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책을 버렸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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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을 정리했다.
몇날 며칠을 심사숙고 하여 100여 권을 골라낸 뒤 나머지 책은 헌책방에 실어 보냈다.
그렇게 쥐어진 돈 150만 원.

방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붙박이 장 속, 피아노 아래, 책상 아래 버티던 책들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 작은 종이 뭉치로 내 손에 남았다.

책을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매우 피곤한 일이다.

너무 소중해서 책날개를 책갈피 삼지도 못하고,
책장을 접어 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밑줄도 긋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으면 '아끼는' 공책에 적어 놓는다.

누군가 읽고 싶은 책이라며 빌려달라고 할까봐 같은 책을 두 권씩 사기도 했다.

읽던 책을 잠시 덮어둬야 할 때는 페이지 수를 외워둔다.

소중히 다뤄주겠다는 나름의 약속이다.

우리 57페이지에서 다시 보자


결혼을 하고 책을 꽂아두기 위한 책꽂이를 제일 좋은 것으로 샀다.
아니, 엄마가 사주셨다.

넌 책을 좋아하니까 책꽂이 만큼은 크고 좋은 걸로 사야지

그렇게 자리를 옮겨왔다.

이상하게도 옮겨진 책들에 정이 가지 않았다.
매우 아끼던 책들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책에 눈길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책과 멀어졌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가들이 아장아장 책꽂이로 다가간다.

'따뜻한 흙' 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꺼낸다.

내 집에 저런 책이 있었지, 정말 좋아하던 작가의 책이다.
너무 아까워서 빛에 책등이 바랠까봐 뒤집어서 꽂아 놓았던 책.

그래, 저런 책이 있었지...잠시 기억을 꺼내는 순간,
야무진 1호의 고사리 손이 책 표지를 부욱 찢는다.

옆에서는 2호가 요리책을 꺼내 '맘마 냠냠'이라고 말하며 책장을 한 장씩 부욱 부욱 찢고 있다.


나도 아이들 옆에서 책을 꺼냈다.
잊고 있던 제목들이 반짝반짝 살아난다.

왜 이제야 꺼냈어! 라며 살짝 눈을 흘기는 책도 있는 것 같다.

신나게 책표지를 찢어대는 아가들을 보며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책임을 떠올려 본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본 아가들이 서로 달라며 아우성이다.

얼른 한 권을 더 꺼내 각각 쥐어준다.

지켜본다.

북북 뜯어내는 그 손길을...


아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지켜주는 것,
아니면 내 손의 때를 너에게도 입혀주는 것...공유하는 것?


몇년 전,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을 정리했다.
몇날 며칠을 심사숙고 하여 100여 권을 골라낸 뒤 나머지 책은 헌책방에 실어 보냈다.
그렇게 쥐어진 돈 150만 원.

피곤한 행위의 댓가, 그 돈을 받지 말았어야 했을까?
책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 있던 무언가를 왜 진작에 떠나보내지 못했을까...


나의 강박이 순수함으로 무장된 두 생명에 나달나달 찢겨 바닥에 뒹굴 때...
비로소 나는 책을 아낀다는 '피곤한 행위'에서 해방됨을 느꼈다.
더이상 아낄 것이 없다!


이제 나는 새로운 책을 산다.

아끼는 책이 아니라 나의 손때를 공유할 '마음의 벗'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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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

'1년 동안 당신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모두 버려라!'

이 말에 자극을 받아서~ㅋㅋ
그때 저도 책을 많이 정리했어요.
대부분 주변 사람들에게 - 그 사람에게 어울릴 책을 - 선물(?)로 떠넘기기~ㅎㅎ

제가 전자책에 관심을 둔 것도 어쩌면 이삿짐(책)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네요.ㅎ

칼리스트님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시는 군요!
저도 그래서 어제는 안 입는 옷을 싹 버렸죠...
언젠가 언젠가 하면서 2년 동안 방치됐던...슬림했던 시절의 옷들을 말예요...
하하하;;;
저는 왜 어떤 글을 써도 이렇게 우울감이 깃드는 걸까요? ㅎㅎ
아마 이 시기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어요...
고마워요 칼님!

그러면 '못' 입는 옷이라고 하셨어야죠?!?!ㅋㅋ

저는 3년 전에 바지가 너무 괜찮아서 산 게 있는데,
제가 입는 치수보다 한 치수 적은 것밖에 없어서 샀는데,

'운동해서 살 빼고 입으면 되지 뭐!'

