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휴일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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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사적인 사진이다. 소중한 이에게 받은 수첩이다. 이런 사진을 올릴 땐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작년부터 여행에 가거나, 길가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이나 꽃, 풀잎들을 보면 주섬주섬 주워오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일기장에 붙여지거나, 다른 이에게 편지로 전해지곤 했다. ((그래서 오늘 보얀(@levoyant)님의 을 봤을 때 반가웠다. (늦더라도 댓글을 달아볼까?))

오늘은 간만에 맞는 휴일이였다. 며칠 전부터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지만, 마음이 편했는지 한두 시간 정도 더 잘 수 있었다. 선잠과 함께 기묘한 꿈을 꾸었다. 일어나선 책을 읽었다.

어제는 연체가 한참 된 책을 반납했다. 자연스럽게 한동안 책을 빌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속이 다 후련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저주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오늘 읽은 책은 심리 에세이였다. 원래 나는 소설만 읽지만, 선물 받은 책이라 한 번은 읽고 싶었다. 읽으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못 읽고 반납한 저번 책과는 달리 술술 읽혔다. 책에선 집요하리만큼 유아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와닿진 않으면서도, 몇 부분은 공감이 돼 밑줄을 긋기도 했다.


뒹굴거리기도 하다가, 연습도 하다가, 뭘 주워 먹기도 하다가, 짧은 산책도 했다가, 다시 돌아와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책 한 귀퉁이에선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의 일화가 나와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을 보고 우울증은 체조만 해도 낫는다고 조소했던 이야기였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미시마 유키오도 스스로 할복해 죽었다)

이상한 데에 꽂혀 읽던 책을 접었다. 오늘은 다자이 오사무나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었다.

책을 읽게 되면 왜 책에 나오는 여자에게 이입하게 되는 걸까? 실제 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오롯이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 번 그런 기분을 느꼈다. 왜지?


오늘 보려고 받아 놓은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였다. 며칠 전부터 OST를 들었다. 몇 년 전에 봤는데, 그때도 이 영화가 좋았다. 나는 대놓고 촌스럽고, 대놓고 뻔한 영화를 가끔은 좋아한다. 이 영화도 그런 류다. 영화에 짙게 배어있는 음울한 기운도 좋다. 기타노 다케시도 좋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좋다.


< Joe Hisaishi - Thank You...For Everything >

며칠간 이 곡을 무척 많이 들었다. 가볍게 듣기엔 무거웠지만 어쩌다 보니 계속 듣게 됐다. 곡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엔딩인데, 영화를 안 본 사람에겐 스포가 될 수 있으니 다른 곡을 하나 더 얹는다.


< Joe Hisaishi - Ever Love >

(그래도 역시나, 처음 올린 곡이 훨씬 더 좋다)


오랜만에 읽은 책은 참 좋았다. 예전부터 일본 소설을 좋아했다. 그때는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를 좋아했는데, 그때도 다자이 오사무가 싫지 않았다. 인간 실격을 꽤 여러 번 읽었었다. 그 무렵 다자이 오사무는 내가 읽던 책 중에선 꽤 무겁고 진중한 작품에 속했다.

요즘의 내가 다시 읽는 다자이 오사무는 새로운 느낌이다. 어두워서 좋았던 글들이, 너무 어두워서 버겁게 느껴지곤 한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기엔 내가 너무 밝아져 버린 것도 같다.

아까 읽던 심리학책에서는 양가감정의 통합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다. 나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이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어두운 부분을 아주아주아주 깊은 곳에 잘 묻어놓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시 드러나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시간이 금방 지나 하나비는 못 봤지만 하고 싶던 일들을 꽤 많이 했다. 오랜만에 혼자 맥주도 한 캔 마셨다. 그래서일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두서없이 주절대고 말았다. 좋은 휴일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 몇 개만 남겨본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밤이나 매화꽃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루 끝의 유리문을 열면 언제나 매화 향기가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삼월 말경에는 저녁이 되면 으레 바람이 일어 내가 저녁 어스름할 때 식당에서 상을 차리고 있으면 창으로 매화 꽃잎이 날아와 그릇 속에 떨어져 물에 젖곤 했다.

