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영화 철학 토론 [004] "물질과 마음은 과연 두 개인가"

in #kr7 years ago
영화 철학 토론 [004] "물질과 마음은 과연 두 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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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81452#955201

마음과 몸은 당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생각은 상당히 보편적이었다. 과학이란 도구가 발달하기 전에는. 마음과 몸이 구분되는가 아닌가란 사실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구분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가?” 아마도 우리는 그동안 대부분 마음이라고 답해왔던 것 같다.

본질과 부분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은 우리의 뛰어난 능력 중 한 가지다.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있다’란 것은, 그 무엇인가가 다른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의 각각에 대해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그게 바로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므로.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해야할 걸 잘 모르는 사람더러 '분별 없는 놈'이란다. 그 구분이 명확해진것 에는 ‘이름’을 붙인다. 다른 말로 ‘정의’ 혹은 ‘개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물을 잘 파악 못하는 사람을 지적할 때 '개념 없는 놈'이라고 한다. 많이 듣고 본 것이 있 어야 하니 ‘견문’을 넓힌다고 한다. 그러니 생각도 본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 ‘견해’이다. 많은 견문을 가진 사람은 사물의 이름을 많이 안다. 많이 본 사람을 예전에는 '식자'라고 했는데 어떤 것을 많이 ‘인식’ 해야 하니 다른 말로 ‘지식‘이라 부르고 지식이 많이 없다고 '무식'하다고 한다.

우리 제호의 불식이란 무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한문에서 불不이란 동사부정이고, 무無란 명사부정으로 '무식'이란 아는게 없다는 말이고, 불식이란 모른다는 뜻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다. 똑똑한 사람은 뭐든 구분이 항상 ‘분명'하다. 그래서 가끔 ‘똑/딱 부러진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세상에 어디하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있던가. 각기 상황이 있고, 여건이 있고, 사정이 있고.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중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보는 것은 물론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김밥에서 김과 밥 중 어느게 더 중요하냐고 물어보는 것 만큼이나 때론 바보같은 질문일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요도가 딱 그렇다.


사람이 모든 보이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은 당연히 마음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사물을 보고 공유되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몸의 영역이다. 마음은 숭고하고 본질적이며 몸은 그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몸과 마음의 구분이란 맑은 물에 섞여버린 우유를 다시 나누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구분하기 어렵다. 당연히 어느 한쪽이 본질적인 것이란 생각은 ‘착오’이다. 우리가 똑똑한 도구의 기준으로 보는 분별력은 때로 끊임없이 사물, 인간, 현상을 둘로 나누고 선/악이나 상/하, 본질과 부분이란 구분을 하게 만드는 고약한 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에서 선악이란게 분명히 나누어지며, 지구란 둥근 행성에 정말 아래위가 있던가.

세상에 악한 행동은 있어도, 악한 사람은 없다.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악한 일에 대해 반성도 불가능하며, 그가 하는 짓은 모두 악한 일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악한 사람도 선행을 하며, 선한 사람도 악행을 한다.

이제 우리가 그동안 사물을 재단하던 구분자를 좀 키울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 현실과 가상, 물리적인 세계와 이론적인 세계가 때로 한 차원에서 동시에 구현되는 사실들이 이제 우리가 그런 고차원의 시대를 인지하고 대비하며 알고 있어야 할 때라는 걸 보여준다. 하다 못해 TV드라마에서 악당은 더이상 못생기지 않았다.

그동안 인지할 수 없던 영역에 대해 귀신의 세계라고 치부하던 것은 첫째는 그 것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뭉뚱그리는게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귀신’이란 영역은 우리 생각의 영역이지 다른 세계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이 우리 마음을 다른 이름으로 ‘귀신‘이라고 불렀다. 물질에도 차원이 있는것 처럼 마음에도 차원이 존재한다.

불교에서 마음의 차원을 어떻게 나누는지 보자.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막연한 것을 느낌을 받는다(受). 그런데 이 느낌이란 영역은 신체의 영역이기도, 마음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질과 마음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는 그 느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도마위에 올린다. 요새식으로 하면 환한 빔프로젝트로 벽에 영상을 쏜다(想). 다음으로 이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行).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알게 된다 (識). 이 ‘식’이란 다른 말로 ‘이름’이라고도, ’개념’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선 마음의 작용에 따라 50종이 넘는 종류로 구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크게 이렇게 4가지로 본다. 이 조합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결국 마음 도 여러 작용이 조합된 조립품이다. 하나의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론으로 한가닥 하던 양반이 의상義湘스님이다. 중국으로 유 학가다가 몇 번을 고구려군에 잡혀서 좌절되고 결국 중국으로 떠난 삼국시대 의상스님의 이야기는 널리 아는 이야기다. 화통한 기질이 있는 우리나라 사 람들에게 더 유명한 사람은 해골물 사건 때문에 원효元曉스님이 훨씬 유명해서 빛이 가려 졌지만, 의상스님의 법성게는 우리가 즐겨 있는 짧은 경문으로 제대로 감탄을 주는 명문이다. ‘법’이란 글자는 인도 말로는 ‘달마’인데, - 그렇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달마이다. - 인도에서는 의무, 진리, 가르침, 규범, 이치, 법칙, 사물, 요소 등등 수많은 의미를 가진 흥미로운 단어이다. 법성게의 법은 그 중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놀랍게도, 진리와 사물을 동시에 가리킨 다. 원래 진리와 현상은 정반대의 것 아니던가.

문학작품도 아닌데, 의상스님은 그 두 개의, 그동안 완전히 구분되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보안던 법이란 주제를 하나로 취급했다. 1400년 전 우리나라에서 이론과 물리의 세계를 그것도 그렇게 짧게 요약할 수 있었다는 건 무심코 넘어가도 되는 사건을 결코 아니다. 물론 그의 사상은 ⟪화엄경⟫이란 큰 바탕에 기초한 것이지만.

우리가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 을 알게 된다면,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구분이 없다는 말은 달리 하면 공간적으로는 그 끄트머리가, 가장 자리가 없다는 말이고 시간적으로는 시작과 끝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불교 에서는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생각할 때 기준을 먼저 두고 시작한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도 않고 방향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망망대해라면 어디에 기준을 두겠는가. 떡파는 노인네가 “⟪금강경⟫에 과거, 현 재, 미래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하였으니 어디에 점을 찍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금강경 도사 덕산스님의 말문이 막혔을 수 밖에.

기준이 사라지면 그 위에서 아웅다웅하고 속상해 하고 싸우고 하는 모든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무분별無分別이란 지혜는 현실에서는 이런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다. 애써 구분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식하다는 말과는 전혀 관련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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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불식 15/04(0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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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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