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을 가져야 할 생명
열매 하나에서 얼마나 많은 씨앗이 나오는 것일까? 조심스레 나는 다른 열매를 하나 눌러서 눈 위로 그 속에 들어 있는 극히 작은 씨앗들을 퍼뜨려 분산 시킨다. 세어보니 그 수가 350개가 된다. 내가 주워든 방울 열매의 나무에는 가지 하나에 열매가 평균 115개 달려 있고 중간 크기의 이 나무에는 그런 가지가 60개가 있다. 직경이 15센티미터인 회색 자작나무에는 약 241만 5,000개의 씨앗이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 이미 그만큼에 해당하는 씨앗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떨어졌다. 나무에는 아직까지도 떨어진 열매의 줄기나 중앙의 심이 붙어 있어서 가늠해볼 수 있다. 일년 동안에만 거의 5백만 개의 배아를 생산하고 20년 정도 생산했다고 치면 이 작은 나무는 1억 개라는 믿기 어려운 양의 배아를 생산한 것이된다. 배아는 전부 혹은 거의 전부 같은 크기이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이 1억 개 중에 단 한 개의 배아만이 자라서 성숙하고 재생산이 가능한 나무가 된다. 자신을 대신할 나무를 만들어낸다고 가정하면 말이다. 가능성과 실상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배아 한 개를 놓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기는 어렵다. 배아 한 개의 상대적인 가치는 99,999,999개의 배아가 죽어야만 성체가 되는 자작나무라는 식물의 가치에 비하면 아주 낮다. 한편으로는 이런 성숙한 개체를 생산해내는 진화의 복잡한 특징을 보노라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자연은 불필요한 것들은 혐오하지만 때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생산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베른트 하인리히, 홀로 숲으로 가다
엄청난 수의 정자가 경쟁 속에서 한 개의 난자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생명이 잉태된다는 사실 외에 인간의 경우 성적 쾌락만을 위한 섹스까지 고려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로서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한 생명의 탄생이 거대한 바다에서 눈먼 거북이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다 마침 떠다니던 구멍 뚫린 널빤지에 머리가 끼여 오르는 것과 같다는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처럼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은 가질 필요 없다.
서첩(書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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