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날|| #24 잘 알지도 못하면서

in #kr-essa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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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조사 때문에 헌책 하나를 구입한 적 있다. 대중적인 책이 아니어서 오랜 시간 수소문 끝에 구한 책이었다. 책은 헌책답게 많이 낡아 있었다. 손을 많이 탄 것 같진 않지만 빛바랜 흔적이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표지를 넘기자 짤막한 편지가 적혀있었다.

매형께 드립니다.
2004년 8월
저자 드림


의아했다. 나는 분명 이 책을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그렇다는 건 이 책을 팔았다는 것인데 어찌 선물 받은 책을 팔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저자인 처남이 매형에게 직접 선물한 책을.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한낱 책 한 권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선물한 이의 마음까지 버려진 것 같아 내가 다 서운했다.

예전에도 도올 김용옥 선생이 H국회의원에게 선물한 책이 헌책방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그때도 난 굉장히 분개했다. 자신에게 보낸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국정의 대소사를 논하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 엄마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흉을 보기 시작했다.

 “엄마, 진짜 너무하지 않아? 어떻게 선물한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길 수가 있지? 그것도 저자가 처남인데. 아마 인간이 덜 된 사람일 거야. 그치?”

난 엄마의 동의를 구했다. 평소 예의를 중요시하는 엄마라면 분명 내게 동의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돌아가셨나 보지.”

누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 친 것 같았다. 안일하고 편협한 생각. 죽은 사람의 물건은 정리되는 게 맞는데 어찌 버렸다고만 생각했을까. 그들의 사정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



백수 시절 일이다.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서 급하게 B형 백혈구 헌혈이 필요하다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난 글 마지막에 적힌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게시판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B형이고 남자입니다.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잠시 후 답신이 왔다. 연락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검사받은 뒤 적합 판정이 나면 두어 번 더 병원에 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곧바로 답문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급하면 지금이라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회신은 다음 날이 돼서야 받을 수 있었다.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급한 상황은 피했습니다. 혹시 다음 주라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급한 상황은 피했다는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날 연락되지 않아 가슴 한편 서운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네. 다음 주라도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다음 연락은 5일이 지나서 왔다. 통화 가능할 때 전화 달라는 문자였다. 전화를 걸자 젊은 여자가 받았다. 다음날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나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열었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을 검색하고 나서 깨달았다. 세브란스 병원이 강남과 신촌,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물론 난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일단 집에서 나왔다.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병원은 가는 동안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도록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서울로 가는 버스는 3대가 지나갔고 돕고 싶었던 마음은 삽시간에 짜증으로 변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술이나 한잔할까?”

서울로 가는 버스 대신 동네 익숙한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며칠 뒤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으레 오는 스팸전화라 생각했지만 지역번호가 아닌 게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저번에 수혈 때문에 통화했던 사람인데요.”

수혈이라는 단어에 기억 저편 잊고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나의 성의가 무시됐던. 나는 그 일이 있던 날 한 잔 술과 함께 서운함도, 괘씸함도 모두 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래 마음 둘 일도 아니었다. 버스에 탔다면 헛걸음 했다는 생각에 마음에 담아뒀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빨리 연락되지 않아 오히려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연락받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부터 해왔다.

 “헛걸음 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받으니 한 번 더 기분이 풀어졌다. 옹졸하게도 이제야 너그러운 마음도 생겼다. 집에 환자가 있으니 정신없어 그럴 수도 있다며 없던 아량도 생겼다. 나의 성의가 무시당하지 않은 거 같아 우쭐하기도 했다. 그녀의 다음 말을 듣기 전 까지는.

 “그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연락을 미처 못 드렸어요.”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죄송합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한 사람의 죽음 앞에 고작 한다는 말이 죄송합니다라니.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미 백지였다. 그렇게 책을 읽고 또 읽었으면서 위로와 어울리는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는 일에 마주한 서른 살 짜리는 그저 사과만 했다. 무엇을 잘 못했는지도 모른 체.
그녀는 마지막으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난 결국 죄송하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리도 멋대로 생각했을까. 조금, 조금만 더 너그러웠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회한과 함께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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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봄날들||


#18 용기내어 꺼낸 말
#19 어른이 된다는 게
#20 안녕. 나의 작은 카페들아
#21 걱정이더라
#22 아빠가 오빠
#23 힘내라 서툰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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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아.. 하는 탄식을 몇번을 내뱉었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상황과 맥락은 달의 뒷편 같아서 미루어 짐작하기에 너무 멀리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알고 나면 이렇게 속절 없이 마음이 아프니.. 어쩌면 좋죠.
앞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할 땐 자주, 더 많이 멈칫거리게 될 것 같아요.

