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4 스며드는 빈티지함

in #tripsteem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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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 시내에서 중북부 만좌모를 향해 올라가는 여정.

날은 흐렸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나름의 여행을 즐기자는 마음을 먹었다. 바꿔 말하면, 기대를 내려놓고 어떤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은 State side town.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이런 미국식 단층 주택이 오키나와에 많이 지어지게 되었는데, 이곳은 미군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를 카페나 음식점, 공방으로 쓰게 되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어떤 리뷰에서는 관광지 같다는 말도 남겨져있었지만, 내가 만난 이 곳은 날씨 탓에 오히려 사람이 좀 있어줬으면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5-60년대 미국의 모습을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빈티지 팻말이 이 마을을 소개하는 듯 하다. 맥도날드 창업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운더(fonder)'가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자본주의 안에서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상관없이 레트로한 장면을 본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던 영화.







플로리다의 어느 마을의 과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려는 것일까. 번호별로 가게 이름이 쓰여져 있다. 이곳은 플로리다의 미니어처 버전인 것일까 싶기도 하고.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인 Proots라는 소품샵은 태풍때문에 문을 닫았다. 이 거리 자체가 오늘 영업종료인 것인가. 실망했지만, 그런 내 마음을 나에게 속이면서 사진찍으러 온 것이라고 말하며 빈티지한 공간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좋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찍으며 돌아다니는 행인들을 몇몇 발견하고 안심했다. 이 거리에 우리 뿐인 건 아니구나. 그러다 주차한 곳이 제대로 된 주차장이 맞는 건지 영 찝찝한 마음에 차를 다시 대러 다녀온 사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까눌레 그림이 그려진 베이커리 앞에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줄을 선 사람들이 대충 열대여섯 쯤 되어 보였다. 거리에 사람 하나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이런 곳 찾아다니는 것이 내 특기이자 취미이지만, 줄을 서지는 않았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세상의 디저트들은 너무 달고, 그래서 매번 유명한 디저트집은 나의 입맛을 힘들게 했기 때문. 디저트에 대한 감흥이 매우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줄서고 싶은 욕망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전부는 아니지만, 문을 연 가게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대감이 바닥인 상태에서 시작하니, 구경할 수 있는 곳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릇도 팔고 전통식료품도 팔고, 바구니도 팔고 슬리퍼도 파는 잡화점이었다.

이런 곳은 사지 않아도 보는 것 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특히 공방이나 빈티지샵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써서 만든 것들이 줄지어 탄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는게 좋다. 여행길에 내가 잠시 그 시간의 장면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카레와 로스트 비프 덮밥을 점심으로 해결하고, 점 찍어둔 카페로 향했다. 지나갈 때 부터 향긋한 커피 냄새가 풍겨왔는데, 자리라고는 벽에 붙은 벤치 두어개가 전부인 작은 카페였다.

오로지 커피만 파는 이곳은 작아도 고를 수 있는 원두가 열가지나 되고, 뒷편에는 큼지막한 로스팅 기계가 자리잡고 있다. 테이블을 네다섯개는 족히 놓을 수 있을법한 공간을 매우 비효율적으로 단정하게 꾸민 공간이었는데, 그 느낌이 왠지 모르게 맘에 들었다.







양 작음 주의. 스타벅스로 치면 숏사이즈 정도 되는 듯 하다. 맛은 약간의 산미가 감도는 느낌이 좋았다. 특별히 얼마나 맛있다고 표현하긴 힘들다. 올해는 커피 과식으로 인해 혓바닥이 커피 맛의 기쁨을 잃어버린 나이기에.

원두를 살까말까 하다가 안샀는데, 살껄 그랬다.







일본 특유의 정갈함이 오키나와에서도 역시 느껴졌는데, 군데군데 페인트 칠한 건물이 거리에 참 많았다. 색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묘하게 통일감이 느껴진다는 건 정말 일본스러운 감성이었다. 우리 약간 톤다운된 파스텔 컬러와 그와 변주가 맞는 톤온톤만 쓰자. 고 주민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록달록해도 튀지 않고, 다양해도 지저분하지 않을 수 있는 단정함에 매료되었다.







교토는 이렇게 건물마다 색이 칠해져있지 않았다. 목조 건물이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교토와는 달리 오키나와는 온통 페인트칠이었다. 나는 이 묘한 느낌이 일본식 위에 스며든 미국식 빈티지때문인 것 같았다. 유난히 스테이크 집이나 펜케이크 집이 많은 것도, 레트로한 건물의 분위기나 간판들이 전부다 한 맥락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픈 역사와 그로 인해 스며든 문화, 현재에도 공존하거나 혹은 부딪히면서 이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모두 혼합되어 지금의 오키나와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여행 첫날 빈티지샵에서 산 미국식 빈티지 컵도 그 맥락에서 벗어나있지 않았다.


그렇게 카메라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차의 속도가 아쉬울 만큼 눈에 담아냈다. 그 톤온톤들을..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시작에 앞서
1 설렘과 불안 사이
2 비워냄과 채움
3 호기심이 압도감으로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4 스며드는 빈티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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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도 느껴지지만, p님이 느낀 오키나와는 그레이 필터가 한층 올려진 느낌이네요. 그래서인지 더 아련아련하네요

아마도 날씨가 흐린 덕을 좀 본 것 같아요. ㅎㅎ 자연필터

와우 느낌너무 좋습니다!

ㅎㅎ 감사해요 :)

오키나와 분위기는 참 묘하네요
지금까지 가봤던 일본 여행지와는 정말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일본스러우면서도 일본같지 않은 느낌도 있고 섞여있는 듯 해요.ㅎ

올리신 사진으로도 오키나와의 모습이 선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

와 저 emotionalp님(P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여행기 처음 읽어봤는데 엄청 집중해서 읽었어요.

기대를 내려놓고 어떤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의 느낌이 참 공감이 되서 그때부터 조용하고 쓸쓸하고 빈티지한 오키나와 거리를 함께 동행했네요. ^_^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여행기 잘보고가요 :D 곧 다른 글들도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해요. 어떻게 불러주셔도 다 좋습니다.ㅎㅎ 저도 연애소설같은 여행기 잘 읽고 있어요. 제가 잘 읽지 않는 소재인데 @fgomul님 글은 읽게 되더라구요! :)

안녕하세요 @tsguide 입니다. 정말 설명만 없으면 플로리다로 착각할 것 같습니다~ 오키나아와 플로리다는 바다에 위치해서 그런지 비슷한 느낌이 있는것 같습니다~!! 어떤 연유로 저런 모습을 가지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어쩌면 시간에 만들어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빈스스토어에서 저도 커피한잔 하고싶네요~ ㅎ

카페이름은 작게쓰여진 cerrado인데 작아도 운치있는 곳이었건 것 같아요. :)

잡화점에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셨을것 같습니다^^

네, 다른 상점들도 다 문을 열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웠어요.ㅎㅎ

톤다운된 파스텔톤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일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랄까요.

색이 다양해도 도시가 어지럽지않고 단정한게 참 매력인 것 같아요:)

감성적으로 잘 쓴 여행기만큼이나 사진도 포커싱 처리를 잘하셔서 찍으신 것 같아요 ㅎ

감사해요. 배경이 다 한 사진이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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