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복도에 걸린 詩의 반전

in #kr6 years ago (edited)

비오는 날.jpg

복도의 詩

복도를 지나다가 문득 벽에 걸린 시화를 봤는데,
내 마음에 쿵,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어떤 아이 길래, 이 꼬맹이는 어릴 때부터
이런 시 감각을 타고 났을까, 싶었다.


비오는 날

 김OO


하루 종일 비가 서 있고
하루 종일 나무가 서 있고
하루 종일 산이 서 있고
하루 종일 옥수수가 서 있고

하루 종일 우리 아빠 누워서 자네




그럼 평범한 시라고? 자세히 보라.
이 시는 이야기할 것이 너무도 많은 시다.
아이는 비오는 날의 풍경을 모든 것이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마지막 행에서,
모든 것이 서 있는 중에 누워 자는 아버지는,
외부 세계에서 서 있는 모든 것과 대비되면서
모든 자연과 맞먹는 무게를 지닌 존재로 부각된다.

또한 아버지는 비오는 날에 일하지 않고 자야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걸 우린 알 수 있지만,
시에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다.
설명되지 않은 사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시의 미덕이다.

비오는 날에 누워 자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를 읽는 이는 은근하게 풍기는 비애감에 젖는다.

외부의 '서 있는 것들'과 '누워 자는' 아버지는
대비되어 충돌하는 것 같지만, 묘하게도 어울린다.
자연은 그래야 하고, 일상의 아버지는 또 이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서 있는 것과 누워 자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융화한다.

‘서 있는 비’ 는 저학년들의 그림에서는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글로 비 오는 풍경을 표현할 때,
비가 내린다고 표현하지 서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첫 행부터 기막히다.

이미지들에 대한 표현은 참 아이다우면서도
기발하다. 서 있는 것들로 내세운 이미지들은,
나무, 산, 옥수수다.
나무의 갈색과 녹색, 산의 푸름,
옥수수의 노란색과 연둣빛 껍질은
그 원색적 특성으로 인해 비가 오는 풍경 때
더 도드라져 보인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푸른색의 공통 색을
갖고 있어서 서로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각기 가진 고유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만약 옥수수 대신, 붉은 계열의 꽃을 썼다면
나무, 산과 융화하지 못하고 튀었을 것이며
나무, 산과 차별성이 없는 녹색의 이미지만
차용했다면 밋밋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정말로 탁월하게도, ‘옥수수’를 썼다.

이 시에는 리듬, 자연에 대한 성찰, 일상의 비애,
조화로운 시어, 그리고 반전까지 다 들어있다.
이토록 간결하고 가벼운 시에 말이다.

반전

예전 학교 복도에 걸려 있던 시화를 보고 썼던 감상평이다.
이 시는 놀라운 반전을 숨겨두고 있었으니.
감상평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시를 쓴 사람이 김용택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때문에 이 글은 감성적인 시 감상에서
‘아동 표절’로 주제에 일대 전환이 일어날 뻔했다.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김용택’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시를
발견하고는, 마시고 있던 써니텐을 뿜을 뻔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시를 김용택 시인의 시로
알았다면 잔뜩 흥분한 상태로 이런 감상평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 녀석(혹은 고 녀석의 부모님)을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동시를 보는 안목이다.
어쨌거나 좋은 표절자가 되려면 좋은 안목을
지녀야 한다.

영감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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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쏠선생님께 긍정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드리고 싶습니다 :D

이거 정자왕만큼 좋은 거죠?ㅎㅎ

어머나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들이란

히히힠ㅋㅋㅋ

헛;;; 완전 빵터졌네요 ㅋ

네 빵터질 일이죠ㅋㅋ

한참 웃었습니다 ㅋㅋㅋ 센스가 대단하세욤 ㅋㅋㅋ

엇..ㅋㅋㅋㅋㅋㅋ 자연스러웠...
소울메이트님을 저희 스변협(스팀잇 변태 협회)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세상진지)

어 감사합니다..ㅎㅎ 감격스럽네요,, 의미있는 단체에 진지한 초대장을 보내주시고~! 전 아직 많이 부족해서 걱정이네요, 그 단체의 취지에 맞게 더 노력하겠습니다!ㅋㅋㅋ

어쩌면 끝까지 김용택 시인의 시인지 몰랐으면 더 좋았을 시네요.
시인이 누구였던...

참 시 좋네요.
전 이런 시가 좋습니다.
그래서 전 동시가 좋습니다.

네 시의 화자가 진짜 아이가 아니라서 서운한 마음은 같은 것 같네요ㅎ 울림이 있는 동시죠. ^^

Such pretty simple picture

앗,,, ㅎㅎㅎㅎㅎ
예전에,,, 아빠가 하루종일 소파에만 누워 있어서 소파와 아빠가 붙어버릴 것 같은 상상으로 쓴 동화를 읽은 적이 있어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하죠. ^^

하하. 소파와 아빠가 붙어버린다는 설정은 판타지라기보다 지극히 현실적인데요!^^

시를 딱 보고 든 생각은 너무 잘써서 부모님이 써줬구나 였는데, 더 나아갔군요ㅋㅋ

이 시는 아이보다 부모님이 쓰기 더 어려울 것 같은걸요ㅋㅋㅋ

그렇기도 하네요ㅋㅋㅋㅋ 시각적 표현이 너무 뛰어나서 정말 아이가??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ㅋㅋ

정말 아이가? 하다가, 베낀 거 알고는 정말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ㅎㅎ

우와 정말 잘 쓰는구나 하고 글을 봤는데 결국 김용택 시인의 글이었네요 반전입니다 완전요

네 역시 시인의 솜씨였어요. 시인 재목을 하나 발견했나싶었는데 조금 아쉽기도해요ㅎ

아빠는 쉬는 날 누워만 있다는 불만만큼은 아이의 것이 맞았기를 바래봅니다ㅎ

아이의 시각에서 본 걸 말한 것이기 때문에 불만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감정을 품을 수는 있겠네요. ㅎ

사실 저 묘사에 해당하는 아빠가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음 좋겠단게 정확하겠군요. 전 아무래도 표절은 이쁘게 못봐주겠어요. ㅎㅎ

네 좋게 봐주지 않으면 열을 낼 일이 넘 많아서요ㅋ 이 경우엔 그냥 아무도 모르고 넘어가주길 바랄텐데, 불러서 안목을 칭찬해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더 뜨끔해하겠죠ㅎㅎ

그렇네요
라고 동의하게 됩니다.
저는 봐도 이게 좋은 시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하다가 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하면서 깨닫게 되었네요...

읽고 감흥이 느껴지면 자신에게 좋은 시가 되는거죠ㅎㅎ

아마도 김용택 시인은 오랫동안 시골학교 선생님을 하셔서 아이들의 생각을 잘 읽으셨던거 같아요.

네 완전 아이들의 감성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어른들이 더 쓰기 어려운 시입니다ㅎ

김용택, 고녀석 ㅎㅎ

쏠메님, 써니텐을 뿜는 장면이 상상되네요.ㅎㅎ
작가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거나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살짝 들어가기 마련이니까요.

네 전혀 선입견 없이 작품만을 보고 감상하는 재미도 있지요. 마담님 말씀대로 시를 볼 때도 작가를 확인하지 않고 보는 것, 흥미로운 경험일 것 같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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