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가지감天歌之感] 바가바드기타 2장 삼캬요가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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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의 고요 속에 두려움을 버리고
브라마차랴의 맹세에 굳게 서서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라.
-바가바드기타








들어가기 전에


 바가바드기타 감상평 릴레이를 제안해주신 @peterchung님의 제안글을 본 순간, "이건 안내키는데." 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안에는 두 개의 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의식에 젖은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근원에 닿아있는 참나=아트만입니다.


 읽기 싫은 마음을 살펴보니 사회의식에 젖은 내가 보내는 목소리더군요. 바가바드기타인지, 바가다드기타인지 제목부터 헷갈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 힌두교 경전이 어려울 거라고 미리 예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한 번 정복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경전이 말하는 신, 아트만은 제가 환희에 차서 열 번이나 읽고도 늘 읽고 있는 [화이트북]에서 묘사된 신과 같음을 알게 되었고, 한 문장씩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저의 감상평은 경전의 원뜻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장 삼캬요가에 들어가기에 앞서 @bobo8님의 [천가지감天歌之感] 바가바드기타 1장을 읽으시면 고뇌에 찬 아르쥬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bobo8님의 요약]

판다왕이 죽고난 후 그 동생 드리트라슈트라가 왕이되고 판다왕의 다섯형제들을 거둬 자신의 100명의 아들들과 양육하게 됩니다. 그러나 드리트라슈트라의 맞아들인 듀료다나가 이들 판다바스(판다왕의 오형제)를 시샘하여 죽이려는 계획을 짭니다. 판다바스들의 어머니 쿤티는 그것을 알고 피해 살아납니다. 그리고 이웃나라의 국왕이 사위를 고르는 시험에 지원자를 받고 브라만으로 변장한 판다바스 오형제와 사촌인 듀료다나도 참가하게 되는데, 판다바스중 셋째인 아르쥬나가 이기어 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어머니 쿤티가 좋은 것은 나눠가져야지 하고 말실수를 하여서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라 오형제와 공주가 결혼하게됩니다. 드리트라슈트라의 명으로 국토의 절반중 강유역 황무지를 판다바스들에게 주게되고 사촌 듀료다나는 역시 시샘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계략을 꾸밉니다. 판다바스들은 땅을 모두 빼앗기고 결국 친지들을 등에 진 채 전쟁을 하게 됩니다.






2장 샴카 요가



 아르쥬나는 싸움터에서 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존경하는 스승들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게 소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르쥬나의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존경하는 스승을 죽이는 것도 슬프고, 스승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거나 싸움에서 도망쳤다는 오명을 남기는 상황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기쁨이라는 종착지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꼬여있는 우리의 인생처럼요.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않는다.





 그런 아르쥬나에게 크리슈나는 어진 이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 문장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한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이 대목은 윤회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불멸하며 스승이 죽든, 아르쥬나가 죽든 또 태어나서 새로운 육체를 입을 것이 분명한데 왜 슬퍼하냐고 크리슈나가 반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실체이고, 몸으로 느끼는 오감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자신의 외부에 있는 그 사건과 배후의 등장인물들이 그 사람에게 주는 감정에 집중하게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임사체험을 한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분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죽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순간, 마치 20년 전에 버렸던 386컴퓨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은 후,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오르더군요. 만약 내가 수천 번 윤회를 했다면 그 수많은 나의 죽음의 원인이 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분노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할 때처럼 내 아바타가 다른 아바타를 죽이고, 다른 아바타가 내 아바타를 죽였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화이트 북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살인자를 무서워하고 심판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그 존재를 사랑한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신의 섭리와 생명 그리고 신의 경이로움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제외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생명은 영속하기 때문이다."

-화이트북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설득합니다.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이 문장은 참 명쾌합니다. 네가 적들에게 죽임을 당해도 천당을 얻고, 적들을 이기면 지상의 기쁨을 누린다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껏 싸워도 될 것 같습니다.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 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이다.





 여기에서 "견디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에 푹 젖어 있으라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견디는 것"은 수동적으로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는" 삼캬요가를 통해 마음을 정복하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크리슈나는 쾌락과 고통을 같이 여기면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쾌락과 고통은 같은 상태라고 말할까요?




