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같은 이상의 글, '권태'

in kr-book •  last year  (edited)



ISBN : 9788937429224


129페이지, A5 사이즈 보다 더 작은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 단편 소설 7편 모음. 내가 가진 책 중에 가장 얇고 작고 가벼운 책이었다. 작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서점에서 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겨우 덮은 건 6개월도 더 지난 오늘이다.

왜 하필 이상을 골랐었나.

아마도 살롱에 대한 개념에 한창 빠져있을 때였던 것 같다. 제비다방의 이상을 궁금해했고, 그렇게도 독특한 세계관을 지녔다는 이상을 읽어내고 픈 감성과 허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발리 여행을 앞두고 있었고, 7시간의 비행길에 다 읽어내려는 마음가짐이었다. 결국 '날개' 한 편을 읽고 이 책을 덮어버렸고, 최근 교토여행길에 겨우 반을 읽었으며, 돌아온 후 오기가 생겨 다시 펴들어 힘겹게 그 끝을 봤다.

다 읽고도 리뷰를 쓸 자신이 나지 않아서 이상에 대해서 좀 찾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읽고 있는 김향안의 에세이에 이상과 이상 문학에 대한 글이 남겨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상의 아내였던 김향안은 에세이에서 그 어떤 비평가도 파악하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듯 했다.




불친절한 무의식의 흐름


김향안의 친절한 설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바로 이상의 불친절한 표현방식 때문이었다. 요즘 '의식의 흐름'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이상 앞에서는 아무도 주름을 잡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갔다하면서 매우 불친절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탁월한 비유와 묘사는 모든 문장이 마치 시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만큼 그가 표현해내는 감각과 뉘앙스는 섬세하고 또 섬세하다. 하나의 단어로 명료하게 끝나는 법이 없는데,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김향안은 에세이에서 "피해망상 같은 병적인 것이 이상 문학의 성격이다. 상식적인 추리, 상상을 뛰어넘어서 심연을 파헤쳐서 스스로 부상하는 것을 향락하는" 라고 설명했다. 난 이 표현이 너무 감탄스러웠다. 그 어떤 프레임 안에도 담길 수 없는 이상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은 어쩌면 김향안 하나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


알 수 없는 망상의 세계들을 읽어내려가며 어느 새 소설 속 장면들을 머리속으로 그리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것은 이상이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단정짓게 되었다. 1인칭 시점이었던 탓도 있고, 머릿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방식 때문이었던 탓도 있다. 단편이지만 이전의 편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도 있었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여실히 보여주는 뉘앙스도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좋게만 볼 수는 없었던 건, 소설에서 묘사되는 '나'는 염세주의인지 그저 태만한 것인지 알길없이 시간을 축내는 인간이었다. 남편으로서는 이보다 더 가장의 구실을 못할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아내의 외도에도 눈을 감아버리며 아내가 벌어오는 돈에 기댄다. 기생과도 연을 맺으며,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일삼는다.

이것 역시 김향안의 도움으로 알게 된 것인데, 그는 아마도 자신의 현실을 소재로 비틀기를 매우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글로만 그를 접한다면 모두가 그의 이야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법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그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그는 착실한 남편이었고 외도 또한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많은 것들이 그녀를 오해하고 잘못된 인식을 갖게 만들어 그것을 오래도록 용서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림 같은 글, 시 같은 소설


죽기 전 동경에서 쓴 것으로 추측되는 '권태'라는 단편이 가장 읽어내리기 쉬웠는데, 이제 좀 이해하려하니 끝나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물 일곱의 나이로 죽음을 앞둔 그는 세상 그 모든 것에 권태로움을 느꼈고 그것을 굳이 포장하지도 비하하지도 않은채 그려냈다.

내가 얼마만큼 이상의 글을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도 쉽게 권할 수도 없는 글이 있다면 바로 '이상'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글로 묘사했고, 에피소드가 아닌 감정의 변화를 함축하기도 했다가 풀어내기도 했다.

김향안은 이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공유해본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피해망상 같은 병적인 것이 이상 문학의 성격이다. 상식적인 추리, 상상을 뛰어넘어서 심연을 파헤쳐서 스스로 부상하는 것을 향락하는"

이 부분에서 똑같이 감탄하게 되네요.
이상 선생님의 글은 솔직히 병적으로 집요하고 어렵다는 편견을 갖고 있어서
매체에서 접하는 외에는 따로 작품을 골똘히 본 적은 없는데..
@emotionalp님의 리뷰글을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나저나 본인의 작품 세계를 저렇게 고스란히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큰 축복이 아닐까 싶네요..

아마 배작가님은 저보다 더 잘 이해하실거에요 ㅎㅎ김향안 역시 예술가 못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스팀가격이 떨어지는 절대보팅금액이 줄어드네요...
ㅠㅠ
그래도 같이 힘냅시다!! 화이팅!
후후후 딸기청이나 만들어볼까합니다!
https://steemit.com/kr/@mmcartoon-kr/6jd2ea

오를날을기다려봅니다 :)

이상은 천재이었던게 분명합니다. 이상하면 금홍이가 떠오르는건 왜일가요 ㅠㅠ

금홍이 인상적이긴했어요 ㅎㅎㅎ

와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 보는 책들 끝나면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관점의 리뷰도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