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의 당신에게

in #kr6 years ago (edited)

드디어 밤입니다.

봄도 괜찮은 편이군요, 적어도 밤에는요. 슬슬 쌀쌀해질 때의 바삭한 가을 바람이 그립지만, 참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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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체모를 향기가 저녁 공기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바다를 따라 걷기 전에 만난 의외의 기쁨이었습니다. 아마도 나무에 잔뜩 핀, 이름 모를 꽃이었겠죠.

우스운 것은 첫 1초 동안 나는 그 향기를 마치 거름 냄새처럼 역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해준 말이 기억났습니다. 장미 향기도 과하면, 배설물에서 나는 냄새와 구분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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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흘렀고, 내가 당신과 소통하지 않도록 했던 이유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온전히 소화를 거쳤습니다. 내 것이 되고 나니, 당신에 관한 기억도 제법 향기처럼 느껴지는군요. 적어도 내게는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당신에게 펜을 들었다고 하면 무례하게 들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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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게는 항상 당신에게 직설적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요. 당신은 그 사실을 무척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것을 감히 싫어한다는 사실을 싫어했고요.

그러나 오늘은 그 이야길 하려는 게 아닙니다.

노트르담의 성당, 위고의 그 소설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수 차례 영화화되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곤 했었지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엉뚱한, 행복한 결말이 거의 매번 따라붙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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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집시 소녀는 처형 당했고, 긴 세월 끝에 그녀를 찾은 어머니는 마음이 무너져내려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지요. 집시 소녀가 사랑한 군인은 그녀를 까마득히 잊었으며, 그녀를 애증했던 성직자는 처참한 죽음을 당했죠.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의 종을 울리던 추한 곱추는 집시 소녀의 무덤까지 따라 들어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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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현실은 거의 그렇게 진행됩니다. 아니, 거의 그렇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렇게 처형당하고 죽고 죽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요.

아름다운 집시 소녀는 여전히, 영혼이 없어 보이는 미남자에게 마음을 쏟지요. 사실상 육욕인 것 같은데 그녀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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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렇게 바라는 금빛 머리의 군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진짜로 이해할 능력 따위는 없는 남자인 것 같습니다.그의 사랑은 가볍고 빠르며, 당장의 욕구와 신분상승에의 꿈에 가려 결코 성장하지 못할 것이구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빠져버린 그녀는 그런 남자를 택하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 상처를 입으면, 당신을 택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녀에게 꽤나 괜찮은 배경이 있고, 금빛 머리 남자는 그녀에게 만족하여, 얕고 유쾌한 관계 속에서 둘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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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녀가 대화가 필요할 땐, 어쩌면 당신에게 전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 전화를 매번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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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영감을 준 신을 섬기고 학문에 종사하기 위한 길을 택한 성직자는 어떨까요. 그는 뒤늦게 자신의 몸과 마음 속에 있던 열정을 알아차립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터이니, 자신을 일깨운 집시 소녀를 저주하게 됩니다.

그가 그 길을 선택하기 전에 한 남자로 살아보았다면 달랐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인생을 고민해보고 선택할 그런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었지요. 그래서 그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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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소녀의 몸을 억지로 가지려고 해도 어떻게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동정의 신체, 그리고 차라리 그녀를 고문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심정, 두 가지 모두 한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솔직히 그 이상으로 추하게 느껴져요. 애써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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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가 봐도 겉모습이 흉측한 곱추는 짐승처럼 자라났습니다. 그가 성직자를 도와 그녀를 납치하는 범죄를 저지르다가 채찍으로 맞는 형벌을 당할 때, 성직자는 그를 버립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집시 소녀 뿐입니다. 곱추는 마치 처음으로 배려를 받은 동물처럼 감격해서, 갚고 또 갚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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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훗날 곱추가 집시 소녀를 구했을 때, 집시 소녀는 그를 점차 믿음직한 가구처럼 익숙하게 여기고, 어쩌면 의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바랄 수 없는 존재였지요. 그녀를 백 번 구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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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소녀의 어머니는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내지요. 소녀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딸인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그녀를 저주합니다.

