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1-5
쓰다 보니 앞뒤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소설가이긴 하지만 기억력이 치매 수준이라 어쩔 수 없다. 쓰는 나야 그냥 아무말 대잔치처럼 쓰면 되지만 읽는 독자가 걱정된다. 마치 수다스러운 수다쟁이가 자기 할 말만 내뱉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독자는 나보다 기억력이 좋으니까 내가 뒤죽박죽 말해도 알아서 정리하며 들을 것 같다.
어느 날 보니까 새엄마가 없었다. 아빠는 가구공장이 힘들었는지 결핵에 걸리셨다. 동생은 일찍 알았지만 눈치가 제로에 가까운 난 중2 땐가 중3 땐가 알았다. 등교하기 위해 아빠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데 평소에 기침이 많던 아빠가 유독 심하게 기침을 하셨다. 한참의 기침 후에 아빠의 손수건에 묻은 피를 본 것이다. 그리고 가래와 침을 뱉으시는 아빠. 난 그냥 워낙 약골이라 감기가 오래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각혈이라니. 아빠는 입이 짧아 식사도 적게 하셨다. 그래서 몸무게가 40kg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다리가 아프다며 다리를 주무르라고 해서 보니 다리에도 뼈뿐이었다. 한여름에도 춥다고 내복을 입고 다니 정도로 약하셨다.
가구 공장에 일하면서 아프기도 많이 했고 사고도 많이 당하셨다. 오토바이로 출근하다가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고, 추운 겨울 불 옆에 있다가 신나에 옮겨붙은 불로 심한 화상을 입기도 하셨다. 그래선지 다시 직업을 바꾸셨다. 아빠의 새 직업은 경비원이었다. 청량리 롯데백화점 경비원. 이즈음이 아빠가 두 번째 새엄마를 만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직장이 다닌 적이 없던 아빠는 롯데백화점 직원이라는 이유로 신용카드도 나오고 4대 보험도 가입되는 등 여러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월급은 쥐꼬리였다. 정말 난 쥐꼬리가 그 정도로 작은지 몰랐다. 앞에서 언급했듯 새엄마와는 오래 가지 못했고 아빠는 새엄마와 헤어진 후 한 한방병원에서 경비원을 하셨다. 그 한방병원은 남대문 어디쯤 있었는데 내가 군대 입대하기 전에 다시 일을 그만두셨다. 이유는 임금 체불 때문이었는데 병원이 망하면서 임금이 체불됐던 것이다.
한방병원 앞엔 알루미늄 샤시로 만든 분식집이 있었는데, 아빠는 병원 경비원을 그만두면서 그 분식집을 맡으셨다. 하지만 그 분식집은 장사가 형편없었고 내가 군대에 간 다음엔 다시 직업을 바꾸셨다. 이번엔 호프집이었다. 동네에 있는 작은 호프집이었는데 지하에 있어서인지, 번화가가 아닌 주택가라선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동생은 팔아준다고 친구들을 데리고 몇 번 갔던 것 같은데, 난 휴가 나와서는 한 번 가본 게 전부였다. 나중엔 다시 권리금도 못 받고 호프집을 넘기셨는데,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 걸렸던 것. 미성년자인지 몰랐다고 하셨다. 영업정지에 벌금에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할머닌 장남인 아빠 걱정에 잠을 주무시지 못할 정도셨다. 장사 그만하고 어디 들어가라고 하셨고, 아빠는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아파트 경비원으로 다시 취직하셨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원은 쥐꼬리보다 더 작은 개미꼬리 월급이었고, 아무나 카드를 만들어주던 시기에 많은 카드를 만들어 쓰시다가, 카드대란이 터진 시기에 신용불량자가 되셨다. 난 카드사의 추심이 사람 피를 말릴 정도인지는 정말 몰랐다. 나중에 동생이 얘기해줘서야 알았다. 난 아빠에게 너무 무심한 아들이었다.
