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영화 철학 토론 #007 "나쁜놈 메이커" / "커트 위머, 이퀄리 브리엄"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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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름으로 '나쁨'을 포장하다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이란 말은 사전적으로는 물질의 균형이나 마음의 평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좋은 표현을 많이 쓰면 좋아보이지만, 간혹 좋은 표현으로 좋지 않을걸 싸는데 포장지로도 쓰이니까주의를 좀 할필요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좋은 이름표는 영화의 배경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쓰인다.

"감정 때문에 모든 범죄가 일어나니까, 감정을 일어나지 않게 하면 범죄가 없어지고 세상이 안정된다"

는 기치아래 감정을 생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감정 - 그게 사랑이든, 미움이든, 혹은 어떤 기쁨이나 슬픔이라도 - 을 일으키게 할 만 한 어떤 요소도 모두 미리 없애버린다. 경찰은 그런 감정적인 물질, 물건들을 적발해서 없애버리고, 단죄한다. 그리고 몸속에서 생겨나는 감정 요소를 없애기 위해 모든 시민들에게 끊임 없이 투약한다.

약을 안맞거나, 감정대상을 일으키는 물건을 소유하면 그게 범죄다. "매우 위험한 사람"이고, 범죄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감정 때문에 분명히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틀즈도 감정을 일으키고, 모나리자도 감정을 일으킨다. 감상하고 소유하면 그 자체가 범죄다.

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제나, 형법과 같은 법률 이야기를 좀 해야한다. 법에 관해 배운바도, 아는 바도 별로 없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지만 종교 혹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악을 단죄하는 것 만큼 정의로운 일은 없는것 같지만, 가끔 정보와 힘을 가진 이들은 악을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통제한다. 싸울 생각이 없는 이에게 내 입장을 강요하거나 그러기 위해 힘을 가하면 폭력이 된다.

하지만 대상에게 '악'이란 빨간 이름표만 붙여두면 우리는 기계처럼 반응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가 죄를 왜 지었는지, 정말 죄를 지었는지에 관한 것은 별로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소지만 있어도 뚜렷한 근거없이 그들이 죄를 지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랬겠지, 그랬을거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어"
"설령 죄가 없더라도, 안전한게 좋아. 위협요소는 잘라버리는게 좋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미리 제지하는게 낫지"

갱생이란 존재하지 않아?

그가 죄가 있건 없건 우리의 관심사는 특별하게 나쁜 사람을 만들고 비난만 하면 끝이다. 분명 죄가 있을 것이고, 없으면 그만이다.

죄가 있어 그가 처벌, 단죄되고 난 후에 어떻게 마음을 고쳐먹고 사회에 다시 '갱생'해서 나올지에 대해서도 관 심이 없다. 죄를 한 번 지은 사람, 그는 틀림없이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죄짓고 잘못했으니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된다. 그가 당연한 희생을 하면 사회가 더 안전해지지 않겠는가.

'폭력'과 '정의'가 다른 말이라고

우리는 폭력성을 타고 태어난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오랜시간동안 누적된 삶의 방식이다. 그걸 평소에 발현하면 범죄가 되지만, 먼저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은 '정의' 이고 '비분강개'이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면 그 한 사람을 향해 입을 모아 아무리 심한 욕설을해도 되고, 땅에 눕혀놓고 여럿이 둘러서서 발로 밟고 짓이겨도 그게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맞아도 싼 놈'은 맞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행위는 정의를 위해 단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놈 메이커

우린는 기꺼이 나쁜놈 메이커를 자청한다.

"나쁜놈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동의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쁜놈으로 결정되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일까. 그들은 누구일까. 바로 자신만은 비교적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이다. 까만 바탕에서 흰색은 더 두드러진다. 흰색의 밝기는 흰색 자신이 아니라 바로 배경색이다. 별로 선량하지 않게 살아도 우리는 나쁜놈들을 욕하면서 점점 더 선해진다. 대부분의 선량한 이들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그들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데 실질적인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비분강개'만 한다. 나쁜 이들을 욕하면, 왠지 우리가 스스로 정의로워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면 누군가 나쁜놈들을 찾아서 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요새 세상이 썩었어. 말세야.
요새 애들은 영악하면서 생각에 깊이가 없어.
문제아들 : 여자들, 이슬람, 유대인, 흑인, 범죄자, 동성애자, 장애인, 노숙자, 공산당...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정의의 이름으로 이들을 비판하고 지적해야 한다. 그래서 비판하는 것이다.

