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와 문과를 이어야 한다 (2편)

in #kr6 years ago

뉴비 철학자 @armdown입니다. 이번 글은 '이과와 문과를 이어야 한다 (1편)'에 이은 글입니다.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연재가 들쭉날쭉하더라도 계속 써갈 생각입니다.

이과와 문과가 구별된 건 순전히 '제도' 때문이다. 명목상으로 이 제도는 없어진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효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우선 대학에 이과와 문과가 엄존하고 있고(교수들은 당분간, 아마도 한참 더, 바뀔 생각이 없다), 따라서 선발 과정에서 이과와 문과에 속하는 학과마다 선택과목 가중치가 달라지고, 이게 되먹임되어 학생들의 교과 선택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현행 문이과 구분과 비슷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꽤 오랜 기간동안 대략 고2 정도에서 이과와 문과를 정하게 되는데(예체능계는 별도의 구별이 없고, 입시에서 선택하는 과목만 다르다), 현실적으로는 수학 과목을 얼마나 잘하느냐 여부에 따라 나뉘곤 했다. 곧 '문과=수포자'가 공식처럼 통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문과라고 수학을 다 못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는 절대시간 자체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은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문과는 본래 수학을 못하거나 관심이 없어서건 공부 시간이 부족해서건 '수학에 약하다'는 귀결로 이어지며, 이과는 본래부터 잘해서였건 공부 시간이 많아서였건 '수학에 강하다'는 귀결로 이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대학에서 더 심화되며, 대학을 졸업할 즈음이면, 수학이 들어가는 영역과 관련해서는 어지간해서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경제학이나 통계학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가 여기서부터 드러난다. 지난 1편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과와 문과 두 영역을 모두 공부한 경험이 있고, 두 커뮤니티의 차이를 꽤 많이 느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학'을 중심으로 이과와 문과의 차이를 구분한 건 실제 현실에서 구분 기준이 그렇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 '수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다.

수학이란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교과목은 아니다. 수학은 그 자체로도 논리적 체계이지만 자연과학 및 응용과학(공학)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자연어와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에 두 종류의 언어가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왜 이과와 문과의 벽이 그렇게 높은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래에 내가 지은 책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에서 이 둘의 차이를 서술한대목을 덧붙인다.)

"과학혁명의 진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기에는 기존 세계가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우리 세계의 터전에 있다는 점이 처음 알려진 겁니다. 과학혁명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들human experiences이 자연의 실상과 다르다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경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이 세계는 수학이라는 언어를 통해서만 포착됩니다. 그래서 과학혁명 이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둘이 되었어요. 하나는 일상어이고 다른 하나는 수학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일상어를 쓰지만, 여기에 더해 수학으로 기술되는 자연과학이 창조된 겁니다.

1만 년 전 인간과 지금의 인간은 몸으로 하는 경험에 있어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대략 1세제곱미터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물들은 대략 그 규모를 기준으로 지각됩니다. 실내를 한번 둘러보세요. 그것보다 워낙 크거나 작은 것은 접하기도, 접근하기도 힘듭니다. 인간중심주의가 생겨난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자연과학이 발전하기 전, 그러니까 15~16세기까지를 염두에 두면 세계에 관해 얻은 지식은 모조리 감각을 통한 지식이었습니다. 태양이 쟁반 정도 크기에 200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고 아는 식이었지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래서입니다. 해와 달이 비슷한 크기로 비슷한 거리에 있다고 보았던 거죠. 그런 수준의 지식으로 논의된 철학은 자연에 대한 앎과 관련해서는 별로 쓸모가 없어요. 가치와 관련된 논의들, 가령 윤리학이나 미학 같은 철학 논의는 여전히 통찰을 주고 있지만요.

