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황현산과 마이클조던, <밤이 선생이다>

in #kr-book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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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과 마이클 조던



십삼 년 전, 나는 위대한 화가의 꿈을 품고 노력 끝에 미대에 진학했다. 어찌 된 일인지 정작 입학해서는 캔버스 앞에서 붓 잡는 시간보다 바이엘 앞에서 하얗고 검은 건반을 골라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림과 피아노에 할애한 시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농구 코트 위에서 보냈다.

아침에 등교하여 맨 처음 가방을 내려놓는 장소는 농구 코트였다. 수업을 잊고 한참 공을 튀기다 보면 어느샌가 우리의 학점도 제멋대로 튀어 다녔다. 그래도 신성한 지성의 터전인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농구만 하면 되겠느냐며 학점 관리에 신경을 쓰고자 강의실로 서둘로 발걸음을 옮기던 의식 있던 사람들도 출첵만 하고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당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뱀 같은 돌파 능력과 빨랫줄 같은 패싱 능력, 그리고 송곳 같은 슈팅 능력으로 코트의 마술사로 불리길 원했지만 사실은 그냥 겨우 팀에 민폐 끼치지 않는 평범한 플레이어에 불과했다. 군더더기 살도 없고 그렇다고 근육도 없는 빼빼로 체형이었던 나는 몸싸움에서 자주 밀렸다. 승부욕도 과한 편이 아니라 지면 지고 이기면 이기는 대로 게임을 즐겼다. 그러나 코트 위의 평범한 빼빼로 나에게도 승부욕이 끓어오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1:1 게임이었다. 농구에서 1:1 게임은 한 쪽이 커다란 기술적 우위를 점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신체적 우위로 승부가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좆밥싸움에서는 키 큰 사람이 장땡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실기실에서 컴퓨터로 농구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 손오공과 더불어 초등학생 때 나의 영웅, 농구계의 레전드, 마이클 조던의 영상을 봤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닌데도 새삼 보고 또 봐도 놀라운 플레이였다. 자신보다 체격이 훨씬 더 큰 상대를 농락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열이었다. 그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입을 벌린 채 한 시간을 내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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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보니 어느새 코트에 슬금슬금 인원이 모이고 있었다. 나는 신발 끈을 동여매고 뛰쳐나갔다. 그런데 코트 분위기는 팀플레이보다는 한 명씩 1:1을 하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상대는 덩치가 흡사 고릴라와 같고 키는 북한산 비봉처럼 큰, 게다가 체격에 맞지 않는 순발력까지 지닌 '채치수'라고 불리었던 학교 선배였다. 이렇게 체급 차와 실력차가 현저히 차이가 나는 대결 농구에서는 미스 매치(miss match)라고 한다.

평소 같았으면 나의 불타오르던 1:1 승부욕도 일 합을 넘지 못하고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 날은 달랐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자감이 심장 저 깊숙한 곳에서 나를 재촉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힘을 빠득 주고, 날 가소롭게 쳐다보는 선배를 향해 돌진하는 척하다가 크로스 오버(cross over)에 이은 스탭 백(step back) 기술을 이용해 득점 성공! 그다음에는 스핀 무브(spin move)에 이은 페이더웨이(fade away) 기술을 부려 득점 성공!

모두 조던의 기술이었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잠시 전성기 조던의 영혼이 나의 천한 빼빼로 육체에 빙의된 것이 아니었을까. 시합 직전에 봤던 조던의 영상이 내 몸속에서 끊기지 않고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흔치 않지만 좋고 훌륭한 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때론 마법처럼 내 능력을 바뀌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두가 길었다. 이번에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었다. 깊은 사유와 함께 담백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문장의 경지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마치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보는 듯했다. 좋고 훌륭한 글을 감상한 직후라 그런지, 나도 뭘 막 쓰고 싶고, 빼빼로처럼 빈약한 지식의 나도 왠지 그처럼 잘 쓸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밤이 선생이다>를 읽었으니 혹시 아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코트에서 벌어졌던 마법처럼 내 손끝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장을 쏟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다시 읽으러 가야겠다.