사람이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고통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쾌락속에서도 애착이 없으며, 애욕도 공포도 분노도 다 벗어버린 사람, 그 사람을 일컬어 생각이 결정된 성자라고 하느니라.




 위의 두 문장을 놓고 보니 쾌락과 고통은 한 쌍의 콤비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느끼는 쾌락과 고통은 뇌세포가 인지하는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죠.



영원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족속아, 싸워라.





 이 문장은 우리가 몸이 아니라 영혼이며, 바로 아트만이라고 말합니다. 영원불멸의 아트만이 잠시 머물러서 경험하기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게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르쥬나처럼 자신이 몸이라고 여기고 몸이 죽으면 의식이 사라질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우리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꺼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은 죽음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야말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 존재를 사랑하라, 마스터. 당신은 영원하며 당신은 신이라는 것을 알라.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신을 보호해온 본능적인 유산이 당신은 죽는 것이 아니라 진정 불멸의 존재이며, 제한된 인간이 아닌 무한한 신이라는 앎과 직면하면, 당신의 혼은 육체의 세포구조에 이러한 무한한 생각을 전달할 것이다."
-화이트북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면서 크리슈나가 말하는 신과 화이트북에 묘사된 신이 절묘하게 닮았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이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맥동하고, 확장하는, 진화하는 신은 영원으로 나아가는 생명 전체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을 허용하는 있음이며, 모든 만물에 스며들어 있으며, 앞으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약속이다. 신은 항상 변하고 항상 창조하고 항상 확장하며 항상 존재하는 의욕적인 힘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화이트북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셨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바가바드기타의 3장 감상평은 @nabinabi님을 지목하며 마지막으로 크리슈나의 말을 음미해봅니다.




네가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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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가 책으로 찾아봤어요. 사상 철학서인가보네요. 어렵네요..
대단하세요. 이런 걸 정리까지해주시니..

등장인물의 이름이 많고, 한 인물에도 여러 이름이 있어서 헷갈렸어요:)

크리슈나에게 쓰는 시(Prologue)와 함께 멋진 감상평을 써주셨습니다. 보얀님때문에 람타 화이트 북도 읽어보아야 겠네요. 처음에 내키지 않으셨는데 괜히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래도 다른 분들과 요정님의 지혜를 나눈다는 생각으로 아량을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저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 윤회에 대한 힌두교적 접근과 불교적 접근이 과연 차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됩니다. 제 종교적 성향이 양다리라서 그런가 봅니다. 기타에서의 아트만은 뭔가 불변하는 실체를 아트만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정하거든요. 불교의 강조점은 변화에 있고 기타(아트만)의 강조점은 불변에 있는데 사실 불변과 변화는 동전의 한면인거 같다고 생각이듭니다. 영적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진화하는 그 무엇이 불변이든 변화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지요.

현재는 과거다

에대하여 음미해봅니다. 내가 가는 시간의 화살을 몸으로 받으면 그것은 과거쪽이고 등지고 나아가게되면 미래이겠지요. 그렇다면 과거는 불변이지만 미래는 변화/창조성이지요. 전에 카르마와 창조성에서 카르마를 빼면 창조성만 남는다는 말씀이 생각나네요. 우리는 삶속에서 항상 과거에 매여 살지요. 그리고 미래에 대한 헛된 꿈을 꾸면서 현재를 바로 살지 못하지요. 그런데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것도 어찌보면 불변이지 나의 현재에 충만한 행위인 Now and Here(창조성)는 없는거지요. 그래서 미래도 과거가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창조성이 빠쪄버린, 즉 운명의 속박에 머물러 윤회를 때굴때굴 굴러가는 거지요. 창조성을 망각하고요. 그렇게 되면 팔자대로 산다는 말을 듣게 되겠지요.

마지막 구절을 다시 적어봅니다.

네가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ps.보얀님의 주 텍스트가 이 책이 맞지요?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링크를 달아놓습니다. 혹시 아니면 수정부탁드려요.