실제로 측정해보면 태양은 빛의 속도로 8분 19초 걸리는 먼 곳에 있고, 평균 지름은 지구의 109배입니다. 우리 세계를 실증적으로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은 수학과 과학이 알아낸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보통의 감각으로 아는 세계와 차이가 너무 커요. 이제는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인 휴대전화는 철저하게 수학과 과학과 공학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그 세계가 진짜 발판이지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상 언어로 포착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데카르트나 로크 등 근대철학의 시발점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자연과학이 알려준 세계에 충격을 받았고, 어떻게 해야 실상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체험으로 실제 세계를 정확히 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근대철학에서 인식론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ge이라는 분야가 탐구한 물음입니다. 인식론은 근대철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261~263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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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문, 이과라는 개념 자체가 없더라구요...ㅠ
오히려 지금 제도가 학생들의 재능을 '문' 또는 '이' 한 분야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정작 대학와서 보니 문과도 수학 필요로한 분야가 많았습니다.경영학을 공부하는 저도 요즘 다시 EBS펴놓고 수학 공부하려 합니다ㅎㅎ

맞습니다. 우리가 어정쩡하게 일본 제도와 미국 제도를 섞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측면이 강하지요.
일단 그렇게 정해지고 나니,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Liberal arts가 달래 Liberal이 붙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유래를 따지면 liberal은 '자유시민'이 갖춰야 할 학습 내용이라는 뜻으로 붙은 수식어입니다.

저도 문과와 이과를 굳이 왜 나눠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같은 컨버전스 시대에 말이죠.

문제는 이미 나눠진 걸 합치는 게 만만치 않다는 점이죠. 교수들부터가 바뀔 의향이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지금의 아이폰과 갤럭시를 보아도 문과와 이과의 접합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분야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없지요
지금은 교육도 통합으로 가르쳐야 할 거 같습니다.
물론 수학이 높은 장벽이 될지라도요

수학이 큰 문제이긴 한데, 요즘 논의들을 보면 수학을 모르는/못하는 사람들이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측면이 크더라고요(시민학부모단체 포함). 이렇게 가다간 정말 망합니다 ㅠㅠ

통섭이군요 ㅎㅎ
원래 철학자가 과학자를 겸하던 시대가 있었죠... 오히려 기본적인 연산은 컴퓨터가 해줄 수 있는 지금은 근대보다 그게 용이한 면도 있지 않을까... 저는 문송이지만 조심스럽게 그렇게 한번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책도 꼭 사서 읽어야겠네요

사실 수학은 과목이라기보다 논리 또는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건데, 단순한 계산으로 폄하되고 오해된 측면이 많습니다. 논리 능력은 시민의 필수 덕목인데 말입니다.

마침 제가 몇일 전에 쓴 글과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신기하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팔로우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많이 공감합니다. 특히, 모든 학문의 베이스는 철학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술력의 밑 바닥에는 올바른 사상과 감성이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면에서 댄 라미머의 DPOS를 주장하면서 계속 애기하는 오스트리아학파 애기가 생각이 납니다.
언제나 기술의 바탕에는 사상과 감성, 올바른 방향으로의 인도가 필요하겠네요.

그러니까... 이과 문과 합치기 가즈아!

제가 스팀잇의 철학을 재구성해 보려 합니다^^

계속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는 글 같습니다. 사실 수학과 과학도 다 철학에서 출발한 거 아닐까요? 제가 철학과라 너무 철학에만 중점을 두고 본 것일 수도 있지만요 ㅎㅎ 말씀하신 '감각을 통한 지식' 말씀하시니까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데카르트가 감각을 통한 지식은 무조건 의심하라고 했던 문구가 떠오르네요.

달이 '감각'을 통해서 보면 손가락 한 마디 보다도 작지만, 우리의 '이성'으로 추론하면 엄청 거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당시엔 참 재밌고 충격적이었어요 ㅎㅎ 앞으로도 선생님 글 자주 보고싶습니다!

철학을 하셨군요^^
처음엔 철학=학문이었는데, 점점 분과화되어 지금에 이르렀지요.
저도 포스팅 잘 따라다니며 배우겠습니다.

선생님처럼 전문적이게 철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선생님을 스팀잇에서 만나볼 수 있게되어 참 기쁘고 행복합니다. 선생님께 많은 지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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