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3 호기심이 압도감으로

in #tripsteem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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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3박4일의 여정 중 둘째 날.

어렴풋하게 비가 올듯말듯 하늘이 흐려지던 시간, 나는 사키마 미술관(Sakima Art Museum)에 찾아갔다.

휴양지인 오키나와에서 굳이 미술관을 갈 필요가 있을까. 괜찮은 미술관이 있기는 할까. 라는 고민으로 혹시 몰라 '오키나와현립박물관'과 '사키마 미술관'의 위치를 찾아놓았다. 그러다가, 태풍 덕분에 바닷가 근처가 아닌 곳에서의 일정을 더 채워넣어야 했고, 왠지 현립박물관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느낌일 것 같아 사키마 미술관을 선택했다.

사키마 미술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는 것과 반전과 평화에 관련된 전시가 주요한 미술관이라는 점이었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별개로 '류큐'라는 나라였으나 무력으로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편입되었고, 세계2차대전 과정에서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일어났고 그 때 주둔했던 미군기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예정에 없었는데, 이 미술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꽤나 아픈 오키나와의 과거를 느낄 수 밖에 없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나는 미술관을 다녀온 후에 알게 되었다.








호기심



정말 인적이 드문 골목에 3-4대 정도 댈 수 있는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조용히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얼른 후딱 보고가자는 마음이었다. 작은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앞은 정원 같았다. 왼편에 돌이 쌓아져있었는데, 저건 뭘까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쟁으로 인해 숨진 자들의 돌무덤이었다.







미술관을 갈까 말까 고민했던 건 기획 전시가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구글 번역으로 찾아본 결과 염색과 관련된 전시였는데, 염색에 큰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회화 작품이나 설치 작품에 비해 염색은 퀄리티가 높은 작품을 별로 본적이 없다는 편견때문이었다. 티켓값이 700엔이면 7천원 정도인 것인데, 미술관의 크기와 염색이라는 주제에 비해서는 저렴하지 않는 가격이라고 느꼈다.







일단 들어갔다. 일본 특유의 정갈함은 어딜가나 크고 작게 숨겨져있다. 미술관 마저도 그러했다. 크지 않지만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 전시 촬영이 금지인 관계로 사진은 여기까지만.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전시장 앞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팜플렛에 나온 작가의 사진과 그 얼굴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작품도 모르고 일본어도 모르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스쳐지나갔다.










잔잔한 감탄


작품은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그리고 일본 전통 문양이나, 유카타에서 볼 법한 화려한 패턴들과 닮아있는 느낌이었다. 염색이라고 하기엔 꽤나 복잡하고 큰 크기의 작품이었는데, 어떤 기법으로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포토샵에서 여러겹의 레이어가 합쳐져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의 수작업버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염색작품인데도 회화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통 의복에 염색 작업을 한 작품도 있었고, 거대한 병풍에 그려진 작품도 있었다.

모두 오키나와의 자연이 주제인 듯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은 배경이었다. 들판이나 꽃밭, 그 위에 누워서 쉬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위에 지나가는 전투 비행기들. 오키나와에서 일어났던 전투와 그 아픔이 주제였구나.







기획 전시를 다 보고 들어간 곳은 상설 전시 공간인 것 같았는데, 정면과 양 옆면 3면에 걸쳐 모든 벽을 둘러싸는 거대한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흙빛이거나 핏빛이었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 즉, 시체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체로 가득찬 작품으로 가득찬 공간에서 전시를 본다는 것. 대단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왼쪽 벽면 위에도 백발의 노인 사진이, 오른쪽 벽면 위에도 백반의 노인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아마도 이 거대한 작품을 그려낸 두 작가인 듯 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세상에 없는 그들은 작가부부였을까. 어떤 마음으로 잔혹한 인상을 주는 이 그림을 그려냈을까.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혹은 평화를 외치는 방법에 있어서 이 미술관은 자기만의 대화 방식을 가진 것 같았다.










