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숨겨진 세상 스테이지 쓰리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last year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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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파리로 가자. 파리에서 전시를 열자. 진짜로 가는 거야.

처음 젠젠과 우툰에게 파리 이야기를 건넨 것은 이미 한참 전이었으나 이후로 한 번도 구체적인 계획을 밝힌 적 없었으니 '진짜로' 가는 거라는 나의 말은 좀 뜬금없는 선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로' 가느냐고 되묻지도, 생각할 시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계획을 코앞에 들이닥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결국 파리에 가게 되는구나' 하고.

아무리 가을의 파리일지라도 분명 이건 낭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제안이었다. 무모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일에 필요한 추진력이 절반 이상 무모함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심과 함께 일을 시작하며 내 안에는 언제나처럼 '막막한 희망'이 자리 잡았다. 그건 막막한 '희망'임과 동시에 '막막'한 희망이기도 했다. 낙하산을 둘러메고 벼랑 끝으로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그걸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호기심이 5분마다 바톤 터치를 했다. 낙하산이 제때 펼쳐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겁을 먹다가도 내가 하늘을 걷는 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금세 평온해졌다. 결국 낙하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도 하울과 소피처럼 하늘을 걷는 것도 무척 짜릿하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조촐한 파티를 계획했던 나의 생일, 젠젠은 헤밍웨이의 에세이집 <내가 사랑한 파리>를 생일 선물이라며 건넸다. 알록달록한 그 책의 표지에는 헤밍웨이와 그의 첫 번째 파트너 해들리의 다정한 사진이 박혀 있었다. 출간 예정인 젠젠의 원고 <길 위의 술>에는 실로 파괴적인 술꾼이었던 두 작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였던 두 술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들에게 존경을 넘어 동질감과 연민을 품게 되었노라 젠젠은 여러 번 말한 바 있었다. 내가 읽은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뿐이고, 헤밍웨이는 한 번도 읽은 적 없으며, 앞으로도 읽을 계획이 없었는데, 젠젠이 들려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더 늦기 전에 그들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젠젠이 선물한 헤밍웨이의 에세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웃겨서 읽는 내내 몇 번이나 폭소를 뿜었다. <노인과 바다>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지 않았지만, 뭔가 엄청나게 진지하고 심오한 글을 쓸 것 같은 헤밍웨이가 유머를 갖춘 작가일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기에 반전의 묘미가 있었달까. 그러고 보면 감탄이 터져 나오는 글을 쓰는 작가들은 하나같이 아주 수준 높은 유머를 구사하는 편이다.

<내가 사랑한 파리>에는 몇 년 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알게 된 거트루드 스타인의 이야기도 여러 번 등장한다. 스타인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자마자 그녀가 <세상은 둥글다The world is round>라는 제목의 동화를 썼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스타인의 삶과 그녀의 이야기가 파리에서 내가 만나야 할 텍스트가 되리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심장이 뛰었다. 스타인의 동화를 소리내어 읽고, 헤밍웨이가 살던 동네, 그의 아파트, 그의 산책로, 자주 가던 공원, 그의 단골 술집에 이어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까지 글에서 헤밍웨이가 언급한 모든 장소를 구글맵에 표시해 두었다. 젠젠이 선물한 에세이는 '막막'한 희망을 막막한 '희망'으로 단번에 바꾸었다.

로렌스와 계약서를 주고받은 뒤, 대관료의 반을 지불했다. 확정된 날짜와 장소를 우툰과 젠젠에게 알렸다. 우툰은 그에 맞춰 여름휴가를 냈고, 젠젠은 파리 일정 이후 '어쩌다, 크루즈 시즌 투'를 이어가기로 했다.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 정해진 것은 장소와 시간뿐이었지만, 밑그림을 그렸으니 이제 함께 칠하면 된다. 우툰은 늘 뿌옇기만 한 나의 창문에 유리 세정제를 뿌리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열심히 문지르자. 열심히 창문을 닦자. 이 막막한 희망에 의심 없이 동참한 두 사람과 함께 뿌연 창문 뒤에 가려진 숨겨진 세상을 발견하자. 이인삼각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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