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클럽 공모전] 터널 끝에서 만난 남자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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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기 근처 사세요? 터널을 지나 인적이 드문 캄캄한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네 맞는데요. 이어폰을 빼면서 답했다. 그 남자는 작지만 건장한 체구에 캐리어를 한 손에 끌고 있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닌데요. 집이 근처면 제가 얼마 안 되는 돈을 드릴테니 생필품좀 가져다 주시면 안됩니까? 이미 뒷걸음질 할 태세를 갖춘채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그의 부탁을 들었다.

아니, 제가요, 여기 주민등록증 보이시죠? 저 맞죠? 제가 포항 사람인데요, 면접을 보러 왔는데요, 근처 사는 친구는 연락을 안 받고, 아까 게임방에서 지갑을 잃어버렸거든요,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아 죄송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처에 집이 아니라 사무실이거든요. 가던 길로 조금만 가시면 다이소가 있으니 급한 거라도 사세요. 저 그러면 사무실에서 하룻밤 재워주시면 안될까요? 아, 그게요 제가 혼자 쓰는 사무실이 아니라 곤란하네요. 그럼 근처 찜질방이라도 잡아주시면.. 제가 지금 핸드폰밖에 안가지고 나와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네. 그가 캐리어에서 전기톱 꺼내 내 뒤통수를 향해 달려오지는 않을까 자꾸 뒤를 돌아보며 밤길을 걸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짧은 대화 중에, 누가 더 많은 거짓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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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SNS에서 방금 막 완성한 뜨끈뜨끈한 그림 올리면 잠깐 오줌 싸러 갔다 온 사이에 순식간에 좋아요 한 800개 정도는 받고 싶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좋아요 만 오천개가 넘어가고 점심 숟가락을 들기 바로 직전에는 메세지로 가격을 묻는 사람들이 빗발치면 이사람 저사람 간을 보다가 가장 비싸게 부르는 사람한테 낙찰한 다음에 작품을 고이고이 포장지로 싸고 입금확인 하자마자 밖에 나가서 ....밖에 나가서... 뭐하지? 막 뒤로 걸어볼까 빠르게빠르게 뒤로 걷다가 부딪치는 사람한테 술 사줘야지. 술 먹다가도 메세지가 계속 오는거야 그러면 아아, 죄송합니다, 한 발 늦으셨어요, 선생님은 매번 타이밍이 늦으시네요 그러니까 제 블로그좀 자주 좀 확인하시라니까요 하하하 아쉽게 되었습니다, 다음 작품 언제 그리냐구요? 술 깨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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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접영하는 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주면 좋겠다. 독수리가 비상하듯 간지나게 두 팔을 펼친 다음 돌고래처럼 힘있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물에 입수하는 모습을 그리며 1년이 넘게 접영을 하는데, 실은 물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정녕 폼 떨어지는 모습에 가까운 건 아니었을까 하는 공포가 갑자기 음습해온다. 접영은 한 번을 휘젓더라도 간지가 생명인데.. 간지 안나면 백 바퀴를 돈다 하더라도 부럽지 않은데.. 길 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목격하더라도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다면 입수 후에 한 번은 접영으로 간지나게 휘젓고 난 다음에 구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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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봤다.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우리나라 3대 갤러리를 말해보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나라 3대 갤러리라니.. 첫째로 미술하면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 당황했다. 또 외국인 관광책자 같은데서 억지로 순위를 매겨 무엇이든 3대 맛집, 5대 경관 어쩌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문화예술을 다루는 기관의 면접관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던진 질문이라는 점이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췌 생각해봐도 그럴리가 없다. 대를 물려 삼대가 운영하는 갤러리라는 뜻이었을 게다. 나의 오해였길 바라며, 면접도 붙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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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걸 하려고 했지? 처음엔 어떤 확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방향을 잃었고 노동만 남았다. 하여 아무래도 이번 작업은 망할 것 같은데, 누군가 "이 작품의 의도가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을 때 "까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thelump




최근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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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이제야 봤네요.
제가 타이밍이 좀 늦은 듯 하네요.
다음 글은 언제 쓰실 예정인가요? :)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이 스치면서 보팅을 눌렀네요. 일기를 계속 쓰라는 계시인것 같습니다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요!

선생님은 매번 타이밍이 늦으시네요.

캬아~~~!!! (무릎 탁!탁!탁!탁!)

상상이 현실이 되길.. 바랍니다 ㅋㅋㅋ

잘 보고 갑니다.
접영 멋있게 잘 하실 수 있을거에요 ㅋㅋ

열심히 연습해서 한마리 범처럼 물 위를 뛰어오르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속마음을 가볍게 털어놓는 것도 좋죠. 1번은 남자의 정체가 많이 궁금하지만 이제 밝혀질 일은 없겠죠.

역시 그렇죠? 그 남자 생각할수록 수상합니다. 민증은 보여주면서 지갑은 잃어버렸다니.. 지갑과 민증을 분리해놓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 캐리어에는 또 뭐가 들었었는지...ㄷㄷㄷㄷ...

톡톡 튀는 맛이 강한 재미난 일기입니다 ㅎㅎ 저는 이런 글을 쓰려해도 성격인지 제대로 안 나오더라고요. 한식 주방장이 이태리 요리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자주 들릴게요.

ㅎㅎㅎ 요즘 포스팅에서 제가 넘 진지충이 된거 같아서 .. 기분전환 해봤습니다. 반갑습니다!! :)

와.. 저 이 글 너무 맘에 듭니다. 특히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이 있는가하면,

제가 과장해서 분석한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특정 상황을 비판한듯한 글도 보이고,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패러독스까지...

구성은 에피소드의 나열인데

묘하게 에피소드가 어우러지네요^^

글 정말로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게요~~

p.s 궁금해서 팔로우 하고 들어가봤더니 '영화감독'이셨군요..

어우러지나요? 딱히 의도는 없었고 그냥 나열했을 뿐이었습니다 ㅎㅎ 과장해서 분석해주셔서 넘 좋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런 맛깔나는 일기는 오랜만이네요!!
특히 2번!!ㅋㅋ

모든 작업자들의 소원 아니겠습니까 ㅎㅎㅎㅎ

우리나라 3대 갤러리.... ㅎㅎㅎㅎ 그 면접관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네요. 그 사람은 아직까지 모르겠죠, 자기가 멍청한 질문을 했단 걸.

그러게요. 그냥 저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는 헤헤 웃기만 했습니다 ㅎㅎ 붙어야니까 별 수 없지요..

ㅎㅎㅎ 셀레님 저도 역시 그 질문에서 황당함을 감출수가 없었어요. 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물은건지 말이에요 ㅎㅎ

무슨 족발5대천왕 이런것처럼 갤러리도 그런게 있다고 생각하나봐요.ㅋㅋㅋ 어휴..

족발5대천왕 ㅋㅋㅋㅋㅋㅋㅋ 기절이에요 셀레님!!

짧은 대화 속, 누가 더 거짓말을 많이 했을지.. 일기가 참 재밌네요! 자주 올려주세요 ㅎㅎㅎ

재밌게들 읽어주시니 저도 기분 좋습니다 ㅎㅎ 틈틈이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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