아. 아무것도, 전혀 숨기지 않고 쓰고 싶다. 이 신장의 평온 모두가 거짓의 표면, 그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

'사랑'이라고 쓰니까, 그 뒤가 써지지 않는다.

나는 전등을 껐다. 여름 달빛이 홍수처럼 모기장 속에 넘쳐 들었다.

인간은 거짓말을 할 때는 틀림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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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은 아름다움입니다.

짧고 아름다운 문장이네요. 매 상황에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가끔 부끄러워질 때 이 댓글을 생각해야겠어요.

책을 빌려서 연체도 하시는군요! 왠지 연체같은 것은 안하실 것 같은데.. ^^ 바쁘게 사시니까 그럴만도 합니다. 저는 빈둥거려도 매번 늦게 반납..
수첩이 문구코너에서 팔 법한 실루엣은 아닌 것 같애요. 속지도 한지 같은 그런 무늬가 있고. 수첩에는 잘 없는 무늬잖아요. 나뭇잎이 참 잘 어울려요. ^^

ㅎㅎㅎ 바쁘게 사는 건 아니고, 바쁘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것도 같아요. 근데 저 진짜 한가하답니다. 이번엔 한 번 반납을 밀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미뤄진... 그간 반납 때문에 스트레스를 꽤 받았네요.

수첩은 해외에서 샀다고 해요. 저도 저런 수첩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뭇잎이 그려진 수첩도 좋아하고요. 찹촙님께도 제가 좋아하는 수첩을 선물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드네요.

틀자마자 들리는 첼로의 저음이 마음에 울려요.

말씀을 듣고 다시 음악을 들어봤어요. 저도 현악기 중에선 첼로를 가장 좋아합니다. 묵직한 저음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울리는 것 같아요. 잠깐이나마 음악을 듣는 동안 평온하셨길 바랍니다.

어쩌다보니 하나비가 디비디로 있는데 아직 본적은 없네요. 좋아하신다니 언젠가 한번 보기로!

제이미님의 댓글을 보니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죠? 이상하네요. ㅎㅎㅎ

그나저나 하나비가 디비디로 있다니(?) 디비디로 있기 쉽지 않은 영화인 것 같은데요. 제이미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습니다ㅋㅋ 그 '어쩌다보니'의 사연이 무척 궁금해지네요.

의외로 절찬리에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아니라도 디비디로 나온거 굉장히 많은데...(철십자 훈장, 독일0년, 파솔리니 영화들 이런거도 갖고 있으니깐요) 디비디 자체가 사양산업이 되면서 공장들이 예전에 다 망했죠. 그래서 어릴때 덤핑 가격으로 엄청 많이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중에 하나비도 있었을 뿐이죠, 별 사연은 아니고. ㅎㅎ

앗... 그렇군요. 제이미님은 사소한 일들에도 이것저것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있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말씀해 주신 영화들은 하나라도 찬찬히 찾아볼게요:)

ㅋㅋ참 나루님 저랑 웹진 같이 하실래요?사실 정체성이 웹진만은 아닐 것 같다만 편의상 그렇게 부릅니다.

앗! 아니 설마! 타인을 위한 오마주에서 언급하셨던 그 웹진인가요? 너무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는데요? 얏호!!!

넹 사실 웹진은 제가 생각하는거보다 넘 딱딱한 개념인데 지금 명칭은 생각 중이고...여러 채널이 있는? 뭐 그런 개념이에요.

부드러운 웹진이 되겠군요?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우면서 기분 좋으면서 어깨 으쓱으쓱하게 되네요. ㅋㅋ

한동안 일본소설들을 즐겨 읽었는데, 어느 순간 소설이 아니라 일과 관련된 것들만 선택해서 보고 있더라구요-이번 주말은 다시 소설 책을 좀 들어봐야겠어요!🙏

봄봄님이 좋아하시는 일본 소설이 뭔지 궁금해요. 몇 개만 알려주세요!

