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영화 철학 토론 #006 "인간이 만든 문제를 신에게 해결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 "까란 조하르, 내 이름은 칸"

in #kr7 years ago

Screen Shot 2017-12-09 at 1.05.48 AM.png

이슬람?원래 우리땅인가
이슬람과 서구사회의 충돌로 세계가 시끄럽다. 이슬람. 지금 세계의 각지에 이슬람과 중국인이 대규모로 들어가있지 않은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 두 이방인들이 우리가 지켜온 영역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위기의식도 들어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하나도 명확하지 않은 막연한 두려움이다.한 곳에 아주 오래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가 사는 이 집에, 혹은 이땅에 이전에 살았던 이들에 대해서 전혀 모를것이다. 한 3-40년만 시간을 돌려놓아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3-40년 이후에 우리가 사는 이곳에 누가 살고 있을지 장담할 수 있을까.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10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의사소통이 난감해질 것이고, 한 150년 정도 당겨놓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 고조 할아버지라고 하더라도 - 아마 몰라볼 것이다. 그것은 의술이 상당히 발전하여 한 100살 넘겨도 가뿐하게 살 수 있는게 아니라면150년후에 태어날 우리의 손자의 손자를 만나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돈도 아니고 땅도, 집도, 물론 나라도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 조상들 일부를 원망하는 것은 왜 잘못된 방법으로 빼앗으려 하고 때리는데도 맞으면서 그들이 옳다고 하고, 그들을 은인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감사했느냐하는 것이지 결코 힘이 없어서 빼앗긴 땅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 지난 잘못때문에 상처받고 힘든 이들 중 일부가 지금도 살아 있는데, 그렇게 아픈이들을 돕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합리적인 방법으로 어딘가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잘못된 방법으로 힘을 행사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공동체생활에 익숙한 전통을 갖고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서로 다른 나라였지만 지금은 그냥 같은 한국사람이다. 물론 과거에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경상도 사람이니까, 전라도 사람이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내 이름은 칸"비슷한 우리네 역사
영화의 제목이 “내 이름은 칸”이라고 붙여진 것은 ‘칸’이란 이름 자체가 이슬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주연을 맡은 배우는 ‘샤룩 칸Shahrukh Khan’이란 이름의 배우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부모를 둔 실제 이슬람이다. 인도에서도 이슬람의 등장은 힌두교와 엄청난 충돌을 가져왔고, 결국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가져오기도 했고 불교는 이슬람에게 밀려서 인도로부터 쫒겨났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비폭력의 원조 마하뜨마 간디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슬람과 힌두는 인도 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다.또한 한 때 무굴제국이란 인도 거대 통일왕조를 이루기도 했으니, 오늘날 인도에서 만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따즈마할 역시 무굴제국 왕비의 거대한 무덤이 아닌가. 그리고 여전히 인도의 삼분의 일은 이슬람의 문화가 지켜오고 있다. 우리는 따지마할을 생각하면 공민왕의 노국공주를 향한 사랑이 겹치고, 간디를 생각 하면 백범선생이 오버랩된다. 그렇게 역사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샤룩 칸미국 비꼬기
샤룩 칸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이다. 그보다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지 않고 이슬람의 ⟪꾸란⟫과 힌두의 베다신들을 함께 두는데 거리낌이 없고, 힌두인 아내를 위해서 힌두교 방식으로 결혼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는 태도가 편하다. 오히려 신부의 부모님의 불편한 태도가 그를 힘들게 했다고 하니까, 남의 가정사, 더구나 배우의 개인사야 추측하는 정도 이상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만, 이슬람에 대해 그 고집스럽고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막연한 우리 의 색안경은 일단 한겹 걷어내고 이야기를 시작하자.한 사람의 이슬람이자 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은 이슬람이지만 "‘이슬람=나쁜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정도와 한 사람의 사랑을 그린 진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시대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과 지성을 지니고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미국이란 나라의 사람들이 가진, ‘이슬람’이란 이름표만 갖고 사람을 판단하는 편협함에 대한 비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일본중국
우리가 이웃들과 다투었던 이야기를 다시 조금 해보자. 고려시대 잦은 노략질로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1592-98년에 걸친 두 차례 7년간의 침략전쟁, 그리고 1910년부 터 시작되어 광복까지 36년을 빼앗겼지만, 그 긴 시간을 다른 나라에서 전전하며 항거 했던 이들은 그렇게 어렵게 되찾은 해방된, 바로 자신들의 나라에서 서로를 살해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무려 7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침략자였던 일본을 미워해야 하는지, 혹은 그들의 편을 들었던 우리들 스스로를 증오해야 하는지, 혹은 이유야 어쨌든 갈라져서 상대측에서 총질을 해댔던 서로를 원망해야 하는지. 증오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증오의 총구를 정확하게 누구를 향해야 하는 것인지도 합의가 되지 않는 상황에 있지 않은가. 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이 제공했겠지만.중국은 또 어떤가. 고구려란 나라가 강력했던 덕에 강력한 제국이었던 수-당의 침략 을 막아내고 비교적 대등한 외교관계를 끌어왔지만,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를 1200 년대 초반부터 1300년대까지 100여년간을 견뎌야 했으며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원-명-청이란 중국 역사의 제국의 시기가 우리에게는 고스란히 굴욕의 역사가 아닌가. 또한 1636년 병자호란은 1년간 의 짧은 역사지만 주권이 무릎을 꿇었다는 국치의 사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무거운 것은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이 낯선 나라로 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천신만고를 거쳐 건너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는 고국의 강변, 그리고 돌아온 여인들에 대한 이른바 순결이란 기준으로 자신의 어머니, 누이들을 비판했던 어리석음들.

