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og RPG] 2. 모던 타임즈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image.png


4시간도 채 잠들지 못하고 오전 10시 번쩍 눈이 뜨인다. 1036은 어제 미리 봐 둔 카페에 문의 전화를 한다. 1036은 전화 거는 걸 싫어한다. 배달을 시킬 때도 무조건 앱을 사용한다. 그러나 부스터 모드가 작동하는 한 거침이 없다.


“여보세요, 알바몬에서 보고 연락드리는데요.”
“사람 구했어요.”

….


“여보세요, 알바몬에서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아, 네 혹시 오늘 오후에 면접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재빨리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 와중에 지하철 시간 놓치지 않기 퀘스트 달성, 길 찾기 저주에 걸린 1036은 애먼 사무실 문을 두 개나 두드린 후 원래의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휴, 간신히 미션 완료. 1036은 알바 퀘스트에 참여한 지 6년이 넘었다. 엄숙하고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에 매우 당황했다. 막연히 그곳이 카페 본사 사무실 일 거라 혼자 착각했기 때문이다.

도착하자 그들은 설명 없이 비어 있는 이력서 양식을 내밀었다. 사진이 없어 당황하는 1036에게 신분증 사진을 복사해서 붙이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1036은 이력서를 채우며 생각했다. 요새는 카페 알바도 인력사무소를 거쳐서 뽑는구나.

요즘 애들 같아 보이는 발랄한 NPC가 해당 카페에 관해서 설명한 후, 1036에 대해서 몇 가지 확인차 질문을 던진다. 출근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카페 알바는 어디서 얼마나 했는지, 보건증은 있는지,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지. 최근 경력이 없는 점만 제외하면 괜찮아 보인다(임무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희망적이다. 알바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군말 없이 일할 부품의 여부이다.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점이 절박해 보여서 먹힐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1036은 이 자리가 인력 충원인지 시세 확장에 의한 건지 물었다. 최근 알바들이 힘들어서 나가고,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1036은 친절한 NPC의 멋진 드라이브 실력을 구경하며 카페로 면접을 보러 갔다. 카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기업 S 공장 지대 맞은편에 우뚝 서 있다. 횡단보도에 양손 가득 빵과 커피를 잔뜩 사서 바삐 사무실로 돌아가는 캐릭터들이 보였다. 10시부터 2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미친 듯이 바쁘다고 했다. 1036은 옛날 퀘스트를 떠올리며 커피도 만들고 빵도 만들고 계산대도 보고 청소도 하고 전반적인 카페 일을 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러나 이번 일자리는 오로지 음료만을 제조하는 자리였다. 음료를 만드는 사람, 빵을 만드는 사람, 계산대를 보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카페는 거대했다. 1층엔 10명의 직원이 검은색 반팔을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 두건을 쓰고 음료를 만들고 빵을 굽고 있었다. 계산대에서 끊임없이 손님을 받고 있다. 진열대가 빵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2층은 앉을 자리가 있었고, 루프탑도 있었다. 카페는 넓고 쾌적했다. 인테리어도 모던했다. 자리마다 사람이 가득했고 넓은 주차장은 차로 가득 찼다.

전무라고 불리는 캐릭터가 1036을 면접했다. 전무 캐릭터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잠시 자신의 처지와 비전에 관한 브리핑을 해주었다. 카페를 연 지 6개월이 되었고 이곳이 처음이라 했다. 돈을 어떻게 번 건지 모르지만 부자가 확실하다. 생활잡화점이 들어와 있는 그 주변 일대 땅과 건물이 모두 그 남자 가족의 소유였다. 남자는 곧 자리를 잡으면 2호점, 3호점을 만들 생각이고 지금 자리 건물을 헐고 30층짜리 빌딩을 지을 거라고 말했다.