ISBN : 9788954621496



@thelump


최근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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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진진한 얘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때 호나우두를 꿈꾸며 그라운드를 뛰곤 했는데 제게는 한 번도 오신적이 없던 호나우두님.... ㅎㅎ <밤이 선생이다> 리뷰도 혹시 올리실 예정인가요? 만약 그러시다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ㅎㅎㅎㅎ 시간과 장소가 맞아야 영접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리고 좀 특이한 독후감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글이 바로 <밤의 선생이다>의 리뷰입니다. 한마디로 책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돌려 표현해봤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 고이 접었던 페이지를 다시 읽으러 가신다길래 ㅎㅎ 혹시 다시 오시나 했습니다. ^^

아, 저는 좋은 구절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살짝 접어놓았다가 다시 읽는 습관이 있거든요. 다시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글에 ㅎㅎ

크로스 오버는 아이버슨이 본좌져...심지어 조던도 제쳤던 기술이었져. 아, 90년 대 중반, 불스의 벽에 부딪혀 항상 플레이 오프에서 깨졌던 뉴욕 닉스, 항상 졌지만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그 당시의 농구는 정말 살아 있었져^^

네.. 조던을 두 번 속인 레전드 영상이 기억나네요. 90년대에 nba를 보고 다시 요즘 보고 있습니다. 요즘엔 선수들이 너나 할거없이 유로스텝을 밟으며 댄스를 추더군요.

감독님!! 진짜 글을 너무 잘쓰세요!!
너무 부럽네요~~ ㅎㅎㅋ

이렇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업을 잊고 한참 공을 튀기다 보면 어느샌가 우리의 학점도 제멋대로 튀어 다녔다.

크헉ㅋㅋㅋㅋ 유쾌하군요 :)

내 손끝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장을 쏟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다시 읽으러 가야겠다.

벌써부터 잔잔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보아 이미 싲가하신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농구만 죽어라 했던것이 이렇게 '잔잔한' 글감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ㅎㅎ

재밌습니다. 북리뷰에 농구할 때 조던 빙의 한 이야기로 9할을 채우시다니.

저는 이상하게도 뭔가를 리뷰할 때 계속 딴소리하는걸 좋아합니다..

저도 아껴 읽고 있습니다^^

오 보고계시는군요! ^^

저도 요새는 글을 맛깔나게 쓰시는 분들이 매우 부럽더라구요. 흑흑.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전달, 적당한 유머, 넓은 시야 등..

서두에 마이클 조던의 빙의 이야기를 보며 '설마 오늘 오쟁님 안에 황현산님이 빙의되어 신들린 글이 나오는 건가?'했는데..바람이었군요. 하하

앞으로도 좋은 포스팅 기대할게요^^
좋은 밤되셔요!

언젠가 빙의되어 촌철살인의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운동잘하시는 미술전공자분들은 참 신기합니다....ㅋㅋㅋ
전 공으로 하는 건 하나도 할줄 몰라요ㅋㅋ

그냥 거기서 거기인 애들끼리 모여서 노는거지 잘하진 않았습니다 ㅋㅋㅋ 원래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노는게 가장 재미있자나요..

신박한 북리뷰네요ㅎㅎ 서론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서평 쓰는 방식입니다. 재밌으면 장떙 아니겠습니까 ㅋㅋ 감사합니다.

저는 엉뚱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5분쯤 가면 거기에 마이클 조던이 살았던 집이 있어요. 원래 마이클 조던은 시카고 근교의 Highland Park 라는 곳에 사는데 (거기도 여기서 차로 3시간) 아들이 제가 사는 여기 도시의 대학교를 들어와서 매주 아들 경기 보러오면 호텔에 가기 싫어서 그냥 집을 하나 사서 거기에 머물고 아들도 가끔 그 집을 쓰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 중의 하나구요.

그래서 보여줄 것 없는 이 소도시에서 한국 분들 놀러오면 그 집을 보여주곤 해요. @thelump 님도 오시면 좋아할 듯..

정말 주제를 벗어나는 댓글이네요. ^^

와와 몇해전에 시카고에 3개월정도 머물렀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놀러갔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라도 다시 갈일이 있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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