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쓰는 막간 일기 (추가)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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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쓴 글에 댓글과 보팅으로 너무나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청승맞지만 몇번이나 눈물이 핑 돌아서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예전엔 강해야 한다는 강박같은 것이 있어 어떻게든 눈물을 참았는데 나이들수록 울보가 되어가는 것 같네요. 나약해지는 것 같아 자존심도 좀 상합니다. 아무튼 이럴 때마다 ‘내가 또 스팀잇을 얕봤구나. 여길 떠나기는 글렀’ 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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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미국 몬타나라는 곳에 있었는데, 엄마는 예전에도 자전고 충돌 사고랍시고 허무맹랑한 일로 구급차를 타신 적이 있어 이번에도 무릎이나 까지셨겠지 싶었지요. 실제로 아빠도 별 일이 아니라고 하셨고요. 그렇게 보름쯤 지났을까. 싸이월드는 어떻게 알고 가입하셨는지, 아버지께서 제 미니홈피에 찾아와 댓글 하나를 달아놓으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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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안했는데... 저와는 거의 대화가 없던 아빠가 그런 다정한(?) 댓글을 굳이 달아놓고 가시다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쩐지 엄마랑 통 전화통화를 할 수도 없었고요. 어느날, 마침 한국에 있던 사촌동생에게 울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언니 어떡해, 이모 뇌에서 피가 안멈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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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학교는 자퇴처리를 했는데 제 사연을 듣고 등록금을 전액 환불해주더군요. 그제서야 이모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걱정할까봐 엄마 소식을 전하지 말라던 아빠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는데, 사실 얼른 제가 왔으면 좋겠다고. 제 목소리를 들으면 엄마가 깨어날 것만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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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는 아빠가 홀로 마중을 나와 계셨습니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없고, 날씨 얘기나 나눴지요. 엄마는 제가 도착하기 직전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지셨습니다. 백발이 되어 병원침대에 누워 계시는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 계신 것만 같아서, 저는 엄마한테 계속 말을 걸었어요. 비행기 타고 오는 길에 창밖에 별이 엄청 많이 떠있었어. 시애틀에 경유했는데 대기 시간이 길어서 시내에 나가 수산시장도 구경하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대답은 커녕 눈길 한번 안주시더라구요. 한달이 지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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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독하디 독하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는 왜 울컥울컥하는지. 하필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노트북을 가지고 카페에 나와 글을 쓰고 있는데 난감하네요. 그렇다고 슬픔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데이빗 게타(David Guetta) 의 흥겨운 음악을 듣고 있어요. 병원에서도 그다지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문병 온 사람들은 엄마가 꾼 돈을 안 갚으려고 저런다는 둥 농담을 일삼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보다는 럭비선수처럼 살이 찐 저 때문에 더 충격을 받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몬타나에서 취미로 럭비를 하며 토너먼트까지 나갔었어요. 이 얘기는 왜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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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할머니댁에 다녀왔습니다. 아빠 차(오빠 차 아님...) 를 얻어타고 갔는데, 전날 아빠와 크게 다투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불효막심하게도, 저는 그 고요함이 너무나 평온하고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제게 다섯 가지 질문을 계속 하셨습니다. 집은 어디냐, 한국엔 아주 온거냐, 결혼할 사람은 있냐, 일은 하냐, 동생은 뭐하냐.. 지난 번에도 물어보신 건데 잊으셨나 싶어서 열심히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송도에 살고,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고, 결혼할 사람은 없고, 지금은 일을 안하고, 동생은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어보십니다. 집은 어디냐, 한국엔 아주 온거냐, 결혼할 사람은 있냐.... 안그래도 저희 엄마 덕분에 <첫키스만 50번째>를 매일같이 찍고 있는데 할머니 앞에선 명함도 못내밀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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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댁을 떠나기 전, 자리에 앉아 아홉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대답을 다시 해드렸습니다. 질문 다섯개는 똑같았지만 제 대답 하나는 달랐습니다. 네, 있어요.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은 이야기를 할머니께 하나, 둘 꺼내 놓으니 그동안 무거웠던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그것만 기억하셔도 곤란한데... 알고보니 할머니의 큰 그림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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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는 길, 핸드폰을 장만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4개월만이네요. 새 핸드폰을 구매하는 것은 8년만입니다. 제일 신나는 것은 이제 핸드폰 본인인증을 할 수 있다는겁니다! 감격...ㅜㅜ 출시된 지 2년이 되었다는 아이폰6S 를 구입했습니다. 기계값이 16만원쯤 하더라구요. 제 옆에 있던 손님은 고등학생과 그녀의 어머니셨는데, 직원이 아이폰 6S 가 저렴하다며 소개하자 그 고등학생이 소스라치며 싫다고 하더군요. 어머니와 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저와 같은 모델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울기 직전이었고요. 공기계나 아빠 핸드폰을 얻어 쓰다가 4년만에 ‘내’ 핸드폰이 생겨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저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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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댓글을 달 때 에너지를 많이 쏟는 편입니다. 누가 보면 답답할 정도로요. 가진 건 시간 뿐이면서 요새는 잠을 푹 자지 못해 대댓글 다는 속도가 더 느려졌습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스팀잇을 하면 집중해서 신중하게 대댓글을 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핸드폰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어 새글쓰기를 누르고 말았네요. 이젠 마침 전화를 받고 근처 공원으로 갑니다. @zzoya 님의 스팀잇 로고가 그려진 에코백을 메고 다니는 여인네를 보면 아는 척 해주세요. 커피 쏘겠습니다.