람타 화이트 북/제이지 나이트(저)

내가 존재함은 불변이고, 내가 태어나고 지혜를 얻은 후 죽고 다음 생에서 또 태어나고 지혜를 얻은 후 죽고... 이렇게 계속해서 확장하는 과정을 변화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불교와 힌두교 둘 다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과거다

이 부분은 람타에게서 직접 들은 말입니다. 우리가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어떤 대상에 포커스하는 순간=창조의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고, 그것이 구현되어 체험하는 순간은 이미 과거라고요. 창세기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는 바로 그 순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도 말이 되는게 빛이 대상에 닿아서 우리의 눈에 상으로 맺혀 뇌가 인지하는 동안에 이미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요 :)

링크된 책이 맞습니다. 화이트북을 읽어보시면, 모든 종교의 경전에 숨어있는 정수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경전이든 권력들의 이익을 위해 왜곡된 부분이 많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진리는 모래알 속 진주처럼 영롱하니까요. 이런 지식을 진리로 경험하기 위해 크리슈나의 말처럼 과거를 정복하고 요가에 전념해야겠습니다:)

굉장히 쉽게 풀어 주셔서 마치 원문을 이해를 한것 처럼 느껴 졌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원시 불교의 일반적인 토대가 어디서 왔는지 느껴 집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읽어보는 경전이라 전 줄거리 파악하는데도 몇 시간 걸렸습니다. 쉽게 읽히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님 방에 오면
마치 흥미로운 제 놀이터 같아요

편하고 즐겁게 놀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힌두교 경전이라... 신기해요!

전 성경도 안읽어봤는데 바가바드기타를 읽을 줄 꿈에도 몰랐어요^^

한줄한줄 소중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건 내키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심쿵했습니다
저도 제대로된 저에 의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했습니다.
저는 무엇을 향해 지금까지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윤회사상이 진짜 있을까 도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하고 살았습니다.
의식이 다른 나는 내가 아니다. 그건 그사람이다
지금이 나다 이 삶에 충실하게 살자!!
화이트북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옐로우캣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이트북은 바가바드기타보다 쉽게 읽힐 거예요.

한 문장 한 문장 에너지가 전해져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보얀님이 인용하신

"죽임을 당한 사람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생명은 영속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요. 그렇다면 화이트북과 바가바드기타에서 말하는 윤회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건가요?

네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이트북에서 윤회의 과정이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어요. 단, 그리스도의 재림을 굳게 믿는 상태로 죽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의식이 그대로 그 사람의 현실을 창조하기 때문에 적외선 차원에서 예수님이 오기만을 영겁의 시간속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보얀님 댓글 읽고 대학교 3학년 때 같은 과 교환학생이었던 일본인 친구랑 나눈 대화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록해두었던 것이 번개처럼 떠올랐어요!

나 : 나오토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나오토 : 응.
나 : 그 세계에서도 나오토는 여전히 나오토야?
나오토 : 응.
나 : 그 세계에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이 있어? 그러니까 나오토가 죽고 난 후에 나오토가 있게 되는 그 세계에는 살아있는 나도 있는거야?
나오토 : 내가 느끼는 네가 있는거지.

10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저도 깜짝 놀랐지 뭐예요.

나오토씨의 대답이 정말 절묘하네요^^
제 친구는 십대에서 이십대 중반까지 현실세계에서 귀신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그 때 얘기를 들어보면 어떤 집 담장 위에 사람의 머리만 얹어져 있다거나, 집 안에서 처음 보는 어린 아기가 뛰어다니는 걸 보기도 했대요.

바가바드기타와 화이트북의 내용을 함께보니 더 좋아요.
전자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후자는 참 시적이네요 :)

올리아님 오랜만이예요^^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화이트북을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얼마 전에 화이트북을 읽었었는데, 바가바드기타랑 화이트 북이랑
이어서 글을 써주셨네요.

마지막 크리슈나의 말을 음미해보게 되네요.
결과에 집착하지 행위 하는것.
내가 아니라 무위로써, 아트만으로써 행위하는
모습이 되고 싶네요.

첫 인트로도 좋았네요. 두개의 의식.
조용히 속삭이는 참나의 소리를 듣고
저도 행해야겠습니다.

화이트북을 읽으셨군요!
타오님 안의 아트만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네 읽었지요! 아트만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있던것을 알게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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