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속옷 가게 앞에서

in #kr3 years ago

#1
그 곳은 상호가 명확하지 않은 속옷 가게이다. 간판 대신 현수막이 걸려 있고 내가 느끼기에 주기적으로 그 것이 교체된다. 작년에 '중국 사드 보복 여파, 수출길 막혀 - 눈물의 원가 세일'이라고 적혀 있던 것을 봤는데 몇 달 전에는 '포항 지진으로 인한 물류 창고 피해 - 눈물의 폭탄 세일'이 붙어 있었다. 주인은 눈물이 많은 사람 같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몇 일 뒤에는 '남북교류 재개로 개성공단 물량 확보 - 통일기원 재고 정리' 정도가 붙지 않을까? 쇼윈도를 통해 보이는 주인은 늘 같은 얼굴이다.

나는 '내가 이 속옷 가게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 둘은 정직하지는 않지만 기만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입가에 묻은 크림도 닦지 않고 케익에 손대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아이 같다. 누군가 사드 보복때문에 수출길이 막힌 물건들이 확실하냐고 주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주인은 질문자의 눈치를 볼 것이다. 질문을 하는 언성의 높이, 말을 하는 기색에 진실을 요구하는 태도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 살필 것이다. 주인은 늘 같은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 누구의 질문에도 진실을 말할지, 거짓을 말할지 정해놓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만 아무 계기가 없이, 금방 다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럴 거면 거짓말을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누구나 그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굳세게 현수막을 새로 하는 가게 주인은 내 마음을 알 것 같다.

#2
나는 박인환 시인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의 시는 '목마와 숙녀' 뿐이다. 게다가 그 시의 전체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타인과 취향을 공유함이 내 기호를 포기하는 일보다 싫은 내가 이 구절만큼은 공동취향을 허용했을만큼 나는 이 부분만 사랑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한 평론가는 '어휘의 빈곤, 이미지의 분산, 경박한 겉멋' 등을 지적하며 박인환의 모더니즘적 가치가 한계를 지닌다고 했다. '이러이러한 경향이 있다'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하고 싶은 말은 앞에 다 나왔다.

박인환은 예세닌이 죽기 전 찍었던 사진을 보고 그를 따라하기 위해 미군용 담요로 코트를 지어 입고, 3월 17일이 되면 낮부터 폭음을 했다. 이상의 기일은 4월 17일인데 순전히 그의 착각으로 3월 17일에 이상 때문에 술을 마셨다. 그는 고작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나는 그의 간지 낭만을 사랑한다.

#3
나는 나와 무명의 속옷 가게와 박인환이 모두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통속: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할 수 있는 일.)

이제 현수막을 보고 그 집이 정말 점포 정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지만 10년째 정리가 안 되는 그 점포는 나름대로 보기 좋다. 허위라고 하여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가 주인장에게 삿대질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그 정도면 성공이다. 박인환의 시는 깊이가 없다고 후대에게 천시 받지만 그가 실제보다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과장했 데도, 아는 것이 부족했는데 살아 생전에 허세를 부렸 데도 나는 그가 좋다. 그의 시가 속옷 가게의 현수막처럼 느껴진 탓이다. 멋져 보이는 시어를 나열하고 본인도 잘 모르는 의미를 노래했다고 한들 그것이 뭐 어떤가?

모두들 그저 그렇게 넘어가는 이슈 반영 현수막에 정색하는 사람과 더 고상하지 못 해 박인환의 시가 별로라고 깎아 내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인생이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잡지의 표지처럼, 속옷 가게의 현수막처럼, 누구의 평론에 의하면 박인환의 시처럼, 새로운 현수막을 고안하는 가게 주인처럼 통속하다.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고 썩 진실되지도 않지만 일반 대중과 쉽게 어울릴 수 있기만은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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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때문에 이 글이 탄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답답함에서 시작한 것 같네요^^
「인생이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란 말 너무 멋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인데..읽어주시는 분이 좋은 분이시라서 글이 가치를 가지게 됨을 항상 느낍니다. 저도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

우린 모두 진흙탕 속에 있지만 눈으로는 하늘의 별을 쫓고 있다...꼭 별이 아니라 속옷가게여도 상관은 없겠죠!

음..속옷을 유심히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 크흠

저도 그래요...
곧 속내를 드러낼거면서.. 아니... 들키거면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것 같네요..
어쩜 그 거짓말이 진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역시..야채님!! 속이 훤히 보이실 분이라는 것.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의미입니다. 요즘은 속내를 감추려는 사람이 더 많아서..야채님 같은 분을 보면 제가 아빠 미소가 나는 것입니다. 최근 바빠서 야채님 블로그에 자주 못 들린 것 같습니다. 찾아 뵙겠습니다 ^^

가든님의 글에는 댓글 달기가 망설여집니다. 이전 글에 댓글을 달았다가 지웠지요. 꼭 벌거벗은 내모습에 한마디 더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답니다. 멋진 표현들에 웃음짓고 갑니다.

누님의 댓글을 기대합니다. 별다른 이야기 없어도 기다립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달고 싶지 않을 때는 제외하고) 달아주세용. 저는 립 서비스를 잘하는 편이 맞지만, 스팀잇에 와서 속에 없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속에 없는 말이 나오려고 할 때는 그냥 말을 줄이거나 다른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댓글을 기대하고 기다린다는 말 역시 진심입니다..! 의심하시는 성격도 아니시지만..노파심에 @[email protected]

그 속옷 가게는 아마 일반 대중과 소통을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 대중들을 속여서가 아니라 긁어 주고 싶은 곳을 긁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네요. 장사를 위해서 겠지만 선의가 있지도 않을까요?

일기 투어 중에 들렸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아우..제가 이 댓글을 너무나 늦게 발견했습니다 ㅜㅜ 부족한 글을 읽고 이런 소중한 후기를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성 팬이라고 하시니..아주 조금 안타깝지만..! 오늘 한화를 대파 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접겠습니다. (저는 한화팬이라서..!ㅋㅋㅋ) 자주 교류하면 좋겠습니다 ^^

통속= 通俗 이렇게쓰는게 맞지요? 그런데 속의 같은 음한자를 찾아보니까 速(빠를), 屬(이을), 續(잇다), 束(묶다), 涑(헹구다), 贖(속죄하다), 謖(일어나다) 등 대충 10개가 나오내요. 근데 다 말이 통하내요. 그러니까

통속하다는 것은 좋다 이겁니다.

시건방떠는 머리에 똥들어가있는데 지식인척 하는 술자들에게 ㅈㅗㅅ같다고 얘기하면 너무 무례일까요?

어느 장소에서 뵈도~ 시원 시원하게 말씀하셔서 흠칫 놀랄 때도 있고,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합니다. 종종 제 블로그에 들려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한문에 능통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깊게 볼 수 있으실 듯 하여 부럽습니다..!

피터한문 안능통. 약간통.

박정원님은 뇌쌕 젊고 잘생겨서 피터 개부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럴수가 다들 제 본명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크흠. 피터님이 더 멋진 분일 듯 합니다. 저는 소심한 편이라 전혀 매력이 없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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