(추가)
어머니 사고 관련 일은 벌써 몇 해전 일입니다.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어 그 연장선이자 번외처럼 한 이야기인데, 사정을 모르시는 분들께는 걱정을 끼쳐 드리고 말았네요. 이제는 훨씬 괜찮아진 일이랍니다!! 응원과 위로의 말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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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겪으셨군요. 이럴때 일수록 마음 잘 추스리시고 가족들 잘 보살피시면 좋을 것 같아요~

@musiciankiyu 님 좋은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 다행히 사고는 오래 전 일이고 지금 어머니께선 열심히 재활중에 계시답니다.

설마 송도에만 자주 출몰하십니까? :) 찾아서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싶은데. ㅋㅋ

강남에도 자주 출몰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집 앞에 있어서 ㅎㅎㅎ 처음엔 조금 부끄러워 로고 그려진 쪽이 안보이게 들고 다니다가 요즘엔 당당하게! 여름인데 냉커피 한잔 하시죠 :)

선선한 바람맞으시면서 기분전환하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응원할게요!!

@hwoong 님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더니 어지럽네요. 이것도 나름 기분전환인 듯 ㅎ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D

봄님..ㅠㅠ
봄님의 글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합니다
담담함
그리고 담담함..
답답함 아니예요!!^-^;
그냥 살폿 웃음 한 번 드리려고 농담 한 번...

나이가 들수록 울보..여기 한 명 추가요
쓰고나서 또 혼자 울컥!!
휴,,,

뜰님!! 저도 요즘 왜이리 울컥울컥 하는지. 나이들면 여성호르몬이 늘어난다는데.. 그래서 눈물이 많아지나 봐요. 진작에 좀 여성스러웠으면 럭비도 안했을텐데.... 공공장소에서 울컥하면 남들이 당황하니 담다디 담다디 담담하게... (커피를 마셨더니 아재호르몬이..)

담다디...ㅋㅋ 국졸 매력 뿜뿜~

ㅋㅋㅋ국졸... 친근....

갑자기 심신이 생각나네요.. 물론 아시겠죠..

간첩도 아는 사람아니었던가요?
총춤. ㅋ

늙은 친구에게 쌍권총을..

나이들면 여성 호르몬이 많아지는건 남자고...
여잔 반대............
그래서 아재 호르몬이.....

응원합니다~!!빠샤!!

@ellykinkim 님 응원감사합니다!!! 빠샤샤샤!!!