그러다 결국 딸을 알아보게 되지만, 그 날에는 마침 딸의 처형식이 있습니다. 그런 비참함을 마주한 모성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군요. 상상도 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나의 고양이들을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새끼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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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저, 추측을 할 뿐입니다. 당신의 아픔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회의주의자로 부를 때, 나는 당신에게서 느꼈어요. 노트르담의 성당 이야기를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로 바꾸어서, 영화로까지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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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 역시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가요.

그림은 전부 뭉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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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을 읽었는데도 어렵네요 저에겐...ㅎ

뭔가 설명이 될 확장식 글로 리메이크 해볼까 했었는데요(어쩌면 가즈아 식?), 공개를 감당 못할 사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갈려 들어가서 힘들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누구도 성직자나 곱추, 군인, 소녀가 될 수 있겠죠. 소녀의 어머니는 안 되길 바람...

의식의 흐름대로 썼는데, 다시 훑어보니 가을바람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스스로 일관되게 차가운 시선을 갖고 있다는걸 새삼 느끼네요....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라서 두번정도 정독했네요..

"내가 생각하기에 현실은 거의 그렇게 진행됩니다. 아니, 거의 그렇습니다."

문체가 맘에 들어 따라 써보고 갑니다..

근데 두번째 읽을 때에 감정선이 좀 떨어져서 그런지 나름대로

이 일련의 일들 그대로 무덤덤한 하나의 희극으로 느껴지는건 저만 그럴까요?

무튼 글 잘읽고 갑니다~~^^

p.s 한번은 각 그림을 기준으로 문단을 나눠서 꺼꾸로 읽어봤는데
(끝 두문단 정도 제외하구요!)

글의 전개가 생각보다 잘 이어지면서 다른 내용이 펼쳐지네요..

노리신건가요? ㅎㅎ

맞아요. 엄청난 비극인 것 같지만 결국 소설 속에서도 곳곳에 희극적 요소가 많았고, 제가 현실과 비교한게 가능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죠.

p.s. 바다 산책을 시작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듯이, 그리고 소설의 내용에다가 반복적이고도 은근히 흔한 현실을 대입했듯이, 거꾸로 읽어도 지장이 없는 글이겠죠! 그래서 같은 그림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숨겨진 의도에 대한 정답입니다. (하지만 상금은 없습니다.)

오호라...콰지모도에게 보내는 편지같은 느낌?
제 기억속의 주인공들 (콰지모도, 집시소녀, 근위대장, 신부) 모두
안 좋은 기억들만 있어요 ㅎㅎㅎ
그래도 제이미님 편지를 보니 그 행동들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정말 말 그대로 그들도 그저 '인간'들 이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네요 ^-^
몽롱한 그림들과 어울려셔 더 몰입하게 된 것 같습니다. ㅎㅎ

음...실제 알던 사람들 몇 명을 섞은 대상인데, 콰지모도+주교(였던 듯?)+군인(근위대장?) 의 관계에 빗대어서 편지를 썼어요. 섞였기 때문에 보낼 수는 없는...ㅎㅎ

아아ㅋㅋㅋ어쩐지 읽다가 조금 이해가 안되서 막힌 부분들이 있었어요 ㅋㅋㅋ
뭐 그래도 저한테는 그 나름대로 또 새롭게 읽힌 글이었습니다 ^-^ ㅋㅋㅋ
(이런 글을 보니 또 좀 달라보이네요 뉴위즈 홍보대사 제이미님ㅋㅋ)

임명 철회하신걸로 기억합니다만...

멋진 글에 반해서 다시 임명해드렸습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후후 두고 봅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음..
일단 한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뭔가 있는데 뭔가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후후 그냥 소설 줄거리 그대로 썼어요. 현실 속에 있는 얘기와 닮은 모습을 넣었을 뿐...

뭉크의 그림이 매우 잘 봤습니다.
사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에 대해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과 사물, 그리고 생각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인지라(?) 작품를 통해서 투영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비뚤어진 생각들을 보면 좀 짜증을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는 과연 그곳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할까? 아니 좀더 격하게,
미친 인간들!
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에게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고, 그 원천을 찾아냈다면, 그걸도 아름다운 거겠죠...

제가 뭔소리를 하는지..ㅋㅋ

진선미 중에서 인간이 추구하고 주장하기 가장 쉬운 것이 미라고 저는 자주 얘기하거든요.

