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그 시절 놓친 영화, 해피투게더. 1997년 作. 春光乍洩 '언뜻 비치는 봄 빛'

in #kr-pen6 years ago (edited)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짐작은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남자 주인공 둘이 침대에서 나뒹구는 장면이라니. 배가 고파 먹은 찐만두를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 해치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얹히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앞으로 가기 버튼이 있으니 말이다.

둘이 사랑한다는데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말리는 게 더 이상할 수도 있다.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을 향한 참견보다는 인정이 더 쉬울 때도 있다.


다시 시작하자는 쉬운 요구와 응답의 끝에 둘은 Happy togrther할 것인가.


왜 부에노스아이레스일까

이별과 시작을 반복하던 연인이 다시 시작하기로 한 장소가
왜 하필 멀고 먼 저 반대편의 땅이었을까.

빛을 보기 위해 다시 시작하기로 한 장소에서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새로 시작하는 연인이 아닌
이과수 폭포처럼 흘려보낼 인연이 되고 말았다.

무엇 하러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도 힘든 그곳이었을까.

둘 뿐이 아닌 홍콩이었다면
인연의 고리가 따로 엉켜 그렇게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둘 밖에 없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끌고 온 실연의 실타래가 그만큼 길어 다시 풀어 내기가 어렵다.


왜 동성애일까

다시 시작하자며 홍콩에서 아르헨티나로 떠나자고 한 건 보영이었다.
그에 말없이 순응한 건 아휘.
떠나려는 보영과 족쇄같이 패스포트로 묶어두는 아휘.

누가 보아도 보영은 남자 같고, 아휘는 여자 같다.
그러나 침대에서는 아휘가 보영의 뒤에 있었다.

이과수 폭포는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영과
그곳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아는 듯 폭포가 그려진 램프를 곁에 두는 아휘.

남과 여의 구도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아마도 두 주인공을 향한 감정의 이입이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았을까.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을 가지고 있는 둘 사이를 바라보는데도
우리는 남과 여의 역할로서 둘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아휘는 줄곧 여성스럽지만 때론 남성스럽고
보영은 줄곧 남성스럽지만 때론 여성스럽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정말로 남자는 다 그런 것일까.
윤종신의 '좋니'에서 민서의 '좋아'의 가사로 바뀌기까지는 얼마나 다를까.

보영이 아플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아휘.
아휘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외로워지니 똑같다더라.

정말 배와 항구의 속성을 남과 여로 구분 지어야만 하는 것일까.
만나고 헤어지는 연애의 감정을 남과 여는 정말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일까.
등대는 말없이 서로의 길을 비추어 준다.

나를 비추어 주지 않는다고 의심하지 말지어다.
나만 비추어 주라고 집착하지 말지어다.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존재
등대는 각자의 마음속에 늘 있어왔다.

줄곧 있어 눈치채지 못했을 뿐.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분명 개리는 이 영화를 본 것이 틀림없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과 여의
속성과 역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함이 없다.

정말로 그러한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는 어렵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라테의 더비를
관중석에 있음에도 보지 않는 아휘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더비보다
더 힘든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다시 시작하는 보영의 말이 치명적으로 다가온다는 아휘

힘들게 필드에서 싸워왔던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헤어지지 못한 채 떠나가지 못한 채 필드를 바라본다.

각자의 사정을 알리 없는 관중들은 모른다.
답답해 보이는 그들의 사정을.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라며 일갈하던 그가 떠오른다.
월드컵 16강 가즈아ㅏㅏㅏㅏㅏ!!!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왕가위도 홍상수처럼 대본을 미리 주지 않는다 한다.
즉흥적으로 짜인 각본에도 많은 의미를 넣을 수 있다는 건
단지 그들이 나보다 오래 살아서 일까.

왕가위 영화는 다시 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린 것들이 많다.
가끔씩 맞는 것들도 있다.
그들이 오래 살아서는 아닌 것 같다, 나와 맞는 꼭지가 다를 뿐.

중경삼림, 타락천사가 양조위가 아닌 장국영에게 먼저 갔다 한다.
다른 느낌이었겠지만, 중경삼림의 양조위는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

보영과 아휘가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끌고 온
꼬인 실타래를 풀어냈다면 Happy together했을까.

