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일기

in #kr6 years ago

강남에서 일이 늦게 끝났다. 2호선은 출퇴근 시간에만 사람이 많은 줄 알았는데, 이 시간에도 붐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들 사이에 겨우 낑겨서는, 버스를 타지 않은 걸 후회했다. 숨 막히는 지하철에선 밀린 카톡 몇 개랑 전화 몇 통을 했다.

전화를 끊고 음악을 틀었다. 오늘 선곡은 대박이다. 너무 잘 맞아.


강남에는 참 예쁜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에 가야 예쁜 사람을 볼 수 있구나. 일에 절어 언제 지워졌는지도 모르는 내 화장기 없는 얼굴이 새삼 부끄러웠다.

몸이 피곤해서, 평소보다 퉁명스러웠다. 상대방이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고...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하기 싫으니까... 실은 하기 싫은 게 아닌데, 타인에 의해 하게 되면 하기 싫은 일이 된다. 같은 일을 나의 의지로 시작하면 즐거운데, 당신에 의해 시작하면 괴로워지는 게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항상 내가 생각하는 적당한 거리 그 이상을 원한다. 아마 내가 잘 웃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싫어하지 않지만, 만나고 싶진 않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들을 싫어하면서, 못된 내가 되기 싫어 자기 암시를 하는 건 아닐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집 근처 역에도 만취한 사람이 하나둘 보였다. 몸을 있는 힘껏 비척거리면서, 일행의 걱정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전혀 괜찮지 않은 걸음걸이로, 괜찮으니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한다.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 문득 나도 저렇게 몸을 비척거리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마지막으로 비척거렸던 게 언제인지 생각해본다. 2015년 대학로에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공연이 끝났을 때, 그 뒤풀이에서 그랬다. 그 이후로 한 번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술자리는 질색이다. 술이 몸에 받지 않는 게 시작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취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더는 믿지 않게 됐다.

금주 중인데 저 비틀거림을 보니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 마트를 들러 맥주를 왕창 사버렸다. 가방이 무거워 어깨는 빠질 것 같지만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 동네를 방황한다.

집에 들어와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쓴다. 취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서, 나는 반쯤 취해 이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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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냅다 들어왔는데, 기대했던 취객만이 떠들 수 있는 민망하고 화끈거리는 감성2000% 글은 없고 너무 차분하고 오타 없는 글에 실망...했습니다..ㅎㅎ

이 글의 요지가 그것입니다.

취객만이 떠들 수 있는 민망하고 화끈거리는 감성 2000% 글을 나도 쓰고 싶다!

오타 가득한 글을 쓰면... 블록체인에 영원히 저장 아닌가요? 또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한번 써보고 싶기도 하네요. ㅎㅎ

이거야말로 음악일기네요! 매번 글과 어울리는 음악을 소개해주셔서 넘 감사해요😊
수험생활을 할 때 강남역에 있는 학원을 매일 8시에 가서 10시에 나왔어요. 그때 지하철을 타러가면 사람이 많더라구요. 저처럼 큰 가방을 멘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다 나랑 비슷한 시험을 준비하나보다 싶었어요. 예쁜 사람들은 내리고 가방둘러멘 사람들은 열차에 타고.. 그 만원전철도 싫고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 끔찍한 분위기가 싫어서 일부러 먼저 나오거나 더 있다가 나중에 나왔어요. 그땐 현실을 잊고싶어서 밤마다 술이 땡겼는데!

제가 느꼈던 감정을 미리 느끼셨군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이지만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을 읽는데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드네요. 큰 가방을 둘러메고, 수수한 차림으로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피기펫님을 생각해보았어요. 그래서 요즘은 술이 안 땡기시나요?

저는 강남역이 싫더라고요 ㅋㅋ 가끔 강남역을 가는게 그 심리적인 불쾌감을 극복하기 위하는 것일 정도로. 뭐 사실꼭 그럴 필요도 없지만..

