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자 (위즈덤 레이스 두번째 Round의 예고편)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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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자꾸 아시아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는 이제 없는 80년대, 90년대스러운 감성이 아직 남아 있어 그런지 뭔가 뻔하지만 가슴 따뜻하고, 식상하지만 애잔하고 그렇다. 뭘 봤더라? 주동우가 나오는 <먼 훗날 우리>, <소년시절의 너>, <안녕 나의 소울 메이트>는 기본으로 봐주고, 마법사의 뮤즈 계륜미 주연의 '말할 수 없는 비밀'(아, 이건 이바닥 고전이자 마법사의 인생영화), '여친남친' 그리고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시작하는 일본 영화의 라인업은 따로 하고.. 그런데 이 영화는 언제 보았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화를 두 번 보는 일이 없는데 넷플릭스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 진부한 스토리의 영화를 두 번이나 보다니. 백혈병 걸린 소녀와 소년의 사랑이야기. 이 뻔하디뻔한 클리셰 덩어리의 영화를 보며 그리운 마음이 드는 건. 그것, 사랑과 우정이 어느새 그런 것이 되어서일 거다.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저 두 가지의 이야기일 텐데. 저 문장만 봐도 더 보고 싶어지지 않게 되는 건 왜일까?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이야말로 진부하기 짝이 없고 클리셰 그 자체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거르는 일이 없지만, 사랑과 우정, 그것은 너무도 걸러왔다. 그것 없이 생존이 가능한가?



이 영화가 시초였을까? 이 영화가 그러한 진부한 스토리의 시작이었을까 생각해보지만 이미 영화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고. 자신들도 그것의 아류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여주인공은 영화 속 학예회에서 줄리엣 배역에 선정되었다. 그녀가 심지어 나가사와 마사미라니, 전에는 몰랐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모든 사랑이야기의 아류다. 그래서 독창적인 무엇을 찾으려다가 사랑도 잃고 우정도 잃었다. 그 두 가지를 빼면 인생에 무엇이 남을까? 새로운 무엇을 하려다 보니 모두가 솔로를 외치고 나 혼자 살기 시작하게 된 걸까? 그게 좋은가?



인류는 사랑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것을 모두 열렬히 원하는 듯 말하지만, 그것이 내미는 청구서에는 고개를 돌리고 '그럴 돈이 있으면, 그럴 정신이 있으면'을 되뇌인다. 그것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원치 않는 임신, 불편한 부가관계, 예상을 넘어서는 지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소모.. 그런 이유들이 자꾸 불어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그런 모든 걸 한 방에 날려 버리는 그것이 우정이라는 걸. 한 손에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그러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청구서들 따위에 망설이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우정도 아닌 것이다. 그들은 거래를 했을 뿐이다. 그러니 균형이 맞지 않는다며, 지출과 대가가 과다하다며 관계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청구서를 불태우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왜 우주는 인류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가고 있는 걸까? 인류는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핵가족주의에 빠져들고 대가로 사랑과 우정을 반납해 버렸다. 생존이 꿈 그 자체이던 시절에 사랑과 우정은 생존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몸과 마음을 희생했고 그것은 오히려 생존을 보장했다. 집단으로서의 인류, 대가족으로서의 인류는 억압 작렬이었을 지언정, 사랑과 우정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가 집단의 중심에서 외친 건 자유. 개인의 자유를 선언하며 자본주의의 소비노예로 스스로 전락시킨 인류의 다음 선택은, 사랑과 우정을 내어주는 대신 홀로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치가 있는가? 사랑과 우정을 내어주고 대궐 같은 집(몇 명만. 대부분은 마당은커녕 거실도 없는 원룸)에서 혼자 늙어가는 것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아니 이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존립의 문제이다. 인류는 이 존립의 기로에서 기꺼이 그것을 내어주고 핵가족 사회의 파편화된 개인으로 남기를 선언한 지 이미 오래이다.



핵가족은 가족인가? 그럴 리가. 우리는 4명도, 3명도, 심지어 사랑한다며 서로의 인생을 건 두 사람 사이에서도 친밀함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그럴 바에 혼자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1인 가족? 그런 게 말이 되는가. 1인 집단? 1인 사회? 1인 공동체? 말장난 하지 말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인류의 진화 방향은 틀려먹은 것일까? 인류는 생존 욕구에서 인정욕구로 넘어가는 길에 너무 큰 것을 대가로 지불했다. 사랑과 우정의 연대를 기반으로 인정욕구를 충족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사랑과 우정의 대상을 경쟁의 상대로 삼았다. 형제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연인도, 부부도, 심지어 부모자식의 관계에서도 인정투쟁의 상대편을 기어이 찾아내어 서로 골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나버렸다. 아니다. 인류는 원래 그렇지 않았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형제의 우애, 친구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목숨도 걸고, 명예도 걸고, 재산도 걸었었다. 그러나 진화의 방향을 잘못 잡은 인류는 아군을 전부 적군으로, 웬수로 변환시켰다. 졌다. 인류는 진 거다. 자본주의의 전략에 홀랑 넘어가 버린 거다. 혁명, 인류를 가난에서 해방시켜주겠다던 산업 혁명에게서 배신을 당한 거다.