이런 생각으로 샀는데......... 결과는 아시죠???!!!!!ㅋㅋㅋㅋ

'못'....
저 상처받았어요...
그래요!! 못 입는 옷이예요!! 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흥흥!!!

근데 한 치수 작은 옷...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ㅠㅠ 이삿짐센터에서 뭐라 하고 갔는데 책 너무 많다고 ㅠㅠ

아~~책은 정말 이사할 때 큰!!! 짐이죠!
산하님도 살짝 정리 한 번 해보세요!!!

그 아끼는 책들을 어떻게 처분하셨어요.
맘 한구석이 휑하겠는데요..

지나고보니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요..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글에는 잘 안느껴지지만 아이들이 책을 찢던 때 분노했을 것 같은데요??
저도 물건에 집착이 좀 있는지라 아이들한테 못만지게 하는데 그 것도 좀 못할 짓인거 같애요

처음에는 사실 좀 당황했어요! ㅎㅎ
근데 뭐...그냥 맘을 비우고 이제는 제가 갖고 놀으라고 몇 권 펼쳐주고 그래요...
둥이들 노는 사이에 옆에서 읽기도 하고요^^

용기가 있네요.
척척 올려놓고 지저분 해도 버리지를 못하니...

감사해요...없는 용기를 가끔 부려볼 때가 있답니다!! ^^

저도 책이 많았는데, 거의 80% 처분을 했어요. 보고싶은 책은 서점에서 보고, 도서관에서 보고... 짐을 하나씩 줄여가고 있네요.

책도 중독인 것 같아요..
볼 수록 더 보고 싶고, 더 찾게 되고요...
얼마간 멀어지니 또 안 보고 살겠더라고요...;;
근데...요즘 또다시 책이 너무 좋아요^^

와 책이 엄청 많으셨나 봐요. 150만원 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처분 하실 때 아쉬우셨을듯 해요.

시간이 지난 뒤에 읽고 싶어서 찾으니 없는 책이 많았어요...
그럴 땐 좀 아쉽더라고요^^
또 사기도 그렇고요;;

디디엘엘님이 150만원 생기셨다구요?
이번주말 놀러가겠습니다 :)
저는 중고 이북리더 사서 보는데 왜 이제 이걸 샀나 싶을 정도로 편합니다

ㅎㅎ 몇 년 전인데...못보셨구나~~~ㅎㅎ
이미 그 돈은 재 너머 어딘가에...^^;;
이북리더 사고 싶은데...지금 전자책 몇 권 사놓고 안 보고 있어서
쓰게 될지 모르겠어요...망설이는 중이랍니다...
스마트폰과 이북리더는 확실히 다른가요?

아 몇년전이구나 ㅎㅎ
이북리더 눈이 피로하지 않아 좋아요 :)

정말 진심으로 책을 아끼는 마음이 전해져와요. 그토록 많은 책을 읽으셔서 그럴까요 디디엘엘님 글은 술술 잘읽히는 매력까지 있어요^^
아가들이 책찢는걸 보면서 마음 아픈것보다는 책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고 다르게 마인드를 바꾼 그 대범함에 박수를 드리고 싶어요👏👏👏
이제 새로운 책들이 아기들과 작가님에게 더 좋은 추억을 안겨다주길. ^^

감사해요 찡님...커다란 칭찬을 함께 받으니 행복하기만 하답니다^^
책을 지나치게 아끼다 보니,
누가 제 책꽂이 근처에 가는 것도 싫고 조금만 흠집이 나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고요....
헌책방 아저씨가 새책을 다 파냐고 하셨어요..다 본 책들인데요^^;;
마음을 비우면 그냥 다 즐거워지는 것 같아요...그러기까지가 참 오래걸렸어요...

다 읽고 정리 하셨으면 그나마 나을듯 하네요.
읽으려고 사놓은 책이 책상위에서 빛이 바래갑니다.ㅠㅠ

책보다 더 소중한 아이와 그리고 스티미언들과 더 많은 대화를...

안 읽은 책은 언젠가 읽으려고 남겨뒀어요..ㅎㅎ
한 번 읽은 책도 있고, 여러 번 읽은 책도 있는데...그냥 정리했더니 맘이 홀가분했었어요..

아이들이 생기니 다른 데로 향하던 욕심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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