심리적인 불쾌감을 극복하러 가는 게 참 재밌네요. 강남은 이른 새벽, 낮, 오후, 저녁에 가도 언제나 친해질 수 없는 동네. 제가 강남에서 느끼는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ㅋㅋ 한 번을 가도 마음에 쏙 드는 동네도 있는데, 강남은 십년째 가도 뭔가 어색해요, 게다가 지금은 집까지 가까운데도

저도 술의 솔직함과 나른함?이 좋아 자꾸 먹게 되더라구요-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타인과 속내를 나누는게 어색해져 혼자 즐기는 술이 되어버렸어요-🙈

봄봄님 반가워요! 반은 몽롱한 그 기분이 좋아서 혼술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괜히 얘기하고 싶을 때가 생기는데 그럴 땐 그냥 얼른 들어가서 잡니다ㅎㅎ

전혀 취해서 글을 쓴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거야~ 원! 사람이 좀~ 취하고 그래서 좀~ 풀려진 모습을 글로 보이고 좀~ 해야 되는거 아닙니까? ^^ 취했다는 기준이 너무 낮은 것 아닙니까? ㅎㅎㅎ

오타도 좀 나고 그래야 하나요? 제 눈엔 이 글에서 취기가 보이는데요. 한 번쯤 그 정도로 왕창 취하고 싶네요. ㅋㅋㅋ 그 정도로 취하면 스팀잇은 생각도 안 날 것 같구요.

술에도 취할 수 있으나 다른 부분에서도 취할 수 있으니깐요. 어떨 때는 사람에게 나는 그 사람만의 향에도 취할 때 있으니깐요. ㅎㅎㅎ

스티밋이 생각 안날 정도로 술을 마셔서 취한다면 어떤 때일까요? 너무 기분 좋을 때였으면 합니다. ^^

그러게 말입니다. 모름지기 취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오타작렬하기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ㅎㅎㅎ

끄떡끄떡!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게라도 다소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도 하고요. 셀레님에게 그런 모습 기대하는 것은 힘들겠지요. 요즘 술 끊으신(?) 듯 하니...

술 ...... 오랫동안 끊었다가 다시 "잠깐" 마셔ㅅ.... ㅠㅠㅠ

저는 친한 사이여도 만나기 싫을 땐 안 만나게 됐어요. 연습하니까 되더라고요(실은 원래 못됐습니다). 하하, 맥주. 1만원에 4캔의 유혹은 생각보다 셉니다. ㅠ

친한 사이면 오히려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친하지 않을 때 힘들더라고요. 만나자는 연락이 올 때, 거절할 구실이 없어 만나게 됩니다. ㅠㅠ

집에 들어와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쓴다. 취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서, 나는 반쯤 취해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이부분 문장이 참 좋네요 ㅎㅎ

ㅎㅎ 계도님 칭찬 감사합니다. 왜인지 전날 흑역사를 되돌아보는 기분이 드는군요.

강남은 다들 바뻐보이는 곳이지요. ㅎㅎ 빨간 버스 타는 것도 전쟁이고..ㅠㅠ

원래 그런 이미지긴 했지만, 늦은 저녁은 또 다르더라고요. 늦은 저녁이지만, 다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은 너무 많았구요 ㅠㅠ

에잇 실망입니다. 무릇 ‘취중일기’라 함은 이보다 훠얼씬 더 취한 채로 막 이불킥할 내용 써야 하는 거 아닙니꽈! 맥주 왕창이라고 써놓고 1만원에 4캔 사서 2캔쯤 드시고 쓰신 거 아닙니꽈! 규탄한다 규탄한다

제가 글에서 오해의 소지를 남겼군요. '오래 두고 먹을 술을 왕창 사 왔다'입니다.

역시 술꾼(?)답게 왕창 취하는 걸 생각하셨군요. 그나저나 칼님은 술 드실 때 항상 그렇게 왕창 취하시는 건 아니겠죠? ㅎㅎ

사실 저 댓글 쓰면서 보드카에 취해있었... 흑흑... 늘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ㅋㅋㅋㅋㅋ 제가 밤에 쓰는 글은 거의..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술자리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것을 그리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간혹 약간의 취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더군요. 취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지 모르지만, 취하면 좀 더 편해지는 이야기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ㅎㅎ 저도 약간의 취한 기분이 좋아 맨날 방에서 맥주를 마신답니다.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들은 잊혀지지 않는 따뜻한 말도 많습니다. 실은 저는 그런 말들이 감춰진 그 사람의 속내라 생각하는데요. 괜히 센 척을 해보았습니다. 실은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들이 즐겁기도 하다가, 괴롭기도 하다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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