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in #steemitnamechallenge6 years ago (edited)

칼님이 지목해주셔서 구성지게 뒷북을 치며 나름의 방식으로 닉네임 챌린지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 본명은 숨길 것도 없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고, 닉네임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태그는 달겠지만, 민망할 정도로 뒷북인지라 다른 분들 지목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서울에 내가 세 들어 사는 부모님의 집 말고, 온전히 내 것이었다고 여기는 공간이 있었다. 세 들어있다는 점은 변함없었지만.

라다크 레 시내에 얼마 남지 않은 전통가옥 중 하나였다. 나무와 흙만을 이용하여 지은 그 집은 잘 살피지 않으면 좀처럼 찾기 힘든 곳에 꼭꼭 숨어있어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곧잘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카페에 들어선 사람들의 첫마디는

'여기 사람들이 찾아와요?'

일 때가 많았다. 게 중에는 아니,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이 장사를 하냐며 신경질을 내는 사람도 있었는데 오죽 헤맸으면 초면에 화부터 낼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카페는 3층에 있었다. 3층으로 연결되는 나무 계단은 너무 낡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밟으면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계단을 모두 올라 카페로 들어서는 입구는 어지간히 키가 작지 않고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반드시 부딪칠 수밖에 없을 만큼 낮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님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 조심하세요!' 써 붙여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정전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촛불을 켜놓기 일쑤였는데, 어둠 속에 촛불, 끼익 끼익, 이런 요소들이 모두 만나 만들어내는 으스스한 분위기 덕분에 가끔 갑자기 들어온 손님을 보고 내가 비명을 지르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 서로 쏘리 쏘리,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다가 와하하 웃곤 했다.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공간은 라다크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었다. 뭐 굳이 찾아서 체험해볼 만한 일은 아니지만, 레 시내에서 라다크 전통 화장실을 체험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연 강수량이 극히 적은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지면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화장실을 만들고 자연 건조 방식으로 처리한다. 냄새는 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건조되기 때문이다. 대신 물은 절대로 버리면 안 된다.

부엌으로 만든 공간은 중앙에 난로를 놓아둔 가족들의 공용 공간이었을 것이다. 천장에 뚫려있는 구멍은 가운데에 놓아두었던 난로의 배기관을 위한 구멍. 부엌엔 난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 구멍은 옥상에 올라가 유리를 덮어 막아두었는데, 낮에는 이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이 훌륭한 조명 역할을 했다. 그 빛줄기 사이로 떠다니는 먼지를 보면 헉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 땅에서 먼지는 일상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못을 박는 것은 물론이고 상하수도 시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이 집에 조금의 흠집도 낼 수 없다는 것이 집주인 아룬의 입장이었고, 세 들어 사는 우리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을 길어다 쓰고, 생활하수는 따로 모아 직접 가져다 버려야 했다. 쌓여가는 설거짓거리를 보다 못한 단골손님들이 대신 수돗가에 나가 설거지를 해주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그 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만나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은 집이 대부분 그러하듯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들고 나는, 그 박자와 흐름 그대로를 따라가면 그럭저럭 더운 여름날에 땀이 식었고, 추워지기 시작하는 가을에는 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집주인 아룬처럼 나도 그곳에서 세 번의 여름을 보내며 무럭무럭 자랐다.

멍하니 앉아 창밖을, 쨍하게 파란 하늘을, 보란 듯이 솟은 설산 스톡 깡그리를, 와장창 쏟아지는 햇볕을, 스르르 허공을 빗는 포플러 나무를, 흙색의 지구 표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니 너무 상투적이지만, 그때 나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다. 세상을 다 가진 나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온 세상 사람들(어린이 포함) 정말 다 만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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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2012년에 정리했고, 10초 만에 뚝딱 지어낸 roundyround라는 닉네임은 2013년부터 사용했다. 이전부터 'the earth is round'라든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갑니다'와 같은 문장을 나를 표현하기 위해 곧잘 사용하곤 했는데, 닉네임의 의미는 이 문장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에 심어져 나를 불행하게 만들던 정착 민족의 본성과 부단히 타협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과 떨어져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어지는 순간이 여지 없이 찾아오곤 했다. 때마다 동물들 풀을 먹이기 위해 함께 보금자리를 옮기는 유목민들처럼, 그렇게 나에게 풀을 먹이러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만난 모든 새로운 것들로 차곡차곡 내 안의 빈 곳을 채웠다.

roundyround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갑니다'의 뿌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라다크 땅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만이 언제고 다시 찾을 내 마음의 고향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질 때는, 억지로라도 재빨리 끊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녁도 못 먹고 배고파 죽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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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유래 잘 봤어요.. 지구를 초원 삼은 유목민이시군요..
하,, 아무래도 밋업은 아틀라스 산맥에서 해야겠네요..ㅎㅎ

유니콘님, 아틀라스 산맥이라뇨! 흐익! 사실 저는 뼛속까지 서울러입니다... 도시 공기와 도시 조명이 그립습니다. 얼마 전에는 닭이 그렇게 울더니, 오늘은 염소가 세상에 무슨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지는 것처럼 울어대서 깜짝 놀랐어요.

