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설악산에서 <나 이거 할 줄 알아>

in #kr-travel6 years ago (edited)

‘내 다신 이 산에 오르나 봐라.’

등산에는 젬병이다. 중간에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었던 적은 한두번이 아니오,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늘 그룹의 꼴찌를 도맡았다. 가장 체력이 좋았어야 할 것 같은 20대 초반에 함께 설악산을 등반한 선배 하나는 내 배낭을 대신 짊어지고 올라갔으며 후배 하나는 나를 전담마크했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는 설악산행을 곧 물 만날 물고기처럼 기다린다. ‘드디어 몸을 풀 때가 왔군.’

우리가족 여행지는 늘 설악산이었다. 내가 한국에 오면 네 식구가 함께 하와이에 가자느니 태국에 가자느니 작년부터 말이 나왔지만, 이번에도 역시 설악산이었다. 아빠가 사랑하는 설악산.

언제나 지친 우리를 독려하며 이끄셨던 아빠는 4년 사이에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몇 시간이나 뒤쳐지시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다치신 아빠께 ‘이제라도 저를 이해하게 되셔 다행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다행이긴 무슨.

반면, 그 사이 나는 산을 껑충껑충 오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저질체력이었던 적이 또 있던가’ 를 자문하는 요즘같은 때 말이다. 체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힘들거야’ 라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을 때는 도대체 이 고생이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 ‘좋을 거야’ 하며 발걸음을 내딛으니 설레고 신이 나는 것이다.

페루 와라스에서 4600미터에 놓인 69호수까지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출발점부터가 해발 3900미터인 고산지대였다. 산 중턱에 놓인 에메랄드 빛 호수를 보려고 수많은 여행자들이 숨을 헐떡이고 어지럼증을 겪으면서도 그 산에 오른다. 그때도 나는 꼴찌 그룹에서 헤매고 있었다. 도시락으로 싸온 볶음밥(전날 중국집에서 먹다 남은 것)이 세상 꿀맛이었다는 것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후, 아르헨티나 엘 찰텐의 해발 3400미터 피츠로이 봉을 보기 위해 등산을 했을 때는 일행의 가방을 들어주고 신발끈을 묶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스페인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도, 나는 남들보다 걸음이 느리니 늘 한두시간 먼저 출발했고 그저 800km 를 완보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세 다리에 근육이 붙고 몸이 가벼워진 덕분인지 함께 출발한 순례자들보다 이틀을 앞서가게 되었다. ‘언제 끝날까’ 싶었던 순례길 여정은 ‘겨우 이것밖에 안남았다니’ 하는 아쉬움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성취의 경험’,
아니더라도 ‘즐거운 경험’ 은 삶에서 무척 중요하고 필요하다. 만약 내가 산을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든가 순례길 내내 아프거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그 둘은 내게 피하고 싶은 고난이나 넘어야할 장애물처럼 기억되었을 지 모른다. 요리가 내게 그렇듯이.

대신 이겨내거나 이뤄내면 안다. 내가 얼마나 멋지고 강한 사람인지.

전날 폭우처럼 쏟아지던 비는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는 부슬비로 변해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 진흙탕을 며칠이나 걸어본 일이 있기에 겁이나 걱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 설레기 시작했다. ‘나 이거 할 줄 알아.’

남미여행을 함께 했던 트레킹화를 신고, 순례길을 함께했던 가방을 메고 판초를 뒤집어 썼다.

<페루 와라스 69호수>

<아르헨티나 엘찰텐 피츠로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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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곧 자신감이죠 스필님
산티아고까지 가셨으면 이미고수죠
최고의 경치 최고의경험이네요ㅎ
비록 국내지만
자전거 국토종주
100km 행군
반년 연탄배달
지리산 종줔
이정도했더니 인생자체가 만만해요ㅋ

자전거 국토종주와 반년 연탄배달! 종아리가 단단하시겠습니다 +ㅁ+ 지리산은 한번도 올라본 적이 없는데 어떨 지도 궁금하고요. 경험이 곧 자신감이 되려면,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 같아요! 때론 경험때문에 더 겁이 생기니 말예요. 아직 인생이 만만하진 않지만, 점점 친해지는 것은 같습니다 :)

