 때면, 바람이 몸을 휘감아버리는 것 같았다. 만좌모는 전망대처럼 산책로를 걸으며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걸어가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에 휩쓸려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 번의 정전



숙소는 하필 바닷가 바로 앞이었다.

고급 리조트는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개별 해변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곳이었다. 이 숙소에 묵는 사람들은 아침에 이 해변에서 모두 사진을 찍는 듯 했다. 하필이면 오키나와에 있는 동안 가장 규모가 작은 숙소였고, 아래층에 숙박객이 한 팀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자다가 파도에 먹혀버리진 않겠지..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가장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이른 저녁시간이었는지, 저녁 타임의 첫 손님인 듯 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졌다. 정전이었다. 속으로 너무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는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제 시작된건가 싶었다. 그 와중에 핸드폰 후레쉬로 우리의 메뉴판을 비춰주러 온 직원의 모습..

다행히 금방 불이 켜졌다. 태풍때문인지 이 지역의 전기 수급이 원할하지 않아서 이것이 일상인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배를 채우고 들어오니,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놓이고 피곤이 몰려왔다. 바람의 세기가 약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바다를 내다보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밤이 되자 소리만 들릴 뿐 불빛 하나 없는 밤바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짐을 풀고 씻을 준비를 할 때 쯤, 숙소에도 정전이 찾아왔다. 오로지 빗소리와 바람이 벽을 때리는 소리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큰 호텔을 예약하는 편이 불안함을 덜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다려도 불은 켜지지 않았고, 안되겠다 싶어 문을 열고 나가 상황을 살펴보려는 찰나에 불이 들어왔다.

안심하고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몇 분쯤 흘렀을까. 두번째 정전이 찾아왔다. 약간은 체념을 한 채로 측면의 창문을 열어서 밖을 내다봤다. 차도에 불을 밝히는 가로등은 켜져있었고, 그 비를 뚫고 지나가는 차들은 끊임이 없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안해 하는 것도 꽤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인 것인지, 문제를 해결할 만큼 의욕적이지도 않은 마음 상태가 되었다. 날씨가 이런데 다들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걸까.

다행히 곧 불이 들어왔고, 정전은 그걸로 끝이었다.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시작에 앞서
1 설렘과 불안 사이
2 비워냄과 채움
3 호기심이 압도감으로
4 스며드는 빈티지함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5 서서히 밀려오는 엄습감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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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날씨네요.
연이은 정전에 피곤하셨을 것 같아요. 비와 정전으로 기억될 현실감 없는 오키나와.
그래도 산 중턱에 카페는 너무 멋진걸요-! 특히나 외관 페인트색이 취향저격입니다.

저도 너무 좋아하는 색입니다. 그 날씨에도 카페는 정말 좋았어요. 한번도 태풍을 크게 경험한 적이 없어서 더 겁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안녕하세요 @tsguide입니다! 좋지 않은 날씨에 연이은 정전까지 정말 걱정이 많으셨겠습니다ㅜ
정전이 끝났으니 이제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소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 ㅎㅎ더 큰 태풍이 그 다음날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만좌모 추억 돋습니다.

만좌모에 다녀오신 적이 있으시군요. 전 여유있게 보진 못해서 강렬한 기억이네요 ㅎㅎ

SP 너무 앙증맞네요 ㅎㅎㅎ
디지털인 MD 생각이 났어요. SP로 싱글 앨범 담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LP정도의 퀄리티가 되어준다면 SP싱글도 뭔가 새롭고 좋을 것 같네요. SP가 한쪽 면에 3-5분정도 재생이 가능한데, 그래서 노래의 일반적인 길이가 3-5분으로 맞춰진 거라는 설도 있더라고요.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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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에서 정전이라면 저도 당황했겠어요.
역시 태풍이 올 때는 숙소를 큰 호텔로 정해야 하나요? ^^;

시내에 있는 비지니스가 제일 맘편한것 같아요.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건물에 둘러쌓인 ㅎㅎㅎ

오키나와도 정전이 일어나는 군요. 제가 서말레이시아의 산호섬인 퍼르헨티안 섬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도 저녁에는 전기가 모자라 정전이 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섬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전기가 얼마 안되서 그러는 경우가 있다고 하네요 ㅠㅠ

그렇군요. 역시 구석구석 안가보신 곳이 없네요. ㅎㅎ 차도에 가로등이 켜져있었던 걸 보면 태풍과 비 때문에 건물들의 일시 정전이 아니었을까 예상하고 있어요. 섬 전체가 정전이 되면 정말 무서울 것 같기도 하네요 ㅎㅎ

어디선가 날 선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으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흐름이군요 ㅎㅎ 으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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