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유 (3). 생각의 본모습과 나의 본모습

in #dclick6 years ago (edited)

인간과 사유 (3). 생각의 본모습과 나의 본모습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에 속해있지 않은 내가 불현듯 이 세상에 나타나 작은 창문을 하나 얻어 물질계라는 현상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감각세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생각’이라는 매우 희소한 기회와 가치를 얻었기에 다른 물질들과 같은 선상에서 움직이며 의미를 찾지 못할 바에는 이것이나마 적극적으로 쓰면서 사는 게 낫다고 했다. 다만 여기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일에 흥미를 느낄지 안 느낄지는 순전히 개인에게 달려있다. 오직 순수한 생각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서, 개인이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제대로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우리 생각은 젖은 모래사장의 바닷물처럼 뇌라는 물질과 섞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므로 뇌가 전해주는 성질을 따른다. 예컨대 무서운 것을 보고 공포를 느끼는 건 생물 유전으로, 우리가 ‘공포 따윈 잊는다’라고 생각해도 그럴 수 없다. 혹은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물질계에서 보여주는 어떤 현상을 선호하는지 그것도 우리가 ‘나는 말하는 건 싫지만 오늘부터 많이 말할 테다’라고 생각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후자의 경우는 바뀔 수 있다고도 하는데, 그건 본래 내 안에 내재된 성질이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실은 내가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럴 기회를 만나지 못했거나, 말하지 않아야할 상황이 있거나, 말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경우 등 무수한 경우의 수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은 ‘자기 생각’이라는 것도 순수하게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닌, 어떤 선호가 반영되어있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은 무궁무진하지만 어떤 생각을 선호하는지는 또 저마다 처한 상황과 유전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아니, 그전에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생물로서 하게 되는 반응, 물질적 육체로서 하는 반응을 생각에서 분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을 자기 자신과 같다고 혼동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유난히 겁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겁이 많고 싶어서 겁이 많은가? 겁먹지 않아도 될 평안한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본질은 절로 드러나게 되지만, 물질계는 사유의 영역과는 달리 원하는 상태로 유지되지 않으므로 만약 그가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예컨대 그를 맹수와 한 방안에만 가둬놓게 된다면 그는 누가 봐도 겁쟁이로 보인다. 심지어 그 상황에선 자기 자신도 그 자신을 겁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실로 그가 한 일이라곤 놀라서 두려워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다. 사람, 육체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사유하기 위해서는 물질계에 놓인 육체와의 분리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또 그 분리를 위해서 우리 육체를 더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로 명명되는 어떤 육체에 창문이 하나뿐인 방을 빌리고 있는 신세다. 원치 않는 육체의 반응을 만나지 않으려면 내 육체를 잘 달래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서 ‘나’와 ‘나의 육체’는 평생 잠들지 않는 갓난아이와 함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이 육체가 만족한 상태를 추구하기도 해야 하는 것인데, 건강과 여유를 항상 지녀야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육체의 간섭을 받지 않는 온전한 생각에 이르렀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나’인지, 그 ‘생각’을 하는 게 좋은지 안 좋은지, ‘나의 생각 하는 일’로 남은여생을 살아갈지 말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각하기로 한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생각의 존재, 그리고 그게 ‘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그 생각이 어떤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가이다.

그러나 ‘나’의 완전한 사유로 나아가겠다고 하더라도,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건강과 여유 모두를 가져서 생각에만 몰두할 수 있는 이들은 몇 안 되는 부유한 자들뿐이므로, 비록 우리가 원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시간을 할애해서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물질을 얻어서 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생각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물질은 항상 내 육체가 만족할 정도로만 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물질을 구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이룬 내 육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속에 들어있는 ‘나’라는 존재가 생각을 마음껏 하게끔 사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할 때 가장 만족스러운가. 그 상태는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고민해야하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어떤 상황에 물질이 필요하다면, 욕심은 그걸 얻는데 까지만 필요하다. 사유가 만족하는 상황을 찾지 못하면 일을 해서 돈을 벌든,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든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그런 점에서 ‘자각한 인간’은 목적이 분명해서 비록 힘든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뿐 인생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닌데, 일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힘들게 일해서 받은 게 돈이므로, ‘아 힘들게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받기 위해서구나.’라고, 그래서 그 결과물에 가치를 높게 책정해서 자신의 힘듦 즉, 그것으로써 삶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돈으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살기위한 대가로 받은 무엇이든 치환해도 된다. 그러나 그 물질은 내 육체를 살리는 용도일 뿐이지, ‘나’를 살리는 용도가 아니어서 그걸 탐하기만 하면 결국은 더 큰 불만족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사유가 방해받지 않도록 육체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초탈하라고 하지만, 나는 육체의 요구를 끊기 위해 감각을 절멸시키라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창문인 감각을 닫는 행위로 캄캄한 방안에 갇히는 일이나 진배없으니까. 경우에 따라 생각이 큰 사람들은 그런 어두컴컴한 방안은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감각기관을 열어 더 많이 받아들이고 그 삶속에 쏟아지는 더 다양한 해석에서 기쁨을 누리는 게 진정 자유인이 행할만한 행동이라 여기고, 생각의 기능과 크기를 생각해봐도 그게 더 생각이 뛰어 놀기 좋은 환경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자는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별해선 안 된다. 일하고 사랑하고 여행 다니며 무수한 것들을 구경하는 일 모두. 다만 무가치한 것은 단지 살아 남기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는 것, 그것에만 무가치를 두면 된다.

정리하자면 ‘생각’으로 구성된 ‘나’라는 존재가 ‘생각하기’라는 근원적 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원하는 것’과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분리해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와 별 수 없이 연결된 육체가 계속해서 그 속에 잠재해있는 본능적인 생각을 꺼내지 않도록 육체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하는 활동들, 예컨대 노동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취해야하는 일이다. 다만 그 모든 활동들이 더 근본적인, 생각 그 자체인 ‘나’를 돕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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