전략은 단순하다. 인정욕구의 충족 기준을 한없이 높여놓는 거다. 자아의 확장, 연대와 연합을 통한 자아의 확장 단계로 넘어가야 할 인류를, '끝없는 비교의식'과 '경쟁상대의 무차별 글로벌화'라는 인정욕구의 병목 지점으로 유인함으로써 정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병목에 몰린 인간들을 무한대기 시켜 놓은 채 빨대를 꽂고 스트레스 비용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정체 도로에서 뻥튀기 파는 노점상 마냥, 도로에 압정을 좌악 깔아놓고 마약 음료, 뻥튀기 안정제를 팔아대는 것이다. 아, 진화 전쟁에서 인류가 실패한 대목은 바로 여기다. 누구에게? 자연에게 인류는 졌다.



지친 인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사랑 거절, 관계 거절, 출산 거절, 모든 종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종족 보존의 욕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연은 승리했다. 인류는 종 보존의 욕구를 상실했다. 사랑과 우정을 거절하고 연대와 지지의 공동체를 경쟁상대로 돌림으로써, 자신들을 소멸되어야 할 멸종 리스트에 스스로 올려놓게 한 것이다. 누가? 자연의 질서가, 우주의 본능이.



그러니,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고? 웃기지 마라. 보존해야 할 것은 오히려 인류이다. 혁명을 한다더니 종 소멸의 단계에 단 몇 세대만에 들어선 인류의 어리석음에 모든 종들이 비웃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봉감독의 예언처럼 이미 설국열차에 올라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는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차갑게 얼어붙은 모두의 심장과 가슴을 부여안고, 저 몰아치는 인정욕구의 무한 한파를 견디어내며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티프리즈! 사랑과 우정의 가치를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인류가 남아있다면 그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은 바로 울룰루, 앨리스의 봄이다.



"울룰루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들이
소중히 모시는 신성한 장소래.
여기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한대."

"세상의 중심?"

"그래 ... 가보고 싶다."

"가자."

"뭐?"

"가자!"

_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中



어떻게 그곳에 갈까? 누가 그곳에 갈까? 생존과 인정의 욕구를 넘어선 진짜 자유인들만이 그곳에 갈 수 있다. 그들은 사랑과 우정이 없이는 굶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인정 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선언한 이들이다. 그들이 전 재산을 털다 못해 카드빚까지 내어가며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이름뿐인 지위와 허울 좋은 관계 따위 모두 때려치우고 진짜 꿈의 공동체를 이루어 그곳으로 떠난다. 역시 이 도전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하면 무슨 재미?



사랑과 우정이 아니면 세상의 중심에 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류가 인정욕구의 단계에 들어서며 포기해버린 사랑과 우정에, 천박한 인정욕구를 넘어설 가장 큰 힘이 남아있다. 그것은 지지와 연대이다. 서로의 꿈에 참여하고 그것을 현실로 이뤄내는 일 말이다. 그것이 천민자본주의에 유린당하지 않은 인류가 갔어야 할 진화의 방향이다. 완전한 개인으로서 자아의 신화를 위해 서로의 꿈에 참여하는 것. 생존전쟁과 인정투쟁의 각자도생이 아닌, 꿈의 공동체로서의 가족, 친구, 연인의 관계를 새롭게 맞아들이는 것. 그것, 그 방향성을 놓친 이들이 생존의 사막과 인정욕구의 바다 어디선가 조난당한 채 모래바람과 짠물을 끝도 없이 들이켜 대고 있다.





그래서 <위즈덤 레이스>의 두번째 Round그곳, 앨리스의 봄을 향해 있다. 그것은 과거로 가는 여행도, 미래로 가는 여행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중심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 그러니 너가 필요하다. 사랑과 우정이 아니고서는 이 여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꿈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제자리에서도 걷고 있으니까.



"돌아갈까?"

"못 가는 거야?"

"갈 수 있어. 다음에"

"그런 건 없어.
다음이란 건 나한테 없어.
아직 괜찮아 아직 괜찮다고.
살아있다고 난 아직 살아있어!"

_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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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보자. 모두 함께!







[위즈덤 레이스+Movie100] 003.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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