압도된 두려움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전시도 미술관 내부 공간도 아니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와 구석의 작은 계단을 통하면, 건물 위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건물의 회색 벽면과 좁은 통로, 조용한 이 장소의 공기는 왠지 모를 두려움까지 느껴지게 했다. 옥상을 오르는 길이 그리 길지 않았고 복잡하지도 않았지만, 나에겐 이 길이 그 어떤 건축물의 경험보다 드라마틱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고, 상체가 움츠려 들었고, 어딘가 모르게 스산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길의 끝엔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망대라고 표현하기도 소박한 것이 이 미술관의 건물 자체가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은 단층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건물의 전망대를 올라갈 때 이렇게까지 두려워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바라다 보이는 풍경.

숲도 아니고 공원도 아니었다. 바로 미군기지다. 아직도 오키나와의 영토의 20%는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이라고 한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미술관 건물과 미군기지의 간격이 1미터도 채 나지 않는 듯 했다.

사키마 관장은 미군 기지 안에 있던 조상의 땅 대신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을 자신이 입고 먹는 일에 쓰고 싶지 않아 미군 기지 바로 앞에 미술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미술관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건물 위로 오르는 동안 충분히 그 조용한 목소리에 압도당했고, 두려웠으며, 그렇게 올라가 바라본 미군기지의 풍경을 그저 자연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두고 그것도 일본의 아픈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들었는데, 어쩌면 오키나와는 미군에게도 일본에게도 모두 아픔을 지닌 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가장 극단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사키마 미술관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미술관을 통해 '다크 투어리즘'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크 투어리즘은 재난이나 전쟁이 일어났던 공간을 여행함으로써 그곳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개념으로 생겨난 용어인데, 예를 들면 원전 사고가 일어났던 곳을 교육이자 여행의 장소로 들여다보는 식이다. 제주도에도 다크투어리즘을 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다크투어리즘의 방향이 어떠해야 할지는 잘 모르지만, 배움보다 더 강렬한 경험과 감정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면 기억과 감정이라는 자리에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조용하고 외딴 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메세지가 감정 안에 각인된 듯 했다.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시작에 앞서
1 설렘과 불안 사이
2 비워냄과 채움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3 호기심이 압도감으로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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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 두 번째 오키나와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소를 물망에 올려놨는데, 미술관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네요. 경로가 맞으면 가보고 싶네요.^^

오 겨울의 오키나와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미술관은 아니라서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중부로 올라가는길에 스케줄이 맞으시면 들러보세요:)

오키나와 동남아와 일본을 섞어놓은듯한 느낌이 저는 좋더라구요 ㅎㅎ

전 과거의 미국과 일본이 섞인듯했어요. 휴양지느낌도 좋았구요 ㅎㅎ

안녕하세요 @tsguide 입니다.
'사키마 관장은 미군 기지 안에 있던 조상의 땅 대신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을 자신이 입고 먹는 일에 쓰고 싶지 않아 미군 기지 바로 앞에 미술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이 같은 사람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란 생각이 듭니다. 대단한 정신이네요

네 저라도 그렇게 선택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아픔을 보고 오셨네요. 그림을 보며 온전히 감정을 쏟아 부는 행위
진정한 감상법이라 봅니다.

스팀 고래의 꿈.jpg

정말 미술관 자체가 작품인 듯 인상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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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자체가 회색 콘크리트 더미라 그런지 날씨와 더불어 아픈 역사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에요. 그나저나 염색 작품이 회화적이라니 엄청 궁금하네요. 그러기 쉽지 않을텐데...

수채화나 유화의 회화라기보다는 레이어의 중첩이 매우 섬세해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여러 작품 중 하나가 이런식이었어요. (다른 전시관련 사이트에서 가져온거니 링크는 올려도되겠죠.ㅎㅎ)

오키나와는 옛날에 조선하고 교류도 많이 하고 일본 본토보다 더 친하게 지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랬군요. 전 이번에 다녀오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되었어요.ㅎㅎ

오키나와에서 실컷 밥만 먹고 온 저랑 다르시네요. ;ㅁ;ㅋㅋㅋ

ㅎㅎ밥집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안으로만 구경을 다녔네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는거 쉽지 않은 일인데, 태풍의 순기능도 있었네요.

네 작품도 좋았지만 미술관 자체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바다를 즐기지 못한 덕택이 아니었나 싶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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