아빠는 삼성카드, 엘지카드, 국민카드 등을 쓰고 계셨고 그 당시 한참 유행했던 천만 원까지 인출이 가능한 어디 캐피탈도 갖고 계셨다. 난 어려서부터 아빠를 미워하며 자랐기에 빚에 허덕이는 아빠를 그냥 무시했다. 동생은 어떻게 해서든 아빠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아직 무직인 동생이 도와줄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일했던 첫 직장이 망하면서 나도 엘지카드를 연체한 적이 있었다. 와~~~ 하루에 20여 번 전화가 왔다. 정말 개새끼들이란 욕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아빠는 삼성카드와 엘지카드의 불법 추심에 피가 마르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동생을 통해서야 알았다.
"오빠, 아빠한테 관심 좀 가져. 삼성카드 담당자가 아빠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콩팥이라도 팔아서 돈 갚으라고 쌍욕을 하더래."
그 삼성카드 개새끼는 아빠에게 늘 반말로 말했다고 한다. 고모와 통화할 때도 반말로 찍찍대면서 쌍욕을 했고, 동생과 통화할 때도 반말이었다고 한다. 그 개새끼 이름은 어디 잘 적어뒀는데, 못 찾겠다.
난 군대를 제대하고 첫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난 임금이 체불중이었고 모아 놓은 돈도 별로 없을 때였다. 할머니는 장남인 나에게는 피해를 주지 말라고 아빠에게 경고하셨고 그래서 내겐 아무 말도 안 하셨던 것 같다.
삼성카드의 불법 추심은 뉴스로도 몇 번 나왔다. 수많은 사람이 삼성카드의 불법 추심에 자살을 했다. 삼성카드가 아빠에게 한 짓은 내가 지금까지 삼성을 불매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린 아빠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대환대출을 하기로 했고 동생이 연대보증을 섰다. 엘지카드는 할머니가 연대보증을 서면서 대환대출로 전환했다. 나는 지금도 주위 사람들에게 절대 기업카드는 쓰지 말라고 말한다. 아빠는 여러 카드를 사용했는데 삼성카드와 엘지카드만 하루에 수십번씩 전화하며 불법 추심을 했고 은행카드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아파트 경비원 월급으로는 대환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아파트 경비를 그만두고 고깃집 불판닦기로 취직을 하셨다. 난 그런 과정들을 보고만 있었다. 아빠에게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고, 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 못했다. 게다가 대환대출의 연대보증에서도 할머니의 주장으로 난 제외되었다.
아빠가 식당에서 불판을 닦은 지 한 달 쯤 됐을 때였다. 아침에 출근하려는 내게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빠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서 병원 좀 가라는데 안 가. 네가 '아빠 오늘 꼭 병원에 가세요.'라고 말해."
난 할머니의 말씀대로 출근하기 전에 아빠에게 오늘 꼭 병원에 가보라고 말하고는 출근했다. 회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는데 동생에게 서 전화가 왔다. 오늘 고모가 와서는 아빠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여러 검사를 받아보니 폐에 물이 차 있었고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뺐다고 했다. 아빠가 숨쉬기 힘들어해서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난 그날 퇴근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늦어서 그냥 집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에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진아, 큰일 났어. 아빠가 죽었어. 빨리 병원으로 와."
아빠가 죽다니. 아빠가 죽다니. 어떻게. 왜? 얼굴이 부었을 뿐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모가 장난치는 것 같았다. 난 일단 택시를 탔고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침대의 흰 천은 아빠를 얼굴까지 덮고 있었다. 내가 도착해서야 의사가 와서는 얼굴을 내게 보여줬다. 아빠는 아무 표정이 없었고 산소마스크를 그대로 하고 계셨다. 난 아빠의 몸에 손을 대봤다. 몸이 차가웠다. 그리고 딱딱했다. 난 아빠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 죄송해요.