실제로 유명한 작품들(문학이건 미술이건)에는 인간의 악하거나 추한 행위들에 아름다움을 부여해서 그려낸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선(윤리)을 오히려 희생시켜 버린 작품들도 많구요. 철학 분야에서도 이런 저런 용어를 써서 이런 논의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관련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우울한 주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이다라고 피카소가 말했다던데 저는 영화감독 오손 웰즈의 입에서 들은 말이거든요. 예술이 진실이나 선함 자체를 직접적으로 그리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죠. 그런 차원에서 작품이라는 것의 의미를 찾아 볼 수도 있을 것 같구요.

나의 초딩글은 범접할쑤 없는 예술과 맞닿은 멋진 편지글이네용 :) 제이미님 앞으로도 많은 작품 (?) 기대해용😚😚 난 역시 다크다크한 글을 좋아햏ㅎㅎ

아 다크다크했군요? 감사합니다. ㅎㅎ

kia..분위기에 취해서 나가서 레디큐 사먹고 왔다. 질문 받는다

난 슬프다. 이거 쓰다 캐마 놓침...

문학, 그림 둘다 알.못..
죄송합니다. 다음에 시간내서 정독해 보겠습니다 ㅎ

아, 그냥 옛날 이야기처럼 쓴거라 생각해주시면...봐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몇년 전 뭉크의 그림이 보고 싶어서 남편과 북유럽 여행을 갔었습니다.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 가서 뭉크의 그림을 원없이 보고 왔지요.
왠지 그림 곳곳에서 보이는 뭉크의 얼굴이 아는 사람을 만난 듯하기도 합니다.

잘 봤습니다.

그림을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사실 그림이 주 관심사는 아닌데, 뭉크의 "질투"라는 제목의 여러 그림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문학 작품을 읽을 때 그 얼굴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 제이미님 (방금 위에 가즈아 태그 글에서 반말로 댓글 달고 여기에 와서 급 존댓말로 댓글 달려니 혼란하네요...ㅋㅋㅋㅋ)
혹시 이거 krguidedog 계정으로 리스팀되는 홍보해 써도 될까요?
하고싶은데 혹시라도 원치 않으실까봐 먼저 여쭤봐요.

안그래도 가즈아 때문에 태그 잘 보고 댓글 쓰게 돼요. ㅎㅎㅎ
써주시면 감사하죠! :)

뭔가 개인적인 것들이 조금씩 담겨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원치 않으실까봐 먼저 여쭤봤어요! ㅎㅎㅎ

이런 여운 있는 글 너무 좋아요. 감사해요.

(그리고 이 여운을 와장창 깰 링크를.........................ㅋㅋㅋㅋㅋㅋㅋㅋ
http://www.bu.edu/sequitur/2016/04/29/handler-ecce/

이 글이랑 전혀 상관 없는데 그냥갑자기 뭉크라고 하니까 이 사건이 떠올라서요...
사실 이 사건이랑 뭉크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사람들이 뭉크의 절규에 합성해서 패러디한게 급 생각났거든요 ㅋㅋ)

흠흠
암튼 제이미님 글 좋아해요!! (급고백하고 도망가기)

고마워요! 소설 줄거리에 더 무게를 두려고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좀 이런저런게 섞여 들어갔는데...저 글 쓰고 하루를 글을 쉬게 되더라구요. 뭔가 필요에 의해 배출한 느낌? 그래서 가끔 이런 편지를 쓸 생각이에요. ㅎㅎ

저 링크 글도 내일 다 읽어보고 싶네요. 재미있을 듯. 원더리나 님 글도 오래 잊고 있었던 발레의 느낌을 기억나게 해줘서 너무 좋아해요. 더 자주 얘기해요. 편한 밤 되세요!

그 편지 수신인이 저는 아니겠지만 남의 편지 훔쳐보는 것도 (주인이 허락한다면) 괜찮겠죠 ㅎㅎㅎ
으아아 발레 전공으로 하시던 분들이 보신다면 급 부끄러워지는 글들이에요...ㅋㅋㅋㅠㅠ 그치만 그렇게 상냥하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제이미 님도 편안한 밤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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