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 3. 운수가 좋았던 달랏에서의 하루

in #kr-travel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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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네를 떠날 시간이다. 이른 오전에 출발하기 위해 전날에 사온 컵라면을 먹었다. 한국의 컵라면보다 매운맛이 약하고, 굴소스가 들어있다. 다음 목적지는 고원에 있는 달랏(Da Lat)이었다. 집에서 에어컨을 26도로 맞춰놓는데, 달랏은 한낮의 온도가 25도를 넘지 않는다. 서늘한 달랏만을 위해 가져온 청바지와 차이나셔츠를 입고 버스를 기다렸다. 실수였다. 반바지를 입어도 더운 곳에서, 청바지와 차이나셔츠를 입고 뜨거운 볕을 맞으며 버스를 30분이나 기다렸야 했다.

컵라면만 먹고 버스를 오래탔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반미와 커피를 주문했다. 주변이 탁 트인 카페에 앉아서 바라본 거리는 독특했다. 달랏의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며, 쭉 뻗은 길도 없이 끊임없이 휘어지고, 잔가지가 뻗어나가듯 갈림길도 쉴 새 없이 나타난다. 카페 주위를 둘러보면 카페보다 고지대에서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길부터, 카페보다 저지대에서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길까지 다양한 고도에서 다양한 고도로 향하는 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들에는 익숙한 오토바이와 차들만이 아니라, 마차도 다닌다. 그 산만한 길에 여느 베트남에서처럼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과 긴옷으로도 모자라서 외투까지 입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더욱 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숙소를 가기 위해서는 골목을 여러번 지나야 했는데 워낙 갈림길이 많아서 자주 지도를 확인해야 했다. 짐을 풀어놓고는 그랩으로 차를 불러 호숫가에 있는 꽃정원으로 향했다. 꽃정원을 둘러보고는 호수를 한바퀴 돌고, 남쪽으로 걸을 예정이었다. 꽃정원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준비한 우비를 입고 베트남에 적응한 것 같은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사람들이 준비성이 부족해서 우비를 안 가지고 다니는게 아닌 모양이었다. 비는 수시로 내렸는데, 비가 내릴 때마다 우비를 꺼내서 입는 것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계속 우비를 입고 다니자니 우비 속은 너무 더웠다. 달랏에서도 더운데 다른 곳들에서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꽃정원이 베트남에서 우비를 입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호수에서는 하늘이 너무 흐려서 아쉬웠다. 웨딩 사진을 찍으러 온 신혼부부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얼마나 더 아쉬웠을까. 호수를 한바퀴 돌고, 길거리에서 라이스 페이퍼에 파, 계란를 얹은 베이스에 각종 재료들을 추가해서 익힌 음식인 반짱능(Banh Trang Nuong)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항응아크레이지하우스를 가기 위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태양이 구름이 조금 흩어진 틈을 타 고개를 내밀었다. 호수는 푸른 하늘을 선명하게 비추며 빛이 났다.

항응아크레이지하우스는 별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정말 크레이지한 건출물이다. 복잡하게 휘어있는 통로들이 얽혀서 어디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면 갔던 곳에 다시 가게 된다. 이 안 그래도 크레이지한 구조물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얼마나 더 크레이지한 곳이 되려는 것일까. 항응아크레이지하우스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바오다이 황제의 여름궁전이 나온다. 건물은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지만, 터 전체가 키가 큰 나무들로 울창하고 정원들을 예쁘게 꾸며놓아 테라스나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어딜 보아도 녹색이 빼곡한 이곳에서 지내면 눈이 좋아질 것만 같다.