가족들은 가장 늦게 도착해서 맨 나중에 울기 시작한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담당의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ㅇㅇ년 ㅇㅇ월 ㅇㅇ년 ㅇㅇ시 경 사망하셨습니다. 시간을 추정하는 이유는 새벽에 회진을 돌 때 이미 사망한 환자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인은 급성 패혈증입니다. 어제 폐에 찬 물을 뺀 후에 숨쉬기 힘들다고 환자가 말했고 산소호흡기를 해줬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서 산소호흡기만으로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같은 병실 환자분들 누구도 어떤 소리 듣지 못했다고 말해서 주무시다가 갑자기 패혈증이 왔고 그로 인한 쇼크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숨쉬기 힘든데 중환자실로 옮길 생각도 안 했는지, 쇼크가 올 때까지 의사와 간호사는 뭘 했는지. 이건 의료소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모는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편하게 보내드리자고 하셨고 가족들은 모두 고모의 의견에 동의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문객들에게 인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깟 돈이 뭐라고 아빠를 죽게 하다니. 겨우 40kg밖에 안 될 정도로 허약한 아빠를 불판 닦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겨우 3천만 원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 난 나에 대한 분노와 사회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장례식을 보냈다. 삼성카드의 경우 원금은 600인가 했고 이자를 합쳐 천만 원이었다. 엘지카드도 원금과 이자가 합쳐진 금액이 대략 천만 원. 기타 카드들 다 합치면 3천만 원 정도 하는 금액이었다. 난 내 직업도 저주했다. 내가 군대 제대하고 원래 하던 식당일을 했다면 3년 동안 충분히 모았을 금액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대하고 모은 동은 0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 직업이 저주스러웠다. 난 내 성격도 저주스러웠다. 아빠를 닮은 이 저주 같은 성격. 난 왜 아빠에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빠는 몸이 약하니 몸 쓰는 일하지 말라고, 내가 벌어서 갚겠다고 안 했을까. 그깟 3천만 원에 난 아빠의 죽음을 방관한 불효자였다.
비록 내 고등학교 등록금 한 번 내주지 않았고, 비록 날 수학여행도 보내주지 않았고, 비록 날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고, 비록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유전자를 제공한 것 외에 한 것이 없는 아빠라고 해도 난 불효자였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다. 영구차가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젠 더 흘릴 눈물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관에 불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선 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마 안으로 들어간 관을 보며 가족들은 통곡했고 가마 문이 닫히면서 우린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더 울 기운조차 없고 눈물도 바닥났을 때 가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관이 있던 자리엔 뼈만 남아 있었다.
장례위원은 뼈를 조심스럽게 모아 미리 준비한 납골함에 담아서 가져왔다. 사람 뼈는 불에 탔어도 하얬다. 우린 뼈를 갈지 않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담긴 뼈가 든 항아리는 곧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순서에 따라 배정받은 칸에 들어갔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빠의 뼈를 다시 갈아서 할아버지 뼈와 함께 수목장을 해줬다. 살아계셨을 때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할아버지와 아빠를 함께 장사하며 저세상에선 둘이 좀 친해지라고 말했던 할머니의 말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래서 아빠를 닮은 나도 미워했다. 난 할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많이 맞았고 괴롭힘을 당했고 미움을 당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아빠가 미워서 나를 미워했다는 것. 그리고 아빠를 미워하게 된 이유도 나중에야 알았다. 할아버지 나이 겨우 49살 때였다. 나는 학교도 안 간 꼬마였을 때였다. 아빠가 할아버지 생신 선물 사드린다고 같이 금은방에 갔다고 한다. 거기서 반지(였나?)를 하고 나왔는데, 할아버지는 장남이 사준 생일선물이라며 매우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금은방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쓰러지셨다. 풍이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다신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 그래도 아빠보다는 오래 사셨다. 할아버지는 풍에 걸린 이유가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빠를 미워했고 아빠를 닮은 나를 미워하셨다.
아빠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은 아빠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하셨다. 남긴 물건은 오직 아빠의 앨범과 일기장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니고 있던 지갑은 동생이 보관하기로 했다. 나중엔 수목장하고 남은 납골함(아빠 뼈를 보관했던 함)도 동생이 가져갔다. 난 아빠가 없는 방에서 아빠 일기장들을 넘겨봤다. 내가 겨우 세 살 네 살이었을 때 쓴 일기들. '난 영진이가 장교가 됐으면 좋겠다. 영진인 착해서 아빠 말을 잘 들을 거니까 아빠 바람대로 장교가 되어줄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난 다시 울고 말았다. 전혀 착하지 않은 아들. 아빠 말을 듣지도 않은 아들. 아빠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아들. 아빠를 미워했던 아들. 난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냐고, 아빠는 왜 아빠 역할을 하나도 안 하냐고 미워만 했던 아들.