봄날님 :-) 하_ 뭔가 이렇게 담담하게 얘기하시는 봄날님을 앞에 두고 그저 한껏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 얼마나 울고 싶으셨을까, 힘이 드셨을까, 이야기하고 싶지만 꾹 참아보고 커피 한 모금 마시며 그저 방긋 웃어드리고 싶어요ㅎㅎㅎ

번역일 마치고 '오늘은 진짜 타자 그만 두드리고 싶다!!' 생각하다가 결국 스팀잇에 들어왔어요ㅎㅎㅎ 밀린 글이 많은데 언제 다 진행할지 모르겠지만, 급하지 않게 천천히 걸어나가면 되겠지요. :-)

아, 나도 송도가서 봄날님이랑 같이 커피 한 잔 하고파요 ㅎㅎㅎㅎㅎ :-))

채린님!! :) 채린님의 따뜻한 미소를 마구마구, 따뜻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같이 웃고 있는 거 보이시나요 :) 아마 많이 울고 싶었을텐데... 울지 못하겠더라구요. 울면 이게 정말 슬픈 일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때 못 운 것을 지금 우나 싶다가도 틈만 나면 눈물이 나와서 당황... 보는 사람들은 더 당황 ㅎㅎㅎㅎ

아. 진짜 타자 그만 두드리고 싶다, 하는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위해 타자를 쳐주신 채린님 ㅜㅜㅜ 고마워요!! 가끔 글이나 댓글이 밀려 스팀잇이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가도, 아직까진 제게 고마운 구석이 더 많아 으이구!! 하면서 또 들어오게 되더라구요 ㅎㅎㅎ

송도가 될 지, 뉴질랜드가 될 지는 몰라도 언젠가 채린님과 커피 한 잔 할 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요!! 그때까지 천천히 걸어나가요, 우리 :)

새 폰으로 쓴 첫 글이네요.ㅎㅎ 새 폰으로 심기일전하여 멋진 글 더 많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아픈 이야기를 얘기하긴 참 쉽지 않을 텐데, 담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오히려 짠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좀전에 이 글과 뭔가 조금 통하는 글을 올렸는데요. 스프링필드님의 아픈 부분이 스프링필드님에게 누구도 줄 수 없는 마음의 눈을 열어줄 수 있길 바랍니다.. 별 위안은 안되는 얘기겠지만요. 즐거운 불금 보내세요.^^

노트북으로 썼다구욧!! ㅋㅋㅋ 아직 새 핸드폰에 적응을 못해서 스팀잇은 언감생심이랍니다 :D
예전엔 아팠을 이야기지만 그때는 아플 겨를도 없었거나, 사실은 아픔을 느끼기 싫었어요. 지금은 이렇게 마주볼 수 있으니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은 거겠죠. 아픔이 그때만큼 두렵지 않다거나 :) 신기하게도, 저도 그 뒤로 제게 제 3의 눈이 생겼다는 느낌이 종종 들 때가 있어요. 이마에 생겨야 그럴싸 한데... 마음에 생겼군요. 쏠메님에겐 진작부터 위안도, 자극도 많이 받고 있답니다. 분에 넘치도록... ^^

봄님에게 간 새 핸드폰 주인 잘만난 듯....
반면 고등학생에게 간 아이는 주인 잘못 만나서 조만간...액정 나갈지도...(새거 바꿔달라고 조를것 같은...)

KakaoTalk_20180615_200133204.jpg

잘 만난게 확실하냐고 제 예전 폰이 물어봐달랍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발...살아남길...

스팀잇로고 에코백 기억 해야 겠습니다 ㅎ ㅎ

저도 배트맨 로고를 보면 혹시 @noisysky 님 아니냐고 물어볼까봐요... ㅎㅎ

배트맨 로고입은 사람 보시면 아마도 김건모 일거에요🤔

ㅋㅋㅋ 그럼 김건모에게 혹시 @noisysky 님 아니냐고...

ㅋㅋㅋㅋ

봄님!! 뭐든 너무 참으려 애쓰지마세요~ 언제나 진짜 어른 같은 봄님! 화이팅! ^^

로사님!! 잘 지내셨죠! :) 예전 로사님의 명란 계란말이 이후로 계란말이 만들 때마다 로사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신기하게도! 그래서 그저께도 로사님 생각을 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ㅎㅎㅎ :D

저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어요! 그런데 어른이 있기는 한걸까요 ㅎㅎㅎ 그저 나이를 먹었을 뿐인데.. 다들 어른이 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로사님도 화이팅!!! 고마워요!!

맞아요 봄님~ 내가 열살쯤 더 먹으면 어른이 돼 있겠지 싶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내가 어른이긴 한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걸 보면말이에요~ ^^ 그럼 정정!! 봄님은 참 좋은 사람! 사람냄새 폴폴나는 그런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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