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in #kr-writing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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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오늘은 유서를 쓰기로 한다. 너무나 완벽하고 멋져서 감당할 수 없는 하루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기에 오늘 죽어도 내일에 대한 아쉬움이 없기 때문이다.


어설프지만 제법 진지했던 자살 시도 전에도 유서를 쓰지 않았다. 그동안의 일기를 본다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는 충분했으리라,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은 없었다. 존재조차 지울 수 있다면 다 원점으로 되돌린 채 먼지가 되어 점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한 공백으로 사라지길 원했다. 그것이 이미 불가능하단 걸 알았을 때 허망하면서도 안도했다.



순진한 구석은 있었지만, 오늘의 나는 스스로 운명론자가 되었다. 고통 속에서도 고통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면서도 삶의 본질이 고통뿐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인생이 있지 않을까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가 좀처럼 변하지 않을 거라 자책하면서도 언젠간 진심으로 변화되는 시기가 오고 정답을 찾을 거란 흐릿한 희망의 끝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의 나는 내 삶의 모든 것을 긍정한다. 운명은 내가 선택해서 집어 드는 것이지만, 무엇을 집어 드는지도 모른 채 괴로워하며 랜덤으로 살아온 지난 생은 운 좋게도 너무나 완벽했다.



다만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들에 뜯겨 나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가 아니라, 이제는 비로소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 상념과 불안들이 어떻게 나를 깨웠는지를 이해한다. 그 모든 게 필요했다. 그 모든 게 필요했던 시기에 내게 일어났고 불만 불평에 잠겨 삶을 어찌할 바 모르고 휘두르는 그런 과정까지도 전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라도 생략되었다면 지금의 모습과 다를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높은 자아존중감을 지니고 싶었고 그것이 인생의 열쇠라는 걸 머리로 그리고 학문으로 세상의 목소리로 배워왔다. 그것을 쫓을 때는 영원히 가질 수 없었다. 가끔은 그것을 버린 채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려고도 해봤다. 그 대안적 태도는 늘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고 한층 더 깊은 구덩이로 나를 몰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고 종국엔 지쳤다. 영원히 그곳에 갇혀 나올 수 없으리라 많은 날을 울며 이런 나를 저주했다.



180도 변화가 필요하고 내 안의 근본적인 형태들을 고치고 또 고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피해야 비로소 그 고통에서 벗어나 괜찮아 질 거라 믿었다. 그 모든 변화를 위해 억지로 뜯어내고 덧붙이느라 아파하고 괴로웠던 무리한 공사들이 지금은 꿈결 같다. 안쓰러워 말리고 싶은 마음은 과거의 것이다. 내 생애 그 모든 헛된 강요들은 나를 죽이고 다시 살기 위해 필요했다.



자아존중감은 필요 없다. 나를 사랑하는 일도 그다지 중요치 않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 바깥의 개념은 나머지 이름들과 피상적 결과물은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를 내내 의식하며 이런 나를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느라 진정 나를 만날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세상에 나를 입증하는 일을 그만두어도 좋다는 걸, 내 존재감을 어필할 필요가 하나도 없이 그저 걱정 없이 즐겁게 노니며,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생기나 관전하며, 뭐하나 애쓸 필요 없이 나 같은 걸 창조하면 나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게 내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나를 긍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의미의 함유였다. 내가 다시 울 걸 안다. 어떤 날엔 이 유서를 찢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확신한다, 내 안의 힘을. 내가 다시 절망한다면 그것 또한 괜찮다, 그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단단한 마음으로 더 오래 확실하게 나를 깨운 채 더 많이 웃을 방도를 찾아 더 가볍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니.



이제 일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나는 성취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쥐어진다 해도 나를 창조하지 않고는 불행했을 것이다. 채워지지 않아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 나는 그저 나를 쓰고 싶다. 그거면 된다.



나는 나를 모를 때조차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조차도 사랑했다. 사랑을 중시했고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을 사랑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내가 살아남은 건 다 그 덕분이었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모든 불안과 결점, 부자연스럽고 어두운 언사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한 사람들은 내가 보지 못한 진정한 내 존재를 그저 바라봐 주었다. 뭔가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이 너를 특별하게 해준다고 힘주어 손을 잡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때로는 더 깊이 나를 사랑하게 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했고, 나를 발견하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헤매는 방황 속에서도 북극성 같은 빛나는 지침이 되어주었다.



고마운 인연들을 많이 놓쳤다. 충분히 감사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걸 안다. 다시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랑을 말하게 되었다. 내 삶은 그대들의 사랑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우주처럼 물질처럼 존재로서 조건없이 당신을 사랑하듯 인내심 있고 온화하고 배려 있게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 나도 그대들을 그만큼 사랑했다.



남은 날도 또 죽음 사이에도 살아 있게 된다면 그저 오늘 같았으면 한다. 내 존재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채 손님이 되고 웃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반짝거리며 현재의 반점을 하나 남기고, 글을 쓰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새로움에 열려 있고, 내일을 꿈꾸길 바란다. 동시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을 준비하고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길 바란다.



나 이외에도 그대들 이외에도 수많은 존재들이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갈 것이고, 어쩌면 나 역시 다시 태어나서 이 삶을 반복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눈 감으면 내 세상은 소멸하나 그게 우주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종국에는 내가 되어 나를 쓰고 많이 웃고 춤추고 감동하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고마웠다. 많이 감사했다. 너무 많은 걸 받았다. 기쁘게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유서를 고쳐 쓰지 않길 바란다.



-2020년 12월 2일, 고물,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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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세요...!!

뜬금없니 나타나서 유서투척! ㅋ 어떻게 지내시나궁금했어요 :D

역시 사랑이 짱입니다.

사랑이 일번이죠 짱짱짱 , 그 와중에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후후.

유서... 깜놀이요. 재산분배 이야기가 빠진 것 같아요.^^

하하하하..서프라이즈!
반가워요 레이븐님 아마 분배할 재산이 없어서 빠진 것 같아요.

사랑넘치는 완벽한 하루를 사셨군요.
저는 요즘 찬바람이 깊이 들어왔는데
사랑을 떠올리니 훈훈해 지네요

내 삶은 그대들의 사랑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raah님 반가워요 !
날은 춥지만 어제는 자체 발열 무지무지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하루였어요
오늘 라님의 하루를 어떠셨을지

오랫만이에요^^

오 이 글도 봐주시다니 :D !! 감개무량 ㅠ

많은 생각이 드는 유서 잘 읽었습니다 ㅠ
스팀과 스달은 저에게 양도부탁드립니다 ㅎ

내가 1빠임

앜ㅋㅋㅋㅋㅋㅋ 드릴 수 있는 게 이제 거의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못 드릴 것(?) 같아요. 남편이 절 보살피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해서 ㅋㅋㅋㅋ

아이고, 오랜만에 뵙는데 유서글부터 보니까 맘이 좀 그러네요~
그래도 잘 살고 계신거죠? 반가워요~

앜ㅋㅋ dj님 엄청 행복하다는 반증이에요, 이상하게 행복하니 유서를 쓰고 싶더라는
잘 지내요 dj님도 잘 지내시나요? 보고싶었어요!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건가요?
새로운 삶에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이상하게 삶을 정말 긍정하게 되니 유서가 저절로 써지는 마법,
마음껏 살고 싶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축복과 행복을 빌어주셔서 감사드려요+_+!

환영합니다. 오랜만이에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해요 qrwerq님 보고 반가웠어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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