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유(6). 사유는 힘이다 上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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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유(6). 사유는 힘이다 上

생각이 비물질적이라고 했는데, 비물질적이라는 건 어떤 형태를 일컫는가? 사실 ‘비물질적이다’ 라는 상태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비물질적인 것은 힘, 즉, 운동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운동은 힘이 시간을 만나 얻은 산물일 뿐, 힘 그 자체이지는 않는데, 예컨대 중력은 질량이 그 자신을 향한 공간상의 굴곡을 낳고 이에 갇힌 다른 물질들을 운동케 하지만 그 ‘굴곡 자체’는 시간이 어떻든 변함없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 굴곡에 놓인 물질은 그 굴곡을 따라 질량을 가진 물체에게 당겨지기 시작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분명 시간이 흘러야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다고 하더라도 생각 그 자체의 존재가 부인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책에는 책의 분량만큼의 생각이 담겨있지만, 그건 ‘읽는다’는 운동에 의해서만 재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든 읽지 않든 책속에는 그만큼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읽지 않은(운동하지 않은)책이라도 그 속에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이 힘이라는 것엔 의문을 가질 사람이 많다. 힘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존재를 운동케 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중력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인다. 아무 물체나 허공에 던져버리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중력이다. 다른 힘들도 작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 방식이 명확하다. 하지만 ‘생각’은 작용하는 방식이 다른 힘들과는 조금 다르다. 지표면에 서서 우리가 눈높이에서 사과를 떨어뜨렸다고 하자. 먼저 중력이 작용하고, 마찰력 같은 것도 작용한다. 여하튼 이 사건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힘들로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이 떨어진 사과를 들어 올리겠다고 ‘생각’한 순간, 육체의 물질들이 미세한 전기 신호를 받고 움직여 사과를 들어올린다. 여기서 사과를 들어 올린 힘은 앞서 중력과 동일한 부류지만, 이 힘들이 ‘생각’의 지휘 아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다는 걸 주목해야한다. 즉, 생각은 물질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고, 적어도 한 단계 이상의 다른 힘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사유가 인간의 육체라는 단계를 빌어 무엇인가를 운동시킨 사건을, ‘힘의 비유’라고 하겠다. 그것은 분명 A라는 힘 그 자체가 아니라, A라는 물질적 작용을 위해 a라는 동등한 작용을 투입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힘의 비유’ 단계에서는 A라는 작용을 얻기 위해 그의 복제된 a가 필요하다. 그래서 힘의 비유 단계에서는 인력을 넘어서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그건 생각이 ‘힘이고 싶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생각이 힘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물질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다. 이것이 보통의 힘과 생각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가만히 땅에 떨어진 돌멩이도 보이지 않을 뿐 마주한 대지로부터, 지구로부터, 태양으로부터, 우주로부터의 무수한 힘의 투쟁을 겪고 있다. 하지만 생각은 물질에 영향을 미치거나 받지 않으면서 작용(최소한의 뇌작용을 제외한다면 말이다)하고 있다. 실로 육체가 죽음에 이르러 뇌 활동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생각은 외부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생각한다고 해서 주변 물질이 나의 생각에 의해 어떤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이 같은 ‘생각의 정적 운동성’은 그것이 운동하고자 할 때에만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어서 생각의 저장고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필요할 때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자연 힘과는 달리 ‘선택적인 운동’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생각의 또 한 가지 특이성이 드러난다. 생각은 정적 운동성을 갖기도 하지만 직접 물질에 작용하지 않으면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영감’은 그것이 발생한 주체 속에서만 운동성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품고 있는 어떤 생각들은 생각을 가능케 하는 기관만 있으면 다른 주체를 통해서도 발현되는데, ‘사과를 떨어뜨리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그 사과를 떨어뜨리는 행위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100m 떨어진 사과나무 앞에 서있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떨어뜨려’라고 말한다면, 나는 사과나무에 가지도 않고 사과가 떨어지는 사건을 만들게 된다. 이처럼 ‘생각’은 그것을 최초로 생각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물질(예컨대 사람)이 있다면, 그와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유의 운동 단계를 나는 ‘힘의 은유’라고 하겠다. 여기서 A라는 작용을 위해서 우리는 A의 복제격인 a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며, a대신 C가 들어와 이를 수행할 수 있다.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그건 이미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 그것들이 ‘인위적으로’ 화성 대지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하고 있다. 그런 사건들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전파를 이용해 탐사선에 ‘생각’을 전달해서 발생한 일이다. 물론 탐사선은 우리의 생각을 수행하는데 제약이 많기 때문에 그 모든 생각을 수행할 수는 없다. 탐사선이 화성 표면에 방명록을 쓸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생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도 있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난다. 심해에 무엇이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잠수함을 만들어 심해를 들여다봤다. 그러니까 생각의 힘은, 물질계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을 물질계에서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건 물질의 비물질화를 수행하는 것으로 그 단계가 높아질수록 ‘불가능’은 더 크게 와해되고, ‘생각에 의해 물질이 논파’되는 지경에 이른다.

최초의 물질이 기초적인 물리법칙을 바탕으로 운동하는 자연 힘 상태에 처해져있었다면, 물질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서 힘의 비유라는 제 2의 힘 상태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제 3의 상태인 ‘힘의 은유’단계까지로 작용하는데, 아직까지 이 힘의 은유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그것을 초래하는 힘의 근원, 인간의 육체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슈퍼컴퓨터라도 그것을 작동하기 위해 인간 손가락에 맞춰진 버튼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현재 인류는 힘의 2.5 단계 상태에 처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완전한 제 3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무인화’, 더 정확하게는 ‘무체화(無體化)’는 필연적이다.


<인간과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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