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른의 정의(pen클럽 공모 응모작)

in #kr6 years ago (edited)

0. 어른의 정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뭘까. 내 생각에 그것은 회색의 공간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잘 살아남는 것이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 어느 한쪽 확실한 면 없이 적당히 뒤섞인 모순 속에서도 잘 견뎌내는 사람. ‘회색같은 도시’라는 표현은 콘크리트의 단면들을 그려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회색으로 물든 어른들’이 군집한 도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싫은 상황에 대하여, 싫은 사람에 대하여, 달리 함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부정의한 것이 숨 쉬고 있지만 별 수 없이 함께 살아야만 할 때, 그 비릿함을 견딜 수 있는 비위와 인내가 출중한 자들이 어른이 된다.

여기서 만약 싫은 것을 견딜 수 없다면,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살아갈 수 없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 대개 그런 경우 죽음을 택하거나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한 시점에서 더 이상 어떤 상황의 전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더는 ‘회색적 상황’을 겪어 볼 수 없다. 회색의 영역을 늘릴 수 없는 관계로 영원히 그 이상 어른이 되지 못한다. 미친 것 또한 정신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헌데 어른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살아남는 것이 가장 뛰어난 가치라면 어른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비굴함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면 꼭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어른이라는 속성에 이미 좋고 나쁨이 혼재하듯이 말이다.

때로 어른들 중에서도 ‘저게 어른인가?’ 의문이 드는 한심한 인간도 있다. 그러나 일단 나이가 든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잿빛의 순간들을 견뎌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어른들이 한심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훌륭하지 않은 탓이다. 훌륭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의 차이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으므로, 그 성질이 나이가 들어감에도 유지된다면 어떤 인간은 훌륭해지고, 어떤 인간은 비루해진다.

이러한 품성과 같은 요소들은 변하기도 하기에 결국 어른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다. 어른은 시간만 지나면 무조건 되는 것이지만, 훌륭한 인간은 시간이 지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어른이 되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고, 비천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나쁠 뿐인데,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니까.

어쨌거나 결국 살아가기로 한다면 우리는 별 수 없이 어른이 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행복과 같은 삶의 희열을 꿈꾸므로, 흰 영역을 좋아하지만, 삶이 진행될수록 번져오는 검은 영역을 목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로 살아가기로 하는 한, 우리 모두는 혼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어떤 어른이 되는 게 좋은가’ 선택하는 편이 낫다.

단지 더 오래 살기 위해 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와, 어떤 열망과 목표를 가지고 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의 차이는 크다. 이것이 결국 훌륭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을 가르는 차이가 된다. 훌륭하든 비천하든 인간은 모두 어른이 되지만, 훌륭한 어른은 생존 때문에 회색적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루고자하는 열망, 목표 등은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고, 시간을 만드는 일은 오래 사는 일이기 때문에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자유의지 없이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 단지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쾌락의 감각영역을 더 즐기기 위해-회색적인 상황을 견디는 자는 비탄에 빠져있거나 저열한 감정에 휩싸여 어떤 짓이든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똑같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어떤 인간은 고결해보이고, 어떤 인간은 더없이 추해보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들이 회색적 상황을 견디는 이유, 모순 속에서도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결정하게 된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 날마다 고통이 밀려오지만 나는 이를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결코 감각을 오래누리고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게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 산다. 제 명에 죽어도 완결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마무리 짓고 싶다. 그래서 적어도 비천한 어른으로 남지는 않길. 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어른으로 이끌어주길.


본 글은 @kimthewriter 님의 '제1회 pen클럽 공모전' 응모작 입니다.
글자수는 약 2150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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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이다.

예전에는 불교가 염세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즉 모든것은 변하기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른 이 지혜를 깨달으라는 뜻에서 어른인거 같습니다.

저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불교의 정신만큼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얻어갑니다.

글 참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저는 지금껏 '어른' 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아직 저는 '어른' 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정의하는 '어른' 은 '현명한 판단력' 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예요. 나이를 먹고, 술 마실 때 그 누구도 민증을 요구하지 않고, 사회생활 10년차 20년차가 된 사람도 '현명함' 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경민님이 생각하는 어른의 의미를 읽으면서 제가 그동안 매우 이상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왔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스스로가 naive 하게 느껴졌어요. 경민님의 어른에 대한 시선이 처음에는 냉소적이게 느껴졌는데, 생각할수록 '이게 진짜 사회고, 현실이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전.. 이미 어른이네요. 회색으로 물든 별 수 없는 어른. 아직까지는 훌륭한지 비천한지 여부를 가릴 순 없지만 :)

현명한 어른이라는 건 결국 훌륭한 어른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셀레님의 관점도 결국 틀린 것이 아니지요 :)

여행을 가있어서 이제야 답변을 남기는군요 :(

여행이라니 ! 어디 가셨나요오오오오 :D

속초를 기점으로 해서 강원도 일대를 유랑하고 왔답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셀레님에겐 소소하게 보일 수 있겠군요 ㅎㅎ

전 오히려 국내 여행을 잘 못가서 경민님의 강원도 일대 유랑기가 매우매우 부럽습니다 ㅠㅠㅠ 속초 맛집 투어는 하셨나요?! +_+ 제가 물회를 참 좋아하거든요 ㅎㅎ

속초... 맛집 참 많죠! ㅎㅎ 이번엔 청초수물회...라는 곳에 방문했는데 제 입맛에는 맞질 않았아요. 더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다음에 가보고 셀레님께 추천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

그러고보니 기왕 둘러보는 것, 맛집 탐방도 겸해서 여행기라도 써둘걸 그랬네요 :(

혹시 봉포머구리....? ㅎㅎㅎ 전 봉포머구리만 가봤어요 ! 전 물회를 워낙 좋아해서인지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경민님이 가볍게, 부담없이 써주시는 여행기는 어떤 글일지 궁금해져요 :D

엇, 알고 계시는군요 ㅎㅎ 듣자하니 속초에 유명한 물회집이 세군데 있는데 봉포가 으뜸이고 제가 갔던 곳이 세번째쯤 된다더군요. 차근차근 끝판왕을 깨보려구요 :) 지금 생각해보니 해안 도로에 있는 동해막국수도 괜찮았어요(추워서 벌벌 떨면서 먹었지만)

다음에 어디 여행다닐 일이 있으면 조각글이라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요 :)

내 생각에 그것은 회색의 공간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잘 살아남는 것이다.

글 시작부터 머리를 깨우는 글귀였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의 중간 회색, 그 회색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다른 수많은 총천연색의 사람들도 결국 회색과 검은색 그리고 흰색에 둘러쌓여

빛을 잃어가는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고로 살아가기로 하는 한, 우리 모두는 혼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어떤 어른이 되는 게 좋은가’ 선택하는 편이 낫다.

상당히 무서운 내용인것 같습니다. 혼탁을 피해갈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면 어른이 되는건 자명한 일이라고 서술하네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

영감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검은 영역의 세상을 보지못해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아야할 것이고, 기왕 살아야한다면 역시 '훌륭한 어른'이 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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