일정을 마치는게 좋았을텐데 날씨가 좋아서 기운이 남았을까? 내친 김에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사찰까지 걷기로 했다. 걷다보니 하루종일 먹은게 컵라면, 반미, 반짱능 뿐이고 이미 10km 이상을 걸어서 배가 많이 고팠다. 절반쯤 지났을 때 운이 좋게도 마당에서 식사를 하는 호스텔이 보였다. 직원은 나를 보더니 베트남어로 마구 이야기를 했다. "I can't understand Vietnamese."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You look so Vietnamese."라며 미안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영어로 된 메뉴판이 따로 있음에도 베트남어 메뉴판을 준다거나 하는 경험을 여러번 한걸 보면 내가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 직원은 아주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는데, 바쁘게 자리를 옮겨가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여행 일정에 대해 묻고 장소를 추천하곤 했다. 식사를 마치니 후식으로 패션후르츠 쥬스까지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정말 고맙다고, 숙소가 없었다면 여기에서 묵었을텐데 아쉽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길로 나왔다. 호수에서부터 참 운이 따르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해는 다 지고 어두워졌는데, 무슨 생각인지 계속 남쪽으로 걸었다. 사찰에 도착했더라도 영업시간도 아니었을텐데 한번 목표를 정하고나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멈춰세운건 폭우였다. 내가 베트남에서 만난 비들은 대부분 아주 여려서 맞아도 거의 젖지 않았는데,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좀처럼 보이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데이터 로밍을 켜고 그랩으로 차를 부르려고 했다. 내 폰은 화면의 절반이 보라색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름궁전에서 특이한 꽃을 찍고 있는 중국인 옆에서 나도 사진을 찍다가 떨어뜨렸었다. 떨어뜨린 당시에는 괜찮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있었다. 화면 절반은 터치가 되지 않아서 패턴을 입력할 수 없었다. 다행이도 지문으로 잠금을 풀 수 있었지만 거기가 한계였다. 절반의 화면으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다. 그랩으로 차를 부르는걸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할 생각으로 식사를 얻어먹었던 호스텔로 올라가는 길에 택시를 마주쳤다. 아주 비를 많이 맞기 전에 택시를 탈 수 있었던건 행운이었을까? 지독하게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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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기 1. 호치민에서의 첫날
베트남 여행기 2. 아기자기한 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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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산티아고 여행 중 들고 갔던 우비를 한번도 안 입고 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래도 여행의 가장 완벽한 준비는 가벼운 짐인 것 같아요.^^

음 반만 나오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없네요.ㅜㅜ

폰이 망가졌으니 난감하셨겠네요. 요즘은 폰으로 길찾고 예약하고 사진찍고 등등 많은 부분을 폰에 의지하는데 그래서 사진이 없으신가 보군요.

그러고보니 사진이 전혀 없군요 ㅎㅎ

네. 그래서 사진이 없어요. 길을 찾기가 불편해서 나침반이라도 갖고 싶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작동 안하는 장난감 나침반은 많이 봤는데, 진짜 나침반 본지가 언젠지..

반가운 마음에 글도 못 읽고 댓글부터 답니다. 돌아오셨군요! 너무나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중간에 한번씩 소식을 전했으면 좋았을텐데 폰이 고장나서... 잘 지내셨죠?

킴리님 오래간만에 이시네요
잘 계시지요~~??!

네. 일단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운수도 계획없이 찾아오나 봅니다. 고장난 핸드폰덕?에 사진이 없지만 그래서 더 글에 집중할 수 있게되네요.

문제는 사진과 세트로 해놓은 메모들도 사라졌다는거죠. 꼭 사진을 포스팅하지 않더라도, 사진이랑 메모를 같이 보고 기억을 살려서 더 생생하게 쓸 수 있었을텐데요.

지금도 충분히 생생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김리님의 선 계속 따라가며 느껴보겠습니다.ㅎㅎㅎ

(렌즈.SD vs) 안구와 뇌의 승리에 배팅합니다.
You look so Vietnamese. ㅎㅎㅎ 전개가 훌륭한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폰이 망가져 여행중에 불편하시겠네요..ㅠㅠ
그래도 여행 잘 마무리 하시길...

베트남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이번 기행문을 읽으니 웬지 김리님께서 고프로 하나를 어깨에 장착하고 조근조근 배낭 여행을 설명해주시는 느낌이어서 너무 좋네요. 왠지 고독과 낭만이 동시에 느껴지는 여행이라 대단히 부럽습니다. 정말 남은 인생동안 평생 기억되실듯 합니다.

목소리에 자신이 있었으면 아마 글이 아니라 말로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포스팅에는 지도 하나만 올리구요.

더운 나라에서 비가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우기을 지나는 곳에서 우비를 입는 사람은 잘 없답니다 ㅎㅎ 여행중이시라 글을 전혀ㅜ안쓰시고 계신줄 알았는데 벌써 세번째 여행기군요. 오늘 글에서 가장 핫한 소식은 킴리님은 베트남사람 같이 생겼군요 ㅎㅎ 폰이 망가져서 앞으로 여행이 걱정입니다ㅜ

베트남 사람처럼 생긴게 어떤건지 모르겠어요. 아마 특별히 관광객 같은 차림이 아니고 면도도 안 한 모습이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보인게 아닌가 싶어요. 여행은 이미 다녀왔어요. 다녀와서 글을 쓰기 시작했죠.

고원지대라서 날씨가 선선했나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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