서운한 게 있고 아쉬운 게 생기면 이상하게도 타인보다는 항상 저 자신의 기분부터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상대의 상황이나 이유를 들어보지도 않고 기분부터 나빠하고..ㅠ

어린이 되면 좀 나아질 거 같았는데. 아직 어른이 덜 된 건지 아니면 제 그릇이 간장종지만한 건지 항상 실수투성이네요. ㅎㅎ

똑똑똑. 봄날 같은 초코님.
배작가입니다 :)

다름이 아니라 이 글을 <글 읽어주는 여자>에서 읽어도 될지, 허락을 구하고자 댓글을 남깁니다. 이 글을 몇번이나 다시 읽었고, 읽고나서도 한참을 많은 생각을 했었는데 읽고 또 읽어도 좋기만 합니다. <글 읽어주는 여자>를 통해서 다른 분들과도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렇게 허락을 구합니다.
승낙해 주신다면.. 5월을 여는 기쁜 소식이 될 듯 합니다. :)
(왠지 조금 오래 된 글에 댓글을 다니 귓속말을 하는 느낌이네요. 속닥속닥)

안녕하세요 배작가님. :)

부족한 제 글을 작가님이 읽어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일 거 같습니다. 작가님의 목소리로 재탄생하는 글들을 보며 내심 부러웠었거든요. :)
부디 마음 껏 사용해주세요.(속닥속닥) :D

아니 이렇게 스윗한 수락이라니... 감사합니다. 초코님.
우선 계획은 이번주 토요일 밤에 올릴 예정인데 혹시라도 변수가 생기면 다음주 토요일로 미뤄질 것 같아요. ;ㅅ; (마감이라든가, 마감이라든가, 마감이라든가 하는 불멸의 이유로요..)
혹시 늦춰지게 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D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기쁨의 내적댄스)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어찌 질투가 많으신지. 그런거 넣어두셔도 될텐데요.

이 댓글에 한표

이분 안 되겠네. 뜬금없이 사람을 막 디스하고...

디스라니요. 칭찬인데!! 프로이간질러였어...

안 됩니다. 질투는 나의 힘이거든요. 그러니 앞으로도 힘내주세요 질투님. :)

제가 쵸코님을 위해 로또라도 당첨되야겠군요!

저번 주에 로또 샀더니 3개 맞더군요. 전 이번 생은 틀린 거 같습니다. 힘내주세요. ㅋㅋ

말하지 않으면 전후사정을 알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해가 생기나 봅니다.
저도 너그러운 마음을 배우고 갑니다.^_^

아마 전후사정을 다 알면 그리 화날일도 없을 거 같단 생각도 들더라고요. 근데 가끔은 전후사정 다 알아도 화날 때도 있지만요. :)

그런 경우는 전후사정을 알아도 도를 지나친 경우겠죠?ㅎㅎ

아무래도 절대 이해 못 할 상황일서라 생각합니다. ㅎㅎ 그럴 땐 화내셔됩니다. ㅋㅋ

쵸코 님은 이름은 달달한데, 글이 항상 묵직하면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글을 남깁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good21님. :)

차분한 글귀인데도 담담하게 읽기힘드네요..
잘때 문득 떠올리며 생각날것같은 글이에요. .

예전에 있던 일이 문득 떠올라 적어 보게 되었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루님. :)

내 예상너머의 일이 벌어졌을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생각하곤했던거 같아요.. 여운이 남는 글이네요..!

제가 오해하고 있던 걸 생각하면 어찌나 부끄러워지던지. ㅠ 매번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다짐하는데 쉽지 않은 거 같아요. ㅠㅠ

너그러움... 요즘 제가 갖고 싶어라 하는 것이라죠 ㅎㅎㅎ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 잣대로 판단하는게 얼마나 그릇된건지 살면서 느끼는 경우가 많네요. 초코님 이번 일들로 너그러움이 한껏 충천되셨으리라 봅니다. ㅎ

이번에 있던 일은 아니라서 오랫동안 뉘우치고 반성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매번 후회하고 다시 반성하는 삶을 살고 있네요. ㅎㅎ

저는 그런적이 없었는지 곱씹어보게 되네요. 모르는 것에 대해 항상 단편만 보고 전부를 판단하려는 모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인 것 같습니다.

전 여태 매번 실수하고 반성하고 다시 실수하고 그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 같아요. 제 그릇이 그리 크지 못한가 봅니다. ㅎㅎ

그렇죠... 상대의 상황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속단해버리는것 같아요.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본다면 좋을텐데 말이죠.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생각하면 아마도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단하는 일은 아무래도 덜 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내가 남을, 남이 저를 잘알지도못하면서 곧잘 쉽게 판단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심적 여유가 될 때 상황과 상대를 헤아려보려는 태도를 가지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초코님처럼요 ^^

저도 잘 상대를 잘 이해를 못하는 거 같아요. ㅎㅎ 그래서 이 같은 실수를 하고 반성하면서도 또 실수를 저지르고는 하거든요. :)
아무래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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