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3-3

in #kr-series2 years ago (edited)

일 얘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ㅎㅎㅎㅎㅎ 아마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 치매 증상은, 사건과 대략적인 시기는 기억나는데 정확한 시기는 가물가물하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한 시기였던 건 같은데 머리가 빨간 머리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빨간 머리였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어찌어찌 알게 된 2살 연하 여자애가 있었다. '희'라고 부르겠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머리를 굴리고 굴렸는데, 오늘 아침에 기억났다. 흠... 내 기억력은 역시 천재적이야. 희는 아래 아래 동네에 살았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비밀이다. 궁금하면 커피값 들고 오면 된다. 구디 역이다. 희는 오래 사귄 남친과 헤어져서 많이 힘들어하던 때였고, 너무 힘들어해서 친구들이 남자친구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 남자친구 후보는 나 포함 두 명이었다. 희가 그렇게 말했으니 사실이리라. 희는 두 남자와 썸을 타면서 누구와 사귈지 고민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내가 아닌 다른 한 명과 이어지게 밀어주고 있었다. 날 밀어주는 친구는 적었다.

희는 고2였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녔다. 난 방통고가 있다는 걸 희를 통해 처음 알았다. 희는 중학교 때까진 반에서 1, 2등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집안 사정상 먼저 상경한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오게 됐고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방통고에 갈 수밖에 없었다. 희의 말에 의하면 방통고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다닌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처럼 돈을 벌어야 해서 낮엔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학생과, 학교 다니다가 퇴학 직전에 자퇴를 했거나 퇴학 당했거나 놀다가 1, 2년 늦어진 날라리였다. 희는 범생이었기에 첨엔 가난한 애들과 어울렸다가 곧 날라리들과 어울리게 됐고, 그 어울림 속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가 차였다. 차인 이유는 그거를 거부해서였다고. 그거? 음... 궁금하면 커피값 들고 오시라니깐.

희는 낮엔 사무실 등에서 일을 했다. 간단한 사무직 업무를 하고 저녁에 학교를 갔다. 야간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정말 밤에 학교에 갔다. 매일은 아니고, 한 달에 한 주 정도 갔던 것 같다. 아니다, 일요일에만 갔나? 암튼 매일 가진 않았다. 방통고니까 보통은 방송으로 공부했고(뭐... 안 했겠지만...), 학교엔 가끔 갔다. 직장은 학교에서 구해줬다고 했다. 방통고의 경우 가난한 고등학생을 위해 취직까지 알선해주는 학교였다. 몸쓰는 노동이 아닌 일반 사무실을 알선해준다고 했다. 내가 늦게 끝났기 때문에 희를 만나는 시간은 밤 늦은 시간이거나 쉬는 날이었다. 퇴근하는 길에 한두 시간 보거나 주말, 주일에 보곤 했다. 만나면 그냥 걸으면서 얘기를 했다. 그 늦은 시간에 딱히 들어갈 곳도 없었고 희는 걸으며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희 친구들은 학교 안 다니는 애들도 많았고, 방통고 친구들도 있었다. 만나면 주로 밤새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놀았다. 지금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취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주로 자취방에서 놀았다. 희는 성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전남친과의 얘기와 어떻게 하다 헤어졌는지 등. 여긴 19금 사이트가 아니니까 희와 한 대화들을 올리기엔 그러니 궁금하면 커피값을 들고... ^^ 암튼. 그래선지 희는 성적인 것에 매우 민감했다. 희 친구들은 희 생일 전에 둘 중 누구와 사귈지 정하라며 희를 압박했다. 희가 많이 힘들어해서 그랬던 것 같다. 희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가 아닌 다른 그 남자후보와 사귀길 원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너무 착해 보여서. 아니, 착해 보일 뿐만 아니라 범생이었고 범생이로 살고 있어서였다. 그 남자후보는 범생이가 아니었나 보다. 희 친구들은 '너랑 범생이는 어울리지 않아.'였고 희는 두 남자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난 희와 희 친구들을 만나며 학교 안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배웠(?)다. 이때의 경험이 내 소설 쓰기에도 적잖이 영향을 줬다. 한 단골 심사위원 소설가가 이렇게 말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작가들이 책 한 권 내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유는 다양한 경험이 없어서다. 초대박 소설 하나는 쓸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이 적은 소설가는 좋은 소설 두 편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조용히 사라진다.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어느 소설가는 일부러 노숙자 생활을 했다. 노숙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싶어서다. 어느 소설가는 전국을 방랑했다. 방랑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경험이 적다면 일부러라도 경험을 해야 소설이 나온다.'라고. 그런 면에서 난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이 큰 재산이 됐다.

