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도 위태로운, 스페인 그라나다

in #tripsteem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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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은 새의 날개 같아”

그라나다 시내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한 나무의 잎을 찍으며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듯 말했다.

‘어 정말, 그렇다, 되게 멋있다.’

라고 말해준 S와 달리 H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10년 전 와봤던 그라나다에 다시 온건 온전히,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4년째 살고 있는 친구 S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회사를 관두고 여행을 준비하는 H에게 같이 스페인에 가자고 제안한 건, 연인으로서의 단순한 배려였다. 그랬기에 유럽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H의 말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오랜만에 보는 S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연 H의 변심으로, 스페인은 우리의 세 번째 여행이자, 두 번째 해외여행이 되었다.

2년 차 커플이었다. 엄청나게 열렬하지 않지만, 심드렁한 관계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계적인 데이트에서도 어쨌든 우리의 심장은 늘 쿵쾅거렸고 볼은 붉었으니. 다만 그런 신체적인 반응은 서로로 인해서보다는 술의 힘이 더 컸을 것이다.

우리는 술을 좋아했고, 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스페인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거침없이 술을 마시며 스페인의 밤거리를 누볐다. 낮에는 뭘 하든 상관없었다. 술을 시키면 매번 다르게 나오는 타파스가 신기해서 우리는 무슨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다음은? 다음은? 다음은? 다음 스테이지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술을 시켰다. S가 데려간 모든 술집은 정말 맛있는 술과 타파스를 계속 내왔고, 나는 정말 그라나다에 살고 싶다는 말을 백 번은 넘게 했다.

하루는 스페인에서 영어 강의와 함께 가이드도 겸하고 있는 S가 우리를 위해 알바이신 투어를 계획했다. 해지기 전에 만나기로 하고 나와 H는 알함브라 궁전을 거닐었다. H의 사소한 농담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우리는 대차게 싸웠다. 다시 안 볼 것처럼 굴고 오래지 않아 화해했지만, S의 알바이신 투어를 받는 내내 우리는 조용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투어를 몇 년 했는데 이렇게 반응이 없는 사람들은 처음이야.”

10년 전에도 아름다웠던 알바이신 언덕의 전경은 여전했다. 맥주를 한 캔 마시며 해지는 모습을 배경으로 온갖 멋진 체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S는 요리조리 골목길을 헤쳐가며 야경이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우리에게 소개했고 그제야 우리는 여행자다운 감탄을 조금 해댔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온 친구를 위해 S는 근교 바다로 1박 2일의 여행도 준비했다. S의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간 곳은 <Cabo de gata 가보데가타>라는 바다였다.

나와 H는 둘이 동네 산책을 나섰다. 작은 해안도시인 가보데가타는 굉장히 조용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에 우리의 머리는 금방 엉망진창이 되었다. 망나니처럼 머리칼이 흐트러진 모습을 서로 카메라에 연신 담아대며 깔깔 웃어댔다. 웃음은 거센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그리고 널리 퍼져만 갔다.

완전히 어둠이 오기까지 걷던 우리는 작은 바를 하나 발견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마음으로 펍으로 향했다. 맥주 한잔 씩 마시고 앞니가 빠진 할아버지가 사는 맥주 한잔을 얻어 마셨다. 스페인어로 계속 말을 거는 할아버지의 앞니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며 쉭쉭 소리를 냈다. 귀여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다 같이 모인 우리는 밤늦도록 각종 게임을 하며 술을 마셨다. 다양한 게임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 세상에서 제일 가는 포테이토칩”이라는 노래를 순차적으로 한 음씩 높여 부르며 웃지 않는 게임이 그 중 제일 재밌었다. S의 남자친구가 영국인인 관계로 우리는 이 게임을 “클레오파트라 베스트 포테이토칩 인 더 월드”라고 영어로 바꿔 불렀고 쓸데없이 진지한 이 게임이 너무 웃겨서 술을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웃다가 만취한 채 하루가 끝났다. 다음 날 근처 관광지를 조금 둘러보고 나와 H는 마드리드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우리는 여행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었다. 영어 메뉴를 보고 대충시켰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기 비계로 만든 수프였는데 한 입 먹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느끼했다. 나는 새벽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H는 마드리드에 며칠 더 묵은 뒤 프라하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그래, 비행기 잘 타고 무사히 한국에 가고,”

아직 헤어지기까지 시간은 꽤 남아있었지만, H가 집에 무사히 가라는 얘기를 건네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나 역시도 같은 마음이었다. 곧 다시 만날 건데, 고작 3주 뒤면 볼 건데도 자꾸만 마음이 웅웅거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나 군대 갈 때 울어보고, 처음 울어.”