800km를 단숨에 날아다니셨군요. 아쉬울 정도였다니...ㅎㅎㅎㅎ 자꾸 이렇게 띠엄띠엄 오시면 서운한 독자들이 한둘이 아닐겁니다라고 대표독자로 징징대봅니다. 가족들과 함께 한 설악산에서 날라다니셨을 봄님 생각하면 오늘은 맥주나 한캔 들이켜봐야겠습니다 ㅎㅎㅎ

왜때문에 제 생각을 하시며 맥주를 ㅎㅎㅎㅎ 저 설악산 날라다닐 때(?) 에빵님은 슉슉 잽을 날리셨을까요 :D 대표독자님♡ 에빵님이야말로 바쁘실텐데 늘 잊지않고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가셔서 감사해요.

와라스 호수~~~~~! 흐아......아몰랑 풀봇부텀 하고...
맞아! 이거 나 할줄 알아!.......이거 놀라운 한마디네요!
스필님의 순례기 읽은 후 문득문득 나라면 할 수 있을까?-생각해보곤 합니다. 피가 한번 끓어야겠어요! 아쟈!

그럼요! 타타님이라면 순례길을 듬뿍 느끼고 오실 것 같은데요. 무릎만 튼튼히 보전하셔요! ㅎㅎㅎ 몸과 짐이 가벼울 수록 마음도 가벼워지는 길이랍니다 :)

사진은 폰으로 찍나요? 충전은 어떻게 해요?

요즘 핸드폰으로도 잘 나올 것 같은데 저는 카메라로 찍었어요. 충전은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들의 숙소에서 하면 됩니다 :) 알베르게는 도미토리가 대부분이나 취향이나 상황에 따라 호스텔이나 호텔에서도 묵을 수 있어요.

오....점점 그림이 전두엽에 그려지고 있어 어떡해......

이젠 아무도 타타님을 말릴 수 없다! ㅋㅋㅋㅋ 출발!

스크롤을 내리기 전 와라스의 69호수, 피츠로이를 글자로만 접하고도 바로 풍경이 떠오르니 저의 간접 경험도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나 봅니다. 떠오른 풍경을 사진으로 다시 확인하는데 싱크로율 99%.

그나저나 설악 사진은 없는건가요?ㅎㅎㅎ코스라도 알려주시지 겹친다면 '성취한 경험'의 풍경이 떠올랐을텐데, 아 나는 겨울 설악이었구나.ㅎㅎㅎ

와우 사진이 다 하나같이...그림 같네요. 특히 페루 69호수에서 라면 끓여먹으면 꿀맛일거 같습니다.

ㅎㅎㅎㅎㅎㅎ 진짜 그랬을 거예요. 거기까지 버너나 보온병을 들고 올라갈 수 있을지, 고산 위에서 물이 끓을 지는 의문이지만. 아, 빙하 위에서 뽀글이를 해먹은 적은 있습니다 >ㅁ<

와 ㅋㅋㅋㅋㅋ 비쥬얼만큼은 어메이징하군요 ㅋㅋㅋㅋ

미지근하고 덜 익었지만, 냄새만큼은 죽였어요! ㅋㅋㅋ

‘성취의 경험’,
아니더라도 ‘즐거운 경험’ 은 삶에서 무척 중요하고 필요하다. 만약 내가 산을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든가 순례길 내내 아프거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그 둘은 내게 피하고 싶은 고난이나 넘어야할 장애물처럼 기억되었을 지 모른다. 요리가 내게 그렇듯이.

대신 이겨내거나 이뤄내면 안다. 내가 얼마나 멋지고 강한 사람인지.

이 글의 핵심 문장은 여기군요~
요즘 안밖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마침 이 문장이 눈에 딱 들어옵니다. ㅎㅎㅎ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봄님! 멋집니다."

산티아고 가고 싶네요. 며칠 걸렸나요?

@syskwl 님 안녕하세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산티아고까지는 보통 28일에서 34일쯤 걸립니다 :)

많이 걸리네요. 자전거타고 3일만에 주파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자, 몸도 풀었으니 다음은 히말라야인가요!ㅎㅎ

꼭 가고싶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알고보니 몸이 풀린게 아니라...... 다리가 풀렸다는 사실 :p

멋있네요
물색이 ㄷ ㄷ

빙하가 녹아 에메랄드 빛 호수가 되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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