썸을 오래 타진 않았다. 두 달쯤? 희 생일은 가까워 오고 있었고 희는 친구들의 등에 떠밀려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지만, 사실상 친구들이 밀어주는 그 남자후보와 사귀게 될 운명이었다. 그날도 일 끝나고 밤늦게 만났다. 우린 평소대로 동네를 크게 돌며 여러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한 바퀴 다 돌았을 때쯤 희가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왜 착해?"

"응?"

"난 오빠가 더 좋은데 아무래도 오빠랑은 사귈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썸은 끝났다. 그 후로 희는 몇 번 연락을 해왔고 우린 몇 번 통화를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가끔 '나 어디 전철역인데 일로 와줘.'라고 하면 가긴 했다.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희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너무 싱거운가? 흠... 중간에 많이 빠진 내용은 커피값을 들고... 쿨럭... 구디역으로... 쿨럭... 희와의 경험 그리고 앞으로 더 할 몇 경험은,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과 만난다는 걸 알게 했다. 그리고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교훈들 때문이었는지, 한 번은 강남 부잣집 딸과 썸을 타다가 끝난 적이 있는데, 만나기 좀 그래서 끝내기도 했다. 아빠는 교수고 엄마는 부동산 재벌이라고 해서 더 만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얼굴이 연예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여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얘를 만나기 싫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미친놈이라고 한 건 비밀이다.

1층 주방으로 옮긴 후에도 친구들과 자주 만나 술 퍼마시고 사회를 비판하며 보냈다. 친구들 중에 공부를 제법 한 나였기에 친구들은 술만 퍼마시면 더러운 세상이라고 날 위로(?)했다. 공부 잘하는 놈은 등록금이 없어 식당에서 일하고, 공부 잘 하지도 못하는 자기는 좋은 부모 만나서 대학생이라고 늘 같은 레퍼토리를 읊어대는 친구놈도 있었다. 자꾸 듣다 보니 정말 세상이 더러워 보였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 이 더러운 세상 확 불이나 질러버릴까... 뭐 이런 헛소리를 해대며 술을 퍼마시다 쓰러졌다. ㅋㅋㅋ 얼마나 퍼마셨으면... ㅋㅋㅋ

술병이 나서 골골대다가 겨우 회복한 날이었다. 새로 온 카운터가 나랑 동갑이라며 친한 척을 했다. 내 소설 '사랑은 냉면처럼'에서 4명의 주인공 중 한 명(지은)이 카운터였고, '또또통'에서 현정이가 카운터였던 건 이 친구와의 경험이 초큼 녹아 있다. 냉면처럼에서 수지가 틈만 나면 카운터 앞에 와서는 나와 수다를 떨고 놀았던 것처럼 틈만 나면 내게 말을 걸었고, 툭하면 인터폰으로 내게 전화해서는 수다를 떨었다. 흠... 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더라도 서운해하진 말기를. 내가 치매라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호칭이 필요하니까 음... '백'이라고 부르자. 한번은 백이 이렇게 물었다.

"혹시 여자한테 꽃 선물 받아본 적 있어?"

"응. 한 번."

"그래? 어떤 꽃이었는데?"

"장미 한 송이. 헤어스프레이 뿌려서 거꾸로 걸어두면 오래간다고 해서 걸어놨지. 정말 오래가더라."

아,,, ㅋㅋㅋㅋㅋ 이런... 쓰다 보니 생각났다. 2장에 등장했던 엠. 엠이 하루는 내게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했다가 헷갈리겠지만, 나보다 기억력이 좋은 독자님들을 믿는다. 안 헷갈릴 것이라고.

"오빠, 이거."

"웬 장미야?"

"오빠한테 주는 선물이야."

"나한테? 와~~ 나 꽃 선물 처음이야."

남중 남고를 다녔고, 만난 여자는 현희와 엠이 전부였으니 어떤 선물이든 처음이지만, 암튼.