지금으로 돌아와서 2015년에 서서 생각해 보자. 우리를 고통 속에 몰아 넣었던 그 때의 일본은 지금의 일본이 아니고, 그 때의 중국도 지금의 중국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을 비난하고 원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상처위에 쌓은 이익을 지키려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이익을 변론하기 위해 역사적인 잘못들이 옳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때 피해자들을 목격만 했다면, 아니 그보다 가해자가 옳았다고 편을 든다면 그들은 분명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과거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역사는 사실 우리가 대개 인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 수는 사실 셀 수 조차 없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야 동서양을 막론한 가장 대규모의 학살이고, 죽임을 당한 이가 최소 600만이라니 너무 엄청나서 실감조차 들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이 어디 그 뿐인가. 난징대학살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과정에서 일어난 보복극으로 죄없는 이들이 30만이나 죽음을 당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해방직후 미군정 때 용공이란 이름을 붙여 제주도에서 4.3사건에 연루되어 민간인만 1만4천명이나 학살되었다. 이 것이 한국전쟁으로 서로 죽이던 사건보다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도란 이름을 붙여서 8,000명을 학살했다. 그것이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같은 해 우리가 엉뚱하게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 빌미를 주게된다. 그것이 병인양요이다. 거기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당시의 프랑스가 강화의 외규장각을 불지르고 많은 우리나라의 자료를 소실시켰으며 그 중에 챙겨간 것이 외규장각도서이다.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이슈화 되었고, 또한 고려 경한의 단 한권 남은 인쇄본 ⟪직지⟫를 발견하게 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프랑스 고속철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조건중에 하나 였으니, 200여년의 사건이지만 결코 옛날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에 시작하여 13세기 까지 무려 200년동안의 서구와 이슬람의 세력들과의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인 명분으로 포장된 전쟁이며 그 고리타분한 감정과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의 관계는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군원정 실패의 결과는 서로의 마음에 원한말고는 남긴 것이 없으며, 서구의 권력과 종교는 결국 이후 연이어 터진 흑사병이란 지독한 공포는 어떤가.

이 실패한 전쟁으로 무너진 사회정비를 목적 으로 다시 마녀사냥이란 학살로 다시 이후 200년간 무려 50만명의 무고한 여성들을 살해하는 역사적인 우를 범하고 만다.