형법 이야기를 좀 해보자. 형사재판시에 검사는 기본적으로 피기소자가 범죄사실에 대해 실은 별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무조건 의심받고 있는 범죄를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양형을 구형해서 재판으로부터 적정이상의 형량을 이끌어 내는게 목적이다. 재판에서 범죄자가 완전 무결하게 무죄를 선고 받는다면 아마 검사는 다시 재소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연히 나쁜것은 아니다. 죄를 지은이의 죄를 명백하게 밝히고 거기에 맞는 죗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까. 그들은 원래 하는 일이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습같지 않은가? 우리는 검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람을 잘 꿰뚫어 보고, 의심을 잘 할까?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게 있다. 죄를 지었다고 하는 사실히 명확하게 판결날 때 까지는 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세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또한 이 원칙에는 상황이 가닥을 못잡을 때는 죄를 지었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상황이 유리하도록 추측해야 한다는 부분도 있다.

"자백 배제의 법칙"도 있다. 내 의사를 자유롭게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진술될 수도 있는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즤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대한민국 헌법 제12 조)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있다. "이미 심판을 거친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는 다시 심판할 수 없다.(헌법재판 소법 제39조,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아, 법法이 정말 불법佛法이다! 위의 예들은 형법의 일부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누군가에 대해 나쁜 의심을 갖고 타인에게 그들의 죄가거의 확실하다고 하며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모든 사실이 밝혀져도 여전히 그 의심을 풀지않고 반복해서 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그건어떤죄를 짓는것보다 훨씬 큰 잘못이다.내가 어떤죄를 짓는다면 어느 순간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나는 가벼워지겠지만, 내가 뱉어놓은 누군가의 허물은 입을 통해 타고 다니며 그의 인생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사실상 살인 미수급의 범죄이다. 불자라면,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비난하고 고치고 처벌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무거운 잘못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거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대응하기도 처벌하기 어려운 국가폭력에 이런 이야기들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모든 법 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다른 이야기다.

다시 감정의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감정 때문에 죄를 짓는다"

유교의 경전인 '명심보감'에서도 "[감정적으로] 참지 못하는데서 죄를 짓게된다"고 했으니 무조건 틀린 전제는 아니다. 물론 명심보감에는 " 罪生於不仁"이라고 하여 '참을 인'이 아니라 '어질 인''으로 되어 있으니, "죄는 어질지 못한데서 생긴다"라고 되어 있으니 오역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내공이 있어야 갖출 수 있는 덕목으로서의 '어질지 못하다'는 것 보다는 그게 수양을 많이 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누구나 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참지못함'으로의 번역이 좀 더 낳은 것 같다. 물론 이런 썰은 불자로서의 입장이고 유학자가 이를 듣는다면 '인 '자의 철학적 용법에 대해서 모른다고 핀잔받을 수도 있긴 하겠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불교에서도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갖고 싶어하고(탐),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고 싶어하는(진) 것'에서 모든 문제와 고통이 시작된다고 하니 사실 감정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분명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가장 좋은 가치를 매기는 '사랑'이 바로 그 '감정'에서 사랑이 나오는것이 아니던가. 보조지눌스님의 말처럼

"물을 소가 마셔서 우유를 만드냐, 뱀이 마셔서 독을 만드냐"

의문제지 물에 우유나 독이 들어있던 것은 아닌것처럼, '어떻게'게 문제지 '하느냐'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물론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 못만나서 괴롭고, 만나서 괴롭다"

고 하셨는데, 그러면 부처님의 최종목표는 모두 스님을 만들고 세속적인 것들, 사랑따윈 싸그리 없애버리고 '고귀'하고 '순결'하며 '투명'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을까?

(뭔가 '티없이 하얗고' '맑고 투명한 거' 이런걸 너무 좋아라고 맹신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정말 올바른 진리라면 몸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해파리는 부처님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랑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 조건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고통받기 싫으면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그런식으로 계속 할거면 차라리 사랑하지 말라"

나는 이것이 붓다의 본심이었다고 확신한다. 물론 걍 제멋대로 생각해버리는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만났던 부처님의 스타일을 충분히 검토해서 뽑아낸 부처님의 속마음이다.

그러니 그 감정이 사랑을 일으키든 범죄를 일으키든 문제가 생기면 그 때 해결하면 된다.누군가에게 나쁜짓을 하여 고통을 준 이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불자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나쁜놈 만들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를 잘 살펴야 한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게 좀 특별한 재능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자신이 사람을 잘 보는 눈이 있고, 직관이 좀 빠르고, 상황 파악을 잘 하며, 상대를 잘 알고, 예의 바르고, 경험을 통해 알 수있는 뻔한 사실들과 인간사에 대해서 잘 알며, 늘 정의를 준수하고,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남에게 싫은 소리 않고, 삶에 최선을 다하며, 누구든 공정하게 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이 검사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잘못을 예단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이 정도 능력들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 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대 내 신념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릴지도 모르니까."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BULSIK / 영화 철학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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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불식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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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lsik님의 글은 어려운 글 같은데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himapan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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