"이거 오빠 방에 걸어놔. 헤어스프레이 뿌려서 거꾸로 걸어두면 오래간다."

"고마워. 남자인 내가 선물해야 하는데, 미안해."

"아니야. 내가 해주고 싶었어. 오빤 나중에 해줘."

그날 바로 헤어 스프레이를 뿌려서 거꾸로 걸어놨다. 그 꽃은 10년 넘게 걸어뒀다가, 나중에 서른 넘어서 버렸다. 버리기 전까지도 꽃은 처음 모양 그대로였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서. 아~~ 맞다. 그 전에 백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넌 백합을 닮았어."

"백합?"

"응. 하얀 꽃인데 엄청 예뻐. 내가 좋아하는 꽃이야."

"저기, 미안한데, 내가 백합을 몰라. 하하하."

"아,,, 그... 그래? 하얗고 예뻐. 너 같이."

그러고 얼마 후 내게 꽃 선물을 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밖에 나갔다 오더니 백합을 사왔다.

"자, 받아. 선물이야."

"어? 웬 꽃이야?"

"이게 백합이야. 예쁘지? 헤헤."

"와~~~ 정말 예쁘다."

"어때? 널 많이 닮았지?"

뭐 이쯤 읽은 독자라면,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당연히 예상할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난 백과 노래방도 다니고 차도 마시며 잼나게 놀았다. 아,,, 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노래방 다니고 차마시고 논 걸까. 이 소설은 아직도 도입부이고, 아직 등장해야 할 인물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았는데. 어떤 사람은 내게 바람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난 이런 말에 억울하다. 여자가 편해서 누나, 여사친, 아는 동생이 많긴 했어도 사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아~~ 썸 타다가 끝난 경우가 많아 바람둥이라고 오해 받았나? 그런데 주위에 여자가 많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난 여자가 편했다.

하루는 백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지? 너 정말 눈치 없다."

"어? 나를?"

난 벙벙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놀라줄 알았어. 너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나 멀리하기 없기다. 약속해."

"어, 그, 그래."

"치. 너 정말 내가 고백하기 전처럼 나한테 친구같이 대해야 해. 안 그래다만 봐. 아~~ 괜히 말했나."

난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난 백을 친구로만 생각해서였다.

"내가 왜 말했냐면, 그냥 나 혼자 좋아하기엔 억울해서. 말하고 나니까 시원하네. 너, 서빙하는 애 중에 '정' 알지?"

"정? 알지."

'정'은 고2였고 저녁 알바생이었다. 보통 알바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로 서빙을 했는데 정은 항상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도 매우 짧은 치마로. 작은 키에 말랐고 예뻤다. 약간 강아지 상이라 귀엽기까지 했다.

"너, 정이 왜 맨날 저렇게 짧은 치마 입고 일하는지 알아?"

"글쎄. 나야 모르지. 편해서? 글쎄, 얘기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니 시선 끌려는 거야. 너 좋아해. 잘 해봐."

"어? 정이? 날?"

난 전혀 몰랐다. 백이 얘기해주길, 백은 정이 날 좋아한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고 둘은 앙숙이 됐다고 했다. 그래서 일하는 내내 서로 신경전을 했고 싸우기도 했다나. 그러다가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고 내게 말했다. 어떻게 눈치챘는지도 말해줬다. 백이 나와 얘기할 때마다 정이 째려봤다나. 그리고 내게 꽃을 준 날이 결정적이었단다. 주문지를 백에게 줄 때 백을 째려보면서 휙 던지며 줬다나. 여자의 촉이란... 정말 대단해. 내가 눈치가 워낙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자의 촉은 위대하다는 걸 배웠다.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다. 그래서 별별 잡다한 지식이 많다. 궁금하면 공부했으니까. 난 궁금했다. 백의 말이 사실인지. 아,,, 어쩌지? 직접 물어볼까? 하다가 정에게 잠깐만 보자고 말하고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어,,, 안녕..."

"네? 네. 인사는 아까 했는데요."

"어? 그렇지. 아하하. 저기, 내가 좀 전에 백한테 들은 얘긴데, 혹시 나 좋아해?"

내 말에 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다음에 이어서...)


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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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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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핫,,, 잼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