난 아빠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상속포기 서류를 직접 만들었다. 어디 맡기면 20만 원 정도 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난 20만 원은커녕 만원도 없는 거지였다. 그래서 직접 인터넷을 뒤져가며 상속 포기 서류를 만들었다. 문제는 연대보증인이었다. 우리나라 법은 채무자가 사망할 경우 채무자의 상속자가 빚을 상속하게 돼 있다. 현대판 노비문서라는 이 제도는 여러 기관에서 고치라고 하고 있지만 아빠가 돌아가셨을 당시부터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상속포기는 6촌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난 아빠를 기준으로 6촌까지 모두 서류를 만들어 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문제는 연대보증인이었다. 채무자가 사망할 경우 연대보증인이 빚을 갚아야 했다. 동생과 할머니. 할머니는 연세도 많고 재산도 없어서 갚을 능력도 없고 갚지 않아도 불이익도 없었지만 동생은 겨우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동생에게 지워진 빚은 해결해야 했다.
우선 삼성카드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새 담당자와 만났는데 고모와 나 그리고 동생이 함께 삼성카드로 찾아갔다. 난 새 담당자에게 그전 담당자 이름을 대며 이 사람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불법추심 당사자. 그러자 담당자는 그 사람은 성과가 좋아 승진을 해서 이 건물에 없다고 했다. 씨발. 개새끼들. 난 그날 이후로 삼성을 불매하기 시작했다. 불법 추심을 한 놈은 승승장구하고 당한 사람은 죽고. 이게 이 나라였다. 이 멋진 대한민국이었다. 불법을 저질러야 승승장구하는 미친 나라.
빚은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금액. 원금은 겨우 600인가 했었다. 이자 참 무섭네. 우린 이렇게 말했다.
"원금 600만 원을 지금 드릴 테니 끝내자."
담당자는 요즘 그렇게 많이들 한다고 당장 서류를 만들어 오겠다고 했다. 우린 그 자리에서 현금 600만 원을 주고 채무 관계를 끝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걸 왜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못했을까. 난 너무 후회스러웠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삼성카드의 불법추심에 힘들어하는 아빠에게 '내가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도 아빠 꿈은 지금까지 딱 한 번 꿨다. 아빠가 꿈에 나와서 난 아빠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사드리려고 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사드린 적 없는 밥. 하지만 아빠는 지갑을 보여주며 돈이 많다고 하셨다.
"나 돈 많다. 이것 봐라."
아빠의 지갑에 만 원짜리 지폐가 지갑이 터지도록 까득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옷도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도 매우 깔끔해 보였다.
"나 돈 많아서 밥도 잘 먹고 다니고 목욕탕도 매일 다닌다. 내 걱정하지 마라."
아... 너무 눈물이 많이 나와서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다음에 이어서...)
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1-1
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1-2
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1-3
기억 여행자의 낙서질 note 1-4
fur2002ks님이 naha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fur2002ks님의 1월 마지막 불금이네요! (뻘짓 진행사항)
글도 눈물도 많이 쏟아내시다보면
치유가 잘 되겠지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글쓰는 능력에 탄복합니다.
언제쯤 전 맛난 글 쓸수 있을지...
아핫,,, 저 잘 쓰지 못해요. 공모전마다 예선탈락. ㅎㅎㅎㅎㅎ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은 많이 써보면 늘더라고요. 그리고 많이 읽고요. ^^
돈이 없을수록 카드는 조심해서 잘쓰셔야되는대 .그런게 잘안되죠 한번 안풀리면 계속 잘않 풀리는게 참 속상하죠ㅠㅠ
이당시 카드대란이 나서 사람 많이 죽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