낯선 땅에서 세상을 다 가진 그 기분이 궁금하네요. 그런데 사진을 보니 어떤지 알 것 같습니다. 좋네요ㅠ ㅎㅎㅎ

하와이님! 여기 진짜 아름답지요? 저도 포스팅하며 올릴 사진을 찾으려고 오랜만에 앨범을 뒤적이는데 어찌나 그리웠는지... 인도 영화 세 얼간이에 나왔던 판공 호수예요! :-)

오 진짜요? 세얼간이 아직도 못봤는데 한 번 봐야겠네요ㅎㅎ

그 영화 이후에 라다크에 인도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죠! 정말 재밌는 영화였어요. 꼭 보시길요! :-)

여유가 느껴집니다. 한번쯤 해보고 싶은 생활이에요.

좋은 동네를 몇 군데 알고 있습니다. (소곤) 김리님은 제 미래의 이웃, 동네 친구, 커피 메이트라고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사진을 보니 정말 마음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저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네요..

안녕하세요, 킬루님! 마음이 확 트이는 기분 같이 느끼셨다니 뿌듯합니다. :-) 사진은 판공 호수의 메락 마을인데요. 제가 저 마을 놀러 갔을 때는, 핸드폰 신호 안 잡히는 것은 물론(마을에 핸드폰 가진 사람도 없었고요), 유선 전화도 마을 회관에 딱 한 대 있었답니다!

라다크에서 생활해 보셨군요! ^^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겠습니다. 오늘도 자꾸 걸어나가고 계신가요.ㅎㅎ

라다크에서 지낸 날들이 제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요! 더 아름다운 날들이 또 오겠죠? :-)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인도식 감자 부침개 사 먹으러 쭐레쭐레 나왔어요. 쏘울메이트님의 일요일 오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요?

오 인도식 감자 부침개! 먹어보진 못했지만 맛있을 거 같네요ㅎ 전 가족들과 산책 갔다가 동네 시장가서 김밥 떡볶이 튀김 사왔네요ㅋ 즐건 저녁되세요!

와아 라운디님...

글 읽으면서 저도 제 안에 정착민족의 본성을 끊어내고 싶다고 생각 했어요. 라디크라니 마음의 고향이라니. 물욕의 족쇄를 찬 스스로가 어찌나 부끄러운지.

칼님, 그것은 정말이지 기나긴 투쟁의 역사였답니다. 후후. 삶을 살아내는 것은 나인데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은 어째서 늘 이렇게 어려울까요? 작년에는 엄마가 카톡으로 '딸 네가 하고 싶은 게 욜로냐?' 하시길래, 발끈하며 오 욜로 노노 그랬거든요. 유행처럼 지나는 단어 따위로 내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싶지 않은 오기 비슷한 것이랄까요? 한 번 사는 인생이 아니어도 이렇게 살 건데 말이죠. 작년에 조카가 생겨버리는 바람에 방향을 틀어 다음 발걸음 내딛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다음 발걸음은 조카의, 조카에 의한, 조카를 위한 한국행입니다. 결론은 조카 만세, 조카 짱. (어쩐지 욕 같은...)

Hi Roundy,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과 떨어져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어지는 순간이 여지 없이 찾아오곤 했다.

So attached my favorite/same song different singer.
share with roundyround from your supporter

ps. I'll extract your landscape picture with clear light at my post, thanks in advance.

Seasons to the wind

Let it out, let it all begin, Throw it to the wind! -in lyrics

피터님! 오늘은 어쩐 일로 영어로 댓글을 다셨어요? 저도 같이 영어로 댓글 쓰다가 푸악 웃기잖아! 지워버리고는 다시 한글로 쓰는 댓글입니다. :-) 제가 지금 대댓글들 달다가, 또 커피도 마시다가, 또 창밖을 내다보다가, 또 일도 잠깐 하다가, 또 옆에서 체스 두고 있는 애들 구경도 하다가, 또 친구들하고 채팅하다가 하면서, 한 시간 넘게 계속 두 곡을 번갈아 가면서 플레이하고 있거든요. 행복합니다. 정말로요. 감사한 마음으로 피터님 다음 포스팅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

!!! 힘찬 하루 보내요!

고마워요, 짱짱맨!

^^ 식사 맛있게 하셔야죠~

어, 인석님이 왜 갑자기 밥 잘 먹으라는 말을 하시지? 했는데 제가 글에서 배고픔을 호소했었군요... 실제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지독한 날들을 보냈어요! 오늘 월요일인 줄 알았는데, 화요일이고... -_-; 인석님도 맛점이요! (맛저인가요?)

ㅎㅎ 맛저예요~~

아, 카페를 하셨었군요? 이야기 더 들려주세요. 저랑 경험이 많이 다르셔서 너무 신기해요 ^^

후후... 이상하게도 팔면 팔수록 적자가 나는 미스터리한 수익구조의 카페였었죠... 계도님이 궁금하시다면 가끔 이야기 보따리 풀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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