우리가 그 경험을 소중히 해야할 사건도 얼마든지 많이있다. 서구가 존경해 마지않는 알렉산더는 오늘날의 중동을 모두 통일했지만 그것에는 분명 묵은 감정이 없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하면서 각자 정복한 곳의 지도자를 현지인으로 뽑았던 것은 보기드문 전략일 뿐더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스승은 서양철학자의 대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지만,그가 그런 전략을 쓸 수 있었던 가르침을 준 것은 엉뚱하게도 묵은 적의 수장인 다리우스 3세 때문이었다. 그 바탕에 서 헬레니즘이란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화가 탄생했으며 그 바탕에서 최초에 탄생하는 인도의 불상이 서양인의 섬세한 모습을 띄게 되었으니 단일하게 좋은 문화, 나쁜 문화, 이것만이 올바른 문화, 이것은 무조건 잘못된 문화란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좀 더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한 때 가장 강력했던 오늘날의 중동인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와 잦은 전쟁을 벌이면서 그 사이 수 없이 원한을 쌓아왔고 서로 그 원한을 갚고자 했으나 ‘악인’이란 평가를 듣기 싫어서 거기에 온갖 ‘정의’와 ‘대의명분’을 내세웠을 뿐이다. ‘옳기 때문에’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정의의 이름으로’란 명분은 적은 물론, 함께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 이는 것 조차 옳은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 ‘정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얻은 ‘정의’는 정말 ‘정의’일까. ‘붕어빵엔 붕어가 안들었다’는 말처럼, ‘정의’란 때로 그 이름만 ‘정의’ 일 뿐, 그 속에는 ‘정의’가 없다.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그는 누군가가 단죄할 수 없다.재판을 통해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힐 많은 기회를 주고, 누군가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변론한다. 또한 그에게 분명히 죄가 있다면 그 과정을 통해 자신과 연결된 이들의 상처와 눈물을 보며 참회의 기회를 주며, 또한 결과가 불리하게 나도 재심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반복해서 죄가 확실하게 정해졌더라도, 그를 처형시키는 것은 대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복잡한 과정이 분명 죄가 있다고 의심되는 단 한명을 위해 이루어진다.


인류가 지금의 인권을 만드는데 4천년 이상 걸려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대체로 이런 법을 따르고 있으며 여기까지 생각하고 고민하는데까지, 우리가 이 기준에 동의하고 지금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나, 약 4천년 정도가 걸려서 인 류가 만들어 놓은, 인류를 위한 법이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고 하여 총과 폭탄을 갖고테러로 몇십명, 몇백명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고 무고한 이들을 살상하기를 일삼는 이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보다 더한 것은 거기에 대고 갚아 주겠다고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정치와 철학을 배우고,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몽땅 다 던져버리고 온갖 비싼 자원과 기술을 동원해서 만든 대량 살상무기들을 들어부어서 복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그들은 전부 얼마나 어리석고, 황당한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 똑똑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모두 얼마나 우매한가.


우리는 세상을 동서양으로 인식한다. 물론 서양의 기준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긴 시간 강력한 힘을 갖고 우리를 괴롭혔고 지금보다 우리보다 힘이 쎈 일본을 우리는 대개 ‘왜놈’, ‘쪽빠리’라고 표현한다. 중국은 어떤가. 역시 우리는 ‘뙤놈’, ‘짱께’라고 부르며, 서양 역시 그렇게 동경하지만 ‘양놈’일 뿐이다. 그렇게 세계의 덩치 큰 놈들을 한마디로 단정지을 만큼 큰 포부를 가졌지만 정작 그들을 마음으로 끌어안지는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은 어떤가. 동서양 말고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아프리카와 중동에 관해서 커피와 석유, 흑인과 사막에 대해서 말고는 아는게 얼마나 있는가. 유럽이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기 전에 그들은 아시아에 관해서 수없이 알려고 노력했으며, 그 덕에 지금도 미지의 땅에 대해 유럽인들은 가장 전문가임을 자처하고, 유럽인문학계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구하는 곳은 오늘날 인문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공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대처는 지금으로선 뭉친 주먹밖에 보여줄 수 없는 것 같지만.


