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청자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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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특별한 아이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맨날 쳐야 하는 체르니, 소나티네엔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음악에는 무척 관심이 많았다. 나는 명절에 받는 용돈으로 매번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를 사러 다녔고, 그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곤 했다.

그 무렵 이상하게 눈길이 가던 남자애가 있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우리는 이상하게 잘 맞았다. 아무도 하지 않는 행동을 우리 둘은 하고 있었다. 테이프를 사서 음악을 듣는 일, 오래된 가수를 더 좋아하는 것, 밤마다 라디오를 듣는 것들이었다.

그런 취향을 알게 된 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초등학생 때는 성을 빼고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서로 좋아한다며 놀리기 일쑤였는데, 우리는 너무 붙어 다녀 그런 놀림조차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보았을 땐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순수하게 취향을 공유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바로 그 친구에게 집으로 전화가 왔다.

"방금 그 곡 녹음했어?"
"응."
"나 빌려주면 안 돼?"
"나부터 듣고 빌려줄게"

이런 식의 대화였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날 교실에서 만나 전날 들은 라디오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곡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풍 날은 대화가 무르익는 날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를 바리바리 챙겨와 기사님께 틀어달라고 부탁하고, 서로의 음악을 공유하곤 했다.

나는 자주 가던 음반 가게에서 500원짜리 악보 피스를 자주 샀고, 점심시간이 되면 그 친구와 함께 그 악보들을 들고 음악실로 올라갔다. 나는 가요를 아주 서툴게, 자주 틀리게 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방금 그 부분을 몇 번 더 쳐달라거나, 혹은 이 부분은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다는 식의 코멘트를 주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친구보다 점심을 늦게 먹었지만,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칠판 앞에 함께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자기가 3분 안에 눈물을 흘리겠다면서 내 앞에서 눈물 연기를 했고, 나는 너무 억지스럽다거나 혹은 어제보단 낫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함께 강산에 공연을 보러 간 일이다. 우리의 숙원 사업이었는데, 그때 엄마가 동행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공연장은 학교와 꽤 먼 곳에 있었다. 초등학생 신분으로는 돌아다닐 수 없는 늦은 저녁에, 집과 아주 먼 곳에서 그 친구와 공연을 봤던 건 내 인생 최초의 일탈이었고, 잊을 수 없는 청량함을 주었다. 공연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그 둥그런 모양의 객석은 아직도 선명하다.

6학년이 되고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지만, 서로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도 예전만큼은 자주 보지 못했다.

나는 2학기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집 근처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서로의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연락이 끊어졌다.

스무 살이 지나고 몇 번 동창회에 나갔던 적이 있다. 나는 그때마다 그 친구의 소식을 물었다. 그 친구도 얼마 안 가 서울로 올라갔다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흔하면서도 쉽게 들을 순 없는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가끔 검색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떤 예술대학교의 작품이 뜨곤 했는데, 그게 그 친구가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함께했다.

오늘도 그 친구가 떠올라 검색을 해보았다. 비슷한 검색 결과였지만 왠지 오늘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찾아보다 그 친구의 프로필을 보게 되었다. 사진을 보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친구였다. 어릴 때랑 똑같은 모습에 괜히 마음이 이상해졌다. 프로필에는 키가 188cm라고 적혀 있었다. 그땐 나보다 작았는데. 새삼 세월의 거리가 느껴졌다. 나는 초등학교 때 키 그대로인데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 기억하고 있을지, 가끔 내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자신의 길을 이어간다면 몇십 년 뒤라도,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반가울까? 아니면 못 견디게 어색할까. 오늘은 괜히 재회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너 지금은 진짜 잘 울겠네?"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때보단 피아노를 좀 더 잘 치게 되었다고. 지나고 보니 내 음악의 첫 번째 청자가 너였다고. 그땐 몰랐지만 네가 있어 많은 힘이 되었고, 그래서 정말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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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고 싶다! 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예요. 엄마 미소를 거둘 수가 없네!

저도 아빠미소 흐뭇~^-^

글을 읽으면서 계속 흐믓함이.ㅎㅎ
그 친구 정말 다시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으실 거 같아요.
언젠가 꼭 다시 만나시길 빌어요~~
첫 번째 청자라는 말 너무 좋네요 ^^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를 꼭 만나 뵙기를 고대할께요.

동명이인일지 모르는 예술학교 작품 크레딧의 이름...을 보고 궁금해해본 적이 있어 살짝 공감이 가네요.ㅋㅋ

이거 왠지 설레이는 러브스토리로 갈것도 같은 개연성이 있어요. 꼭 만나봐요. 저는 초딩때 엄청 조아라했던 여자애를 만났어요. 작업에 실패했지만, 시바 (그것도 벌써 20년 다돼가네요)

나루님께서 왠지 러블리 캐미가 스믈스믈 動하는 기미가 냄새납니다. 킁킁킁.

초등학생때 둘이 '강산에 공연'을 보러 갔다니요.. 와 놀랐습니다 ㅎㅎㅎ

풋풋한 추억이네요.ㅎㅎ 연락한번 해보세요.

기억을 떠올리시는 걸 보니 조만간 만나실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싶게 말문이 트일겁니다. 순수한 시절의
친구는 그렇거든요. ㅎㅎ

너무 아름다운 어린시절인 것 같아요. 읽는데 저도 모르게 미소가 :D

검색해서 나오는 그 친구는 누구일까요? 6학년일때 음악을 공유하며 친해진 친구라면 지금도 멋질거 같아요. 이야기가 다.. 너무너무 멋져요 ㅎㅎ

흔하면서도 쉽게 들을 순 없는 특이한 이름

그런 이름은 도대체 무슨 이름일지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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