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기분 좋은 일"

in #kr5 years ago (edited)


기분 좋은 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차 플랫폼 기둥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빌딩 숲 사이 반듯한 도로로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뛰어내리고싶은 욕구가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었다. 딱히 죽고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삶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과연 '살지 말아야 할 이유'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상욱은 특별한 이유도, 특정한 대상도 없이 그냥 작위적인 욕을 중얼거리며 1년에 몇 차례 그렇게 갈 곳도 딱히 없으면서 애먼 기차역에 올라가서는 아래를 내려다 보며 이상한 상상을 하고 또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를 참다가 내려오곤 했다.

별볼일 없던 삶을 근근히 살아가는 상욱은 사실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원래는 대단히 감정적이었지만 그런 성격은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늘 악영향을 미쳤고 사회관계에도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는 걸 느낀 순간부터 자제할려고 애를 썼다. 감정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뒷심이 약하단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붙들고 있는 스타일이다보니 어느 순간 마무리를 짓게되는 경험을 하곤했다. 그게 그의 유일한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성격도 그랬다. 타고나기를 느려터진 성격이 그의 감정적인 태도를 중화시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욕구는 채우고야 마는 그는 늘 소심하고 뭐든 귀찮아했지만 이상한 시점에서 갑자기 용기를 내곤 했다. 물론 본인은 용기라고 낸 그것들은 남들이 보기엔 대개 무모한 만용에 가까웠다. 그는 6개월을 따라다니던 여자에게 갑자기 수화기를 들었다. 또 미스타이밍이었다. 그건 그가 늘 하던 일이었다.

"송민지씨 저 보기보다 많이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민지는 뭐든 부정확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불결한 건 딱 질색이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전화하는 친구들의 매너에 민지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는 했다. 차상욱을 처음 만난건 소개팅 자리였다. 민지가 만나기로 했던 소개팅에 친구대신 나왔던 상욱을 만난게 둘의 짧은 악연이었다. 상욱은 처음만난 자리에서 나름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물어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엔 각설탕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민지의 커피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나무스틱을 입으로 쭉쭉 빨았다. 상욱은 민지가 극혐하는 요소를 모두 가진 남자였다. 다만 자신을 너무 좋아해주니 왠지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아서 상욱이 연락오는 걸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연인관계는 고사하고 가까운 친구관계로 발전시켜 보고 싶은 생각도 없던 터였다.

전자시계는 새벽 2:30분을 알리고 있었다. 밑도 끝도없이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상욱의 전화를 받은 민지는 시계를 보며 짜증이 났다.

"아니 잠깐만요. 지금 몇시죠?"

민지는 상욱의 무경우에 너무 화가 났지만 빌딩숲에서 비치는 기차역사 아래 20층 높이의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민지는 자신의 몰아부침에 이 이상한 남자가 어떤 대답을 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2시 30분이군요."

피식 웃음이 났다. 잠이 덜 깬 민지는 갑자기 이 남자에게 이상한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지난 15년간이나 자신과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던 연인 서훈과의 이유없는 권태감으로 헤어진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서훈이 얼마나 자신의 생각과 성향이 잘 맞았던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헤어진 그와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이 비현실적인 이 이상한 남자 상욱과 어쩌면 좀 다른 사랑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시작했다. "2시 30분". 그 한마디의 마법에 걸려버린 민지는 왠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환타지를 떠올리며 너무도 바쁜 일상이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무료했던 긴 시간들을 이 남자와 같이 한 번 해보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는 이상한 그 남자만큼이나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중하고 현실적인 그녀의 인생에서 여지껏 이런결정은 거의 없었다.

상욱은 일도 그럭저럭, 사는 것도 그럭저럭 결코 힘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커멓게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로위에 주차된 차들을 보며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죽기 직전에는 무슨일을 하면 가장 의미있을까를 떠올렸다. 그리고 두달을 주춤거리며 못했던 일, 잠든 민지의 목소리를 들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호가 울리고 잠에서 막 깬 부시시한 목소리의 민지는 상욱에게 다짜고짜 시간을 물었다. 상욱은 왜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시간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욱은 자신이 듣는 마지막 목소리가 송민지라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는게 기분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단편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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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을 읽는데 갑자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겹쳐집니다.

넵! @himapan님 제대로 파악하셨습니다. 부정적인 결말을 좋은의미의 제목으로 한 방식을 베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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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뛰어내렸어요? 수수님은 작가시군요? ㅎ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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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에서야 우리모두 작가니까 저도 뭐 끼워주신다면요 ^^ 그렇죠. 차상욱은 송민지의 작은 사랑을 받고 싶지만 작은 관심에 만족하고 뛰어내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송민지는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욱을 사랑해도 되겠다고 결심한다는... 뭐 그런 교차된 사랑인거죠.

굿모닝~ 저는 코박봇 입니다.
보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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