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photo] 춘천, 비오는 날

in #kr6 years ago (edited)

Chuncheon, Aug. 2018, Nexus 5x.


춘천에 왔다. 도착할 때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밤 하늘은 잠깐 갰다가 이내 다시 울었다. 숨쉬기가 편했다. 텁텁하지 않고 후덥지근하지 않은 공기였다. 가을장마라고 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여름의 냄새가 조금씩 가을의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가끔 말도 안되는 구도를 잡을 때가 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구도에 배려와 조심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왜 이 사진의 구도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굳이 설명하진 않을거다. 다만 어떤 구도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어떤 상황과 맥락이 관여된 것으로 보면 된다. 급박함일 수도 무얼 피하려 했을 수도 아니면 생뚱맞지만 NDA 같은 것일수도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장장 두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이번 윈도 업데이트가 그리 오래 걸릴 줄 몰랐다. 1분에 1%씩 올라간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서 스탠드 불빛이 비추는 자판의 그림자를 보며 곰곰히 무얼 적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글 쓰는 도중 방해받기 싫어 미리 실행한 업데이트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돌아다니다가 책을 읽다가 이 시간이 되었다. (방금 자정이 넘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처음에는 속도였다가 다음에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속도가 방향을 보완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옳은 방향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옳았다는 - 일종의 사후적 평가일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그래서 어떤 방향을 걷든 결국 그 방향은 괜찮은 방향이라는 것을 스스로 믿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보지 못하였다면 (지금 믿고 있는) 그 방향은 비교가 불가능한 반쪽 방향이 된다. 그래서 조금은 속도를 내어야 여러 방향으로 다녀볼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삶이 유한하기도 하고 말이다.

퍼센트는 절대로 속도를 말해주지 않는다. 퍼센트는 단지 진척도를 나타낼 뿐이다. 속도를 재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1이 2로 바뀌는 순간, 2가 3으로 바뀌는 순간, 여러 순간들의 기울기를 따져보아야 한다. 속도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번 이상의 순간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 하나의 순간과 과거의 경험으로만, 섣불리 속도를 재단하는 우를 범한 셈이다.


삼사일에 한번 정도는 잠이 들기 전에 항상 불안한 마음이 든다. 대략 일 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주기마다 계속 쌓이는 %들이 나로서는 상당히 무겁다. 한 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일 년이 지나면 100 에서 다시 0으로 퍼센트가 회귀하겠지만, 그 반복되는 해들을 백 번이나 쌓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내가 앞으로 쓰려고 쌓아둔 여러 해들은 다른 사람들이 쌓아둔 해들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당신과 어떤 사람이 세계를 공유하는 - 지금부터의 - 시간은, 당신의 남은 생애와 어떤 사람의 남은 생애 중 최소값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하루의 비중은 같지 않다. 매일 매일 하루의 비중은 점점 커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은 생의 하루를 살고 있고, 남은 생은 조금씩 줄어들기에. 물론 자신의 예상과 예측보다 더 살 수 있다면, 하루의 비중은 조금 더 완만하게 커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히 살지 않는 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비중이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근데, 그게 그리 쉬울까. 갑자기 이웃 집에 신이 산다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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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의 확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속도'가 필요하다는 말이 정말 공감됩니다. qrwerq님 글을 읽고 나니 요즘 제가 '최저 속력'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ㅎ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완전히 멈추지 않고 딱 엑셀 페달을 밟기 전의 속도인 "5-10km/h 정도"로요.

가장 느릴 때의 치열함을 왠지 qrwerq님은 잘 아실 것 같아요 ㅎㅎㅎㅎ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글을 공유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느린 속도라면 주위에 둘러보고 살펴볼 여유(?)가 많기에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조급해지거나 더 그 순간들을 치열하게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최저속력의 삶은 돌아봐야할 것이 많기에 방향의 확신을 가지기 위한 노고들이 더 요구될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

오랜만에 글 보네요.
춘천에도 비가 많이 오지요?
늘 치열한 글 쓰기를 하시는군요. 가만히 응원합니다.

네. 이 때 호우경보까지 났었습니다. 오늘은 전반적으로 날씨가 좋네요. 조금 덜 치열해도 좋겠습니다만 삶이 빡빡한 건 결국 글에서도 드러나나봅니다. 응원 감사드립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 가는 게 더 아깝게 느껴졌던 건, 하루의 비중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었군요. 덕분에 남은 생의 방향을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ㅎ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그 불안함이, 무게를 조금 더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남은 생이 영원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짐작하는 최대치가 있고 그게 항상 보장되는 게 아니기에 걸음이 가끔은 무겁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중이 커지는 만큼 속도도 자꾸 빨라지네요ㅠ 이제는 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달려나가야겠습니다.

모멘텀에 붙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모든 방향이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제대로된 방향이라는 것 또한 @wakeprince 님께 의미가 큰 방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비오는 날씨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에선 쨍한 하늘만 봐서인지 구름낀 하늘도, 형형색색의 불빛도 정말 예뻐 보여요.
저도 지금 걸어가는 방향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속도는 내봐야겠습니다!

밤 사이에 내리앉고 있는 구름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씩 비범해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매번 쨍하다면 그만큼 날씨가 예리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구름의 몽실몽실한 촉감이 그리우실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도가 필요한 때에, 적절한 속도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이야, 야경 너무 멋집니다 ~

산 위에서 보는 야경이 사실은 대박이지요. 속초 야경이 보일만큼 맑은 때에 설악산에 가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최근 설악산 다녀오셔서 부러운 마음에ㅎㅎ)

업데이트를 하는 시간도 어떤 글로 적을 수 있는 것이 대단합니다. 어떤 일이든 삶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기는 쉽지가 않던데....고민은 해보지만 선뜻 글로 나오지가 않으니까요 ㅎㅎ

업데이트를 하다가 살짝 화가(?) 나서 적은 글입니다. 스스로 감정을 관찰하다보면 왜 이런 감정이 나오게 되었을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일순간 떠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잘 낚아채면 뭔가라도 글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 모든 순간이 사실은 삶이고 삶과 연관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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