남자는 1036에게 별 질문이 없었다. 최근 카페 경력이 없는 건 상관없다고 했다. 어차피 여기서 배우는 건 다른 문제니 가장 중요한 건 오래 일할 사람이었다. 처음 원대한 비전을 말하는 남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1036이였다면, 열심히 일하면 너에게도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거라는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캐릭터는 모두 다르다. 남자가 그 말을 한 이유는 자신을 할 일이 많고 신경 쓸 게 많으니 사소한 알바 문제 따위로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지 말라는 뜻이란 걸 곧 알게 되었다. 물론 남자는 젠틀하고 나이스했다. 고작 알바 면접을 온 1036에게도 커피를 한 잔 대접했다.



1036은 카페를 내려가면서 알바생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이젠 카페도 모던 타임즈구나. 카페 알바생도 부품이 되었어.’

1036은 아까 사장이 한 말을 다시 되새기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알바들이 직원인데 알바처럼 책임감 없이 일한다고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월급은 최저시급에 월차 따윈 없었다. 스케줄 조정도 되지 않고 인력이 모자라 일주일에 6일씩 일하고 마음대로 스케줄 조정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오래 일할 사람을 뽑으면서 법에 저촉되지 않을 최저가 부품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남자는 이 일이 보기보다 엄청 힘들 거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그렇지만 그런 사장은 없겠지?’

1036은 자신이 사장이라면 사람을 부품처럼 대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사장도 아닌 데다가 비즈니스도 모르는 순진한 멍청이라고 세상은 말하겠지만 1036이 보기엔 세상이 틀려먹었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서로 의심하는 꼴이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쟤가 날 배신할지 모르니 나도 배신하는 게 아니다. 서로 믿으면 가장 좋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게 왜 안 된다는 건지 1036은 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좋은 사람들이 찾아올 거야. 부품처럼 굴리는 것보다 같은 일을 하면서 훨씬 즐겁고 훨씬 친절하게 훨씬 오래 일할 수 있을 거야. 바보들.’



1036은 세상이 답답했다. 굳이 부품으로 만들 필요 없는 일에도 부품으로 돌려막고 그게 최고라 여기는 세상이 지긋지긋했다.

‘그렇지만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돈도 없고 사장도 아니야.’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평소라면 1036은 체념했을 것이다. ‘그래 내가 뭐라고… 나나 잘하자. 현실에 적응하자.’ 그러나 부스터 모드가 켜진 1036은 마음속 말도 안 되는 씨앗을 하나 심었다.

‘카페를 만들자! 그런 카페가 없다면 내가 만들자. 돈 많이 벌어서 사람 귀하게 쓸 줄 아는 이왕이면 창작자들을 호의가 아니라 수익으로 돕는 자립하게 만드는 카페를 만들자.’



카페에 알바 면접을 보러 온 1036이 어쩌다 홀로 거대한 퀘스트를 만든 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돌아가는 길에 1036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자리를 열심히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선 난 또 완전 부품일 거야. 이왕이면 조금 더 편한 부품 자리를 알아보자. 물론 운명이 원한다면 기꺼이 남자의 모던 타임즈 부품이 되어 주리라.

to be continued...


Analog RPG
프롤로그 – No.1036은 독립했다.
1. 기꺼이 다시 부품.


2021년 6월 8일, by 고물

Sort:  

흥미진진해요. 1036 아자!

우와와 도잠님에게 읽히고 있다! 너무 좋아요☺️

Loading...
 3 years ago 

전화 거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길 찾기 저주에 걸린 1036과 저랑 너무 닮아서 더 재밌어요. 전 바에 물건 두고 오고서는 네이버 바 연락처에 핸드폰 번호가 있어서 문자로 문의하는 인간...부품이기를 거부한 1036의 다음 행보는? 두둔!

ㅋㅋㅋㅋㅋㅋ 젠님 저보다 윗길이시네요. 전 춘자님 나레이션 들으러 가야쥥
아날로그 게임인지라 다소 천천히 진행 됩니다! 진행을 저도 아직 모르는 게 맛 두둥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2
JST 0.033
BTC 63318.34
ETH 3108.17
USDT 1.00
SBD 3.97