십자군전쟁 중 황제 프레드리히 2세는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술탄 알까밀과 6개월 동안 협상을 통해 무려 10년 동안 상호살상을 멈추었으며 이 사건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식석상에서 과거의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교황의 자격으로 공식적인 사죄의 메시지를 이슬람에게 전했으며, 역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유대인들의 집단책임이 없다”고 표명했다. 기억하지 못 하는 사건으로 잊혀지고 있지만 이런 태도가 최신 전투기와 미사일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는가.


브레이빅과 시민의식

2011년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2차대전 후 최고의 참사로 평가받는 한 청년의 총기 난사가 일어났다. 77명이 그의 총에 사망했고 그는 1년간의 재판을 통해 21년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그는 명문대학의 입학허가를 받아서 2014년부터 교육을 받고 있다. 일부였지만 오슬로의 시민들은 시위를 했으며, 그 시위 내용은 브레이빅이란 한 악당을 어떻게 처벌해달란 것이 아니라, 그가 극단적인 백인우월자로서 가진, 이슬람을 비롯한 다른 인종을 향한 ‘혐오증’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혐오증에는 사회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는 켐페인이었다.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나쁜짓 하는 이에게 똑같이 주먹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설득하고 이해시켜 함께 같이 살아갈려면 얼마나 많은시간을 참고 견뎌야 할까. 새삼 6바라밀의 ‘인욕’이란 덕목이 왜 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물론, 유럽사회 역시 지금 밀려드는 난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긴 하지만, 불자라면 기본적으로 그들의 출신이나 언어, 생김새로 일괄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가족과 혈육을,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 서로 좀더 위하고 편을 드는 것은 인지상정.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내 가족, 혈연에 대해서만 사랑을 하고 내것을 베풀 것이라면 우리가 타지에 가서 살거나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은 사람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사 람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사람으 로서 대해야 한다.


중앙아시에 강제이주 당해서 사는 고려족이나 만주에서 살다가 조선족이 되어 버린 그들도 우리가 외국인으로 취급하지만 우리의민족이며, 그 반대로 우리 민족자체도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청나라의 공격을 받으면서 몽고족과 여진족으로부터 순수혈통을 지켜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이방인이란 이유만으로는 그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다. 감정이 있는 이들은 사랑받으면 편해지지만, 미움받으면 비뚤어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적으로 여기면 그들에게도 우리는 적이되고, 우리가 누군가를 가족으로 여기면 그들에게도 우리는 가족이 된다. 지식이 있고, 생각이 깊은 우리가 먼저 해야한다.

지금부터 당장 우리가 함께 마음을 연다고 해도, 서로 적의없이 웃으면서 지내려면 아마 지금부터 몇 십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을 또 얼마나 미룰 것인가.

근래 테러와 재해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리랑카, 로힝야, 수없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최근 유행하는

pray for Paris, pray for Italy, pray for Sri Lanka, pray for Rohingya

란 슬로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달라이라마는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만든 테러 때문에 신에게 기도하지 말라, 신은 아마 너희들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할 것이다”

We cannot solve this problem only through prayers. I am a Buddhist and I believe in praying. But humans have created this problem, and now we are asking God to solve it. It is illogical. God would say, solve it yourself because you created it in the first place.

라고 일침을 놓는다.

Screen Shot 2017-09-21 at 9.07.55 AM.png


source_불식 12호
Sort: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드립니다. @millionfist님~

퀄리티 있는 글 잘읽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기독교 이지만,
글에 심히 공감히 갑니다.
더 길게 나누고 싶지만, 이만 줄여보려 합니다
좋은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brianyang0912님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62834.21
ETH 2464.40
USDT 1.00
SBD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