(+ 일과 관련된 책들은 어떤 것인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주말엔 책을 조금 책을 들여다보셨는지도 궁금하구요.)

한참 동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책들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어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다 슈이치...작가들에게 빠져서 읽던 기억들이 납니다. 이후로는 일과 관련된 책들을 보다보니 광고 전략이나 디자인 관련 서적이 주요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개인적인 취향으로 놓지 않고 계속 모아보는 건 건축 관련 책이구요! 주말 동안은 소설은 아니었고, 정재찬님의 에세이 ‘그대를 듣는다’가 함께 했네요. :)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책이라고 하니까 문득 도쿄기담집이 떠올랐어요. 여름이라 그럴까요? 아무도 모르는 책까지 읽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나요. 요시다 슈이치는 왠지 낯서네요. 찾아보니 악인 말고는 읽어본 책이 없군요...

일과 관련된 책을 보는 게 참 쉽지 않던데, 끝없이 책과 함께하시는게 참 좋아 보여요. 저는 스무 살이 지나고 한참 책과 멀어졌던 시기가 있거든요. 주말을 함께 보낸 책 제목이 참 따뜻하네요. 왠지 정지찬이 떠올라서... 더욱 궁금해지네요 ㅋㅋ

스팀잇은 유튜브 재생하면서 댓글 달 수 있어서 좋아요
저도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 것은 많이 읽었는데 다자이 오사무 소설은 손 대보지 못했네요
많이 어두운 편이군요?

편안한 하루를 보내신 것 같아 일기도 편하게 읽었습니다 ㅎㅎ

네 편안한 시간이었어요. 함께 편안함을 느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책을 좋아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다자이 오사무는 친한 친구가 격하게 좋아해 저도 저절로 보게 됐어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두운 무게가 느껴지긴 합니다.

음악도 좀 들으시고~
오늘도 즐거운 주말 마무리하세요~

ㅎㅎ 감사해요.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요즘은 통 음악을 안 듣게 되네요. 가끔 좋은 곡들 있으면 소개도 해주세요:) 다가올 한 주도 힘차게 보내시구요!

저는 몇일전에 기쿠지로의 여름을 다시 봤는데 하나비도 히사이시조가 음악감독을 맡았군요. 하나비는 어떤 영화일지 궁금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 OST Summer! 이거 진짜 많이 들었는데, 저도 기쿠지로의 여름은 한 번도 안 봤네요. 기쿠지로의 여름은 어떤가요? 괜히 여름 다가오니까 그 영화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네요.

저런걸 양가감정이라고 하는군요 하나 배워가네요.

제가 여기서만큼은 다크포스 철저히 봉인할 것이고 또 잘 숨겨왔다고 자평했었는데,오늘 뒹굴면서 그간 써온 글들을 보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본색이 드디어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느낌이 들더군요ㅋㅋㅋ근데 뭐 드러나면 드러나는대로 그게 나 아니겠습니까.어쩔 수 없죠 뭐..아휴 속이 안 좋아서 하루종일 뒹구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네요ㅎ

기타노 다케시는 저도 참 좋아해요.과거 행적들 살펴보면 이 형님도 거의 영화 케릭터가 본연 그대로의 모습 아닌가 싶어요.후덜덜.그래서 좋아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원래 다크포스가 있으신가요?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요. 선셋님의 봉인 풀린 제대로 된 다크포스 정말정말 궁금합니다. ㅎㅎ

속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길래 걱정했어요. 맛있는 거 먹고 탈 나면 더 속상할 것 같아요. 몸 좀 나아지면 한 번 더 제대로 보양하셔요. ㅎㅎ

기타노 다케시야말로 다크포스가 철철 풍기는 것 같은... 하나비가 좋은 것도 기타노 다케시기 때문이에요.

선셋님 덕분인지 주말 즐겁고 평안하게 잘 보냈습니다. 선셋님도 다가올 내일부턴 병이란 훌훌 털어버리고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꽃같은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수첩이네요. 정말 멋집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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