우리는 느끼한 비계 수프를 가운데에 두고 둘이 눈이 빨개지도록 울다가, 다시 웃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난 공항에서 H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너로 인해 자신의 세상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이번 여행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너라는 사람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20줄도 넘는 길이의 카톡은 살면서 받아 본 중 가장 길고 가장 낭만적이고 가장 감동적인 카톡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 우리는 헤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붙잡아둘 수 없는 여행지에서의 낭만적인 순간과 점차 균열이 가고 있는 관계에 대한 괴리감에 그렇게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에 흩뿌린 우리의 웃음이, 울음이, 취기가, 분노가, 사랑이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즐겁고도 위태로운, 스페인 그라나다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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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보다 연애 이야기가...ㅋㅋㅋ
달달 합니다~^^

달달씁쓸하게 버무려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트립스팀을 운영하는 @snackplus입니다. 새로 에디터를 개편했습니다. 혹시 사용하실때 불편한 기능 이나 오류가 없으셨는지 걱정이 되서 코멘트를 답니다. 혹시 오류가 있거나 필요한 기능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네! 스낵님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I upvoted your post.

Best regards,
@Council

Posted using https://Steeming.com condenser site.


술이 사람들 마음을 슬슬 데워주다가 몸까지 데우고 모두를 전염시키죠. 그속에 끼고 싶으면 술을 몸속으로 슬슬 스며들게해줘야죠. 경우에 따라서는 똥망! 술이 몸안에서 완전히 빠져 나아가기까지 지옥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후회만 남죠. 사람 마음이란게 술타기를 시작하면 감정의 파도타기가 술렁술렁되니 술에 몸탄듯 몸에 술탄듯, 절제가 힘들어지죠. 그래서 이제는 순간의 쾌락을 위해 희생해야하는 댓가가 두려워진 나이. 이래저래 모험도 아껴서 해야하니 씁쓸.

애주가 젠젠님께서 찡하게 술자시고 짠하게 추억을 남기셨나봅니다. ㅋㅋ

ps. 스페인의 한컷 한컷이 멋지내요.

쓰고 보니 술냄새가 너무 나는 글이 되어 버렸어요..애주가의 숙명이겠죠. 피터님도 곧 저 풍경보다 더 멋진 스페인을 마주하실테니! 그 여행기 미리 기대하고 있을게요 :)

스페인 해안가따라가는 여행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구요 ㅠㅠ 전 코스가 꼬여서 포기한 스페인인데...이렇게 보니 못간게 아쉽네요

오! 스페인 해안 여행은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이 때는 시간이 없어서 마드리드, 그라나다 밖에 못가봤거든요.

스페인 바다 , 하늘이 너무 멋지네요.
알바이신 언덕에서 바라본 야경도 멋지구요.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이셨을거 같아요. 다 추억이니까요

저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와인 쩐내가 나는 듯해요.
아름다운 풍경과 재밌는 추억 뒤로 와인의 시큼한 냄새가 화악~

@zenzen25, I gave you a vote!
If you follow me, I will also follow you in return!

이별여행인 셈이였네요. 서로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했으니 성공한 연애였던것 같습니다 :)

즐거운 여행이었고, 보통의 연애였던 것 같아요 :)

한편의 멋진 소설을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감정이 이입되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술을 시키면 안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죠 ㅎㅎㅎ 세비야도 그렇지만 ㅎㅎ

멋진 여행기 감사합니다.

10년 전에는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 등을 여행하면서도 그걸 몰랐어요. 이번에 타파스 덕분에 얼마나 행복하든지요!

아아 스페인 다시 가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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