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소리

in kr •  10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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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릴 기세로 이글거리던 태양도 시간을 이기진 못 했다. 때를 기다리던 가을비가 무더위를 주춤한 틈을 타서 차분하게 내리고나니 열기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모기조차도 숨어지내던 열기에 더욱 신이 난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말매미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말매미 소리가 사라진 공간을 귀뚜라미 소리가 매운다.

나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그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눈을 뜨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일으켜야 한다며 2시간 밖에 자지 않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강제로 몸을 깨우던 생활과는 정반대다. 그렇게 한시간, 또 한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전도 금새 지나간다. 귀뚜라미 소리를 즐기기 위해 오전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닌만큼, 귀뚜라미 소리가 사라진 오후도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다시 누워버린다. 불어나는 몸집이 신경이 쓰이면 운동을 하고는 책상 앞에 앉는다. 책상 앞에 앉는다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과 다르진 않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다.

어느새 올해도 다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다. 서지도 못 하던 조카는 이제 뛰어다니는데 나는 그대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매일 어제를 후회하던 과거가 생각났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잘 살지 못 했음을 후회하던 과거가. 문득 "후회를 후회하지 말자"던 강연이 떠올랐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게 아니라, 후회를 통해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어제에 대한 후회도 막연한 후회는 아니었다. 내일은 어제보다 잘 살겠다는 다짐도 이어졌고, 그럼에도 매일 후회한 것은 더 잘 살아야 했던 내일, 잘 살고 있었던 것 같은 오늘이 어제가 되니 부족한 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후회, 귀뚜라미, 계절의 변화 같은 생각을 하니 베짱이와 개미가 떠올랐다. 과연 베짱이는 겨울이 다가오며 노래를 부른걸 후회하고, 혹 겨울을 견뎌내낸다면 그 다음 해에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노래하는걸 그만둘까?

이런 별 영양가 없는 생각들을 하다보니 오후도 다 지나간다. 내일도 그냥 이렇게 흘려보내긴 싫다. 오늘은 이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또 누워서 귀뚜라미 소리나 듣겠지만, 내일은 꼭 뭐라도 해야겠다. 아마도 책을 읽겠지. 항상 책이 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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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후회는 시간낭비니 그렇긴 하지만 항상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네요....

생각지우기엔 독서가 그만이죠 ㆍ시간 보내기도요
세월을 낚던 강공이 떠오릅니다
저도요즘 아침 침대에서 그냥 누워지내는시간이 생겼습니다 밤새 술 해독한 간이 힘들까봐요

개미도 20%만 일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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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가 우는 것도 노는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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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순전히 개미의 시각으로 베짱이를 보는 ...

오늘을 그저 흘려보냈어도 내일이 있으니까요! 그냥 보냈다해도 글 하나 남기셨네요ㅎ 내일은 꼭 뭐라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꼭 만나시길...
하지만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지않아 생각 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내일은 꼭 뭐라도 해야겠다. 아마도 책을 읽겠지. 항상 책이 만만하다.

저에게 책이 만만하진 않지만, 저도 책을 읽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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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던지기에 만만하다는 이야기죠. "내년에는 꼭 운동을 성실하게 하겠다"처럼...

그러게요
어느새 날씨가 바뀌게 되니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게 온몸으로 느껴지고
오늘이 어제가 되어지면서 추상하게 되는
시점을 매번 겪네요

저도
만만한게 책읽기였지만
요즘은 스팀잇하기로 바뀌었으니
저도 어지간히도 고였나봅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아니겠지요.
듣고 느끼고 생각하잖아요.
가을이 여물어 가겠네요.

만만한 친구인 책이 참 좋습니다.

김리님은 떠나지 않으셔서 참 좋습니다 ㅋㅋ
처음 스팀잇 있을 때부터 계속 쭉 계시네요
저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인상과 지금도 제법 다르네요 ㅋㅋ

저 스파업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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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글이 많이 바뀌었네요. 감성이 다른가봐요. 스파업 축하드려요!

바쁜 와중에 여유시간이 생기면 고민이 됩니다.
뭘 해야할까? 책을 볼까, 핸드폰을 들여다볼까.
차라리 잘까, 드라마를 볼까. 그냥 이렇게 쉬어도 되나. 그래도 뭔가 해야하지 않을까.
결국 고민하고 망설이다 시간은 다 지나간다는..

지독히도 울어대던 매미들은 짝을 찾았을지
그렇게도 울어대는 귀뚜라미들은 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귀뚜마리 몇 백마리 잡고 뛰놀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도시가 개발되면서 그들이 살던 친환경적인 주거지역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귀뚜라미 소리 듣기가 어렵더라고요.

제가 사는 폴란드 같은 경우는 매미나 귀뚜라미의 종 자체가 없는 건지, 아예 곤충의 소리가 없답니다. 그래서 더욱 어린 시절이 향수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도 항상 게으름과 싸우곤 하는데 한동안 매번 졌답니다. 이번엔 한국에 와서 집안 설거지나 청소도 제가 나서서 하면서 좀 더 부지런해질 생각이에요 ㅎㅎㅎ

어릴적에 개미처럼 살아야 한다는
레슨을 배운게 분명한데
세상도 바뀌고 나도 바뀌고 다시 보니
베짱이도 베짱이만의 삶이 있는 법이고 -
그런 생각이 문득 드네요 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