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 8. 손오공을 가두어 둔 오행산, 오토바이 소리가 안 들리는 호이안

in #kr-travel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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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에서 머문지 나흘이 지나서야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움직일 에너지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택시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면 그만일 일인데, 당시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런 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제로라도 움직일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투어에 참가하기로 했다.

투어는 Marble Mountain을 거쳐 호이안을 다녀오는 투어였다. 오행산, 응우한선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어차피 내가 베트남어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가 응우한선이라 읽는다 해도 베트남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니 그냥 Marble Mountain으로 부르는게 편하다. 서유기에 나오는 오행산이 여기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유기에서 나온 오행산의 이름을 따서 오행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산들이 늘어선 모습을 생각하면 여기가 손오공이 갇혀있던 오행산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산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봉우리와 봉우리가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게 아니라 사면이 경사가 급한 절벽이다. 능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 그 산들이 서로 가까이에 솟아서 독특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무작정 참가를 했었는데 투어에 참가한 사람들은 나를 빼고는 전부 베트남 사람이었고 가이드는 영어를 못했다. 가이드가 인솔하며 여기저기 설명을 하면서 다니다가, 나를 보더니 20분간 자유롭게 다니라고 했다. 산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Marble Mountain이라는 이름 그대로 산 전체가 대리암으로 이루어졌고, 경사가 급한만큼 주변 시야가 탁 트여있어 꼭대기에 올라서면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전경이 펼쳐진다. 천장이 막혀있지 않고 구멍이 여기저기 있어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동굴들도 갖추고 있다. 오행산은 이처럼 산으로서의 매력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산 전체가 사찰이라고 할만큼 곳곳에 석탑, 제단, 불상이 놓여있는데, 동굴 안에도 불상들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신 없이 걸어다니다 정신을 차리니 출구가 보였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길도 모르겠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어서 출구에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내려갔더니 멀리서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들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연락도 할 수 없는 내가 사라져서 막연히 기다리는게 유쾌한 경험은 아닐텐데 그들은 나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이 우스웠을까? 아니면 그들의 여유로운 천성에서 나온 웃음이었을까?

호이안에는 도착하자마자 식사를 했다. 볶음밥을 먹는 중에 면요리가 또 나왔다. 한동안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하는둥 하는둥 하고 있었는데, 막상 또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먹게 되어 열심히 먹었다. 면요리는 까오러우라고 하는데 미꽝과 다르게 육수가 아예 없는 볶음국수 종류였다. 미꽝에서 고소함을 줄이고 짭조름함을 추가하면 까오러우의 맛이라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미꽝을 더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메뉴 2개를 먹어치웠는데 이번에는 화이트로즈가 나왔다. 화이트로즈는 라이스 페이퍼에 새우 살을 싸서 만두처럼 만든 음식인데 라이스 페이퍼의 매끈하고 쫀득한 식감이 좋았다.

식사를 하는 중에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호치민 출신인 선원이었는데, 한국에도 자주 들렸다고 한다. 울산, 부산, 제주를 다녀왔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통역을 해주어 다른 투어 참가자들과도 이야기를 조금은 나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가이드가 와서 "8PM"이라기에 손목을 들어서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들기고 X를 그려서 내가 시간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가이드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주었다. 가이드의 손목시계를 차고 길을 나서려는데, 다른 투어 참가자들이 다 같이 나를 보며 "Eight PM"이라고 반복해서 소리쳤다. 내가 손가락 여덟개를 펼쳐보이고 씩 웃었더니, 그들도 미소로 화답했다.

호이안 구시가지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없었다. 옛 건물을 보존하고 있는 이 거리의 밤은 등불들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호이안도 다낭과 마찬가지로 강이 흐르는데 다낭의 강은 아주 폭이 넓었지만 호이안의 강은 폭이 좁았다. 안 그래도 폭이 좁은 그 길에 나룻배가 가득했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떠다니거나, 연등을 띄울 수 있는 모양인데 바라보는걸로 충분해서 끊임 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뱃사공들을 지나쳐갔다. 그러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는 보통 빗줄기가 가벼워서 맞으면서 다녀도 크게 젖지를 않았는데, 이번에는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내려서 작은 오두막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비가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약속시간은 많이 남아있어서 오두막에 앉아서 경치를 감상했다. 비옷과 우산을 가지고 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팔고 있는 상인도 있었고, 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약속시간이 다가왔지만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메모장을 최대한 젖지 않을 곳에 옮긴 후에 허리를 숙여 최대한 내가 비를 받아내며 약속장소로 돌아왔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지 두시간 남짓 내린 비에 비가 종아리 너머까지 올정도로 차올랐는데, 어디선가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한 가족이 지나가는데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Are you gonna do it? Are you gonna do it?"이라고 외친 후 아이가 물웅덩이 위에서 힘껏 뛰었다. 그 거리에는 노점상이 가득했는데, 앉아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얼굴에까지 물이 튀었다.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들이 다 젖기도 했다. 그 가족은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린 노점상으로 가득한 그 거리를 지나갔다.

투어라고 참가해서 다녀오긴 했지만, 대부분이 자유시간이라 혼자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에는 미썬도 다녀오겠다고 생각하며 방에서 테니스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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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님과 베트남사람들의 미소가 그려지면서 제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지네요 ㅎㅎㅎ고장난 스맛폰이 읽는 사람에게는 큰 상상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접속 못한 사이에 무수히 많은 여행기가 올라왔군요. ^^

부지런하게 쓰고 있습니다.

사진없어도 멋진 여행기네요^^
베트남 사람을 만나본적은 없는데 글에서 정이 팍팍 느껴지는것 같아요.
말도 안통하고 답답했을법도 한데 즐겁게 보내신거 같네요 ~~

이제 좀 편한 여행기 같습니다.
어디 가나 여행하는 사람들은 친절하네요.

호이안 참 좋나보네요.. 조용한 베트남에 가고 싶은데.^^

오토바이가 없어도 워낙 관광객이 많아서 아주 조용하진 않았어요.

은근 글만 있으니, 머릿속에 장면을 떠올리며 읽게 되네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투어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군요 ㅎㅎ

저만 그런 게 아니였군요 역시 ㅎㅎㅎ

다낭몇번정도 가봤는데 갈때마다 너무 좋은곳..!

여행기가 담백하네요 ㅎㅎ 어쩐지 느껴지는 분위기가 예전 쓰시던 김리님의 글과 계속 매칭이 되는 느낌

약속시간이 다가왔지만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메모장을 최대한 젖지 않을 곳에 옮긴 후에 허리를 숙여 최대한 내가 비를 받아내며 약속장소로 돌아왔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지 두시간 남짓 내린 비에 비가 종아리 너머까지 올정도로 차올랐는데, 어디선가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한 가족이 지나가는데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Are you gonna do it? Are you gonna do it?"이라고 외친 후 아이가 물웅덩이 위에서 힘껏 뛰었다. 그 거리에는 노점상이 가득했는데, 앉아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얼굴에까지 물이 튀었다.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들이 다 젖기도 했다. 그 가족은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린 노점상으로 가득한 그 거리를 지나갔다.

아마 저였다면 여기를 제 잡생각으로 쓰는데 한 문단은 할애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ㅎㅎ

대부분이 자유시간인 투어! 좋은데요~~ㅎㅎ

김리님 오랜만에 뵙네요
여행수필인가요 글 재밌네요
지난글 보러
다녀오겠습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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