풀어 낸 인연의 끈을 다시 홍콩으로 돌려놓았다면
끌고 간 그 길이만큼이나 다시 더하게 꼬였을지도 모른다.

아휘가 우연히 만난 장(장첸)은 세상의 끝에 서있는 등대에
아휘의 슬픈 기억을 대신 두고 왔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슬픔을
언어 저 너머를 귀로 보던 장은 느낄 수 있었을까.

보영과 함께 가려던 이과수 폭포에서 아휘는 혼자였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스스로 끊지 못함을 아는 듯
거대한 폭포는 아휘의 슬픔을 대신 집어삼켜 버리는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함께 가자던 보영의 말이
틀렸음을 그때도 아휘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폭포를 맞이하는 지금
함께 풀지 못할 실연의 아픔이라면 다시 못 올 이곳, 세상의 끝에
아픔을 묻어두고 오는 것이 조금은 맞을 수도 있음을
그때와 다른 지금 느꼈을지도 모른다.


랴오닝 야시장에 갔다.
시장은 붐볐다.
장은 못 봤지만 가족은 만났다.
그가 자유로운 이유를 알았다.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그의 사진을 챙겨왔다.
언제 만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디가면 만나는지는 알 수 있다.


영화의 원제인 春光乍洩 '언뜻 비치는 봄 빛'을
조금 일찍 서로에게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영화의 주제가 The turtles가 부른 Happy together의 가사는
상대를 향해 집착을 부르짓고,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 같다.

필드 위에서 싸우는 그들을 향해 답답하다며
인정할 수 없는 참견을 던지고 싶지만
참견보다는 인정이 더 쉬울 때가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필드 위의 둘이 집착과 참견이 아닌 서로를 인정했다면
페어플레이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나란히 걷게 해주는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서있다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고 당연히 그 자리에 있겠거니 하며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뿐.

고마운 등대에게 잘하자, 언제 불을 꺼트릴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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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얘기네요.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ㅎ 좋은 글이네요. 다음에 또오겠습니다

이 영화는 봤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ㅜㅜ 90년후반에는 왜캐 좋은 영화가 몰려있는거죠? 그때 한참 1일 1영화 볼때이거든요 ㅋㅋㅋ

90년대에는 영화를 잘 안봐서 이제서야 스팀잇 덕분에 찾아보는 것 같아요. ㅎㅎㅎ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제 시각은 영화 개봉때쯤의 시기와 지금과는 달라졌어요.. 성 정체성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런 쪽으로..

그렇죠. 둘이 사란한다는데 인정은 못해도 참견은 하지 말아야죠. 사랑은 다 아름다우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플필은 언제 바꾸셨나요.

url로 존재하던 제 프사가 친구의 싸이 사진첩 접히기로 폭파되어 한동안 투명인간이 돼버렸어요. ㅋㅋㅋ
그래서 이번엔 저장. 7년 사진이니 지금과 달라 안성맞춤입니다. ㅎㅎㅎ

언듯 비치는 봄 빛...
원제가 예쁘네요 몰랐었는데...영화도 아직....못봤는데...ㅋㅋ

원제가 더 의미있고 좋은 것 같아요. ㅎㅎㅎ여태까지 본 왕가위 감독 영화는 실망한 게 없으니 한번 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련한 영화네요. 개봉 당시에 참 센세이셔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의 장국영도 참 그립네요.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제목은 들어본 것 같아요, 감독도 두 배우도. 나중에 더 찾아봐야겠어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 것 같지만 전 다음 주에 홍콩을 더 가므로..... 아 가기 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맞아요, 모든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

멀리까지가서 홍콩스러운 장소만 골라찍은 것 같아요.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는 처음보는데 이렇게 멋진 배우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고등학교 때였는지.. 참 오래 전의 영화인데(엇, 그 때는 보면 안 됐었나..)
덕분에 머리 속에 영화와 노래가 함께 흘러가는 느낌이에요.

영화 마지막의 그 노래를 듣기 위해 양조위가 탄 모노레일을 타고 같이 달려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세월 